제발 좀 늙지 마시요

경고했소

by 수다쟁이

누구에게나 툭 건들면 넘쳐흐르는 눈물 버튼이 있을 건데 내 눈물 버튼의 키워드는 "가족"이다.


특히 부모자식 간의 정이다.


우리 부모님 말도 들어봐야겠지만 엄마 아빠는 참 내 말을 안 듣는다. 특히나 나이 든 아빠가 그렇다.

이상하게도 장기간 의지하는 것은 엄마인데, 결정적인 순간에 내게 힘이 되는 말을 해주는 것은 항상 아빠였다.


취업을 하지 못해서 나는 사회에서 원하지 않는 사람인가 봐,라는 말을 했을 때, 아버지는 내게 말했다. "너 정도는 먹여 살릴 수 있으니 걱정 마라." 그 말이 얼마나 든든하던지.

추후에 아버지가 그때 그렇게 말해 주어서 버틸 수 있었다?라는 말에 "내가? 그렇게는 못하니 알아서 잘 살아라"라고 정정하셨긴 했지만 말이다.


한때, "00 이는 크면 누구랑 결혼할 거야?"라는 말에 "아빠!"라고 대답하던 딸자식은 어느 날 밑도 끝도 없이 처음 보는 남자를 데려와 이놈이랑 결혼할 거라고 말했다. 갔음 잘 살 것이지 그마저도 못하고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 엄마는 "네가 계속 가정을 지키기 원한다면 내가 그 집에 가서 무릎이라도 꿇어주마"라고 이야기했었고 아빠는 "나는 못한다. 헤어져라."라고 이야기했었다.


내가 잘 못한 것도 아닌데 딸 가진 게 죄라고 왜 엄마가 가서 사과하겠다냐고 광광 난리를 피울 뻔한 나는 아버지의 말에 진정할 수 있었다.


언제나 대들보 같은 사람이다. 든든한 사람이고 인생의 멘토였다. 지금의 내 나이에 아버지는 나보다 훨씬 어른이었고 많은 것을 책임지고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늙는다.. 늙었고 늙고 있다.


"네 아버지는 허벅지가 너무 두꺼워서 항상 바지 사타구니가 헤어진다"며 초등학생 딸을 잡고 늘어놓은 주책맞은 엄마의 자랑과는 달리 아버지의 근육은 쏙 빠져서 이제는 어디에 뒤지지 않는 훈녀핏을 가지게 되었고 그놈의 유튜브를 하루 종일 들어다 보고 있는 아버지의 어깨는 거북이가 와서 형님이라 부를 거 같다.


지나가면서 아버지의 어깨와 목을 쭉 펴주는 것은 나의 습관이자 잔소리 루틴이다.


그리고 집안 내력답게 귀가 빠르게 노쇠하고 있다. 재작년쯤인가 아버지의 손을 끌고 가서 보청기를 맞추었다. 청력은 좋아지지 않으니 관리 좀 하자는 차원이었다. 필요시에만 한두 번 끼시더니 어느샌가 그 비싼 보청기를 박아두고 안 쓰시더라.


그러는 아버지의 귀는 늙어서 이제 얼굴을 마주 하지 않고 멀리서 부르거나 대답하면 잘 듣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삿짐에서 찾아낸 보청기는 언제 고장 났는지도 모르겠는데 한쪽이 고장 나 있었다. 화가 났다. 서글펐다. 나이도 그렇게 많지 않으면서 왜 중늙은이 코스프레를 하는지 모르겠다. 잔소리를 하면 듣기 싫은지 알아서 할 테니 잔소리 말라고 역정을 낸다.


아빠도 젊을 적에 할아버지가 보청기 맞춰달라고만 하고 안 쓴다고 욕했었잖아. 근데 왜 내 맘을 몰라

아버지 보청기를 맞추었을 때 내가 착용을 해보았다. 감기로 코가 잔뜩 막혔을 때처럼 귀에 내 목소리가 웅웅 울리고 불편하다. 그래서 이해는 하지만 불편함을 감수하고 훈련을 좀 해주었으면 하는 게 또 자식 마음 아니겠나.


지나가다 인터넷에서 본 뇌과학자가 말했다.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을 타인이 아닌 '나'로 인식하게 되고 그 타인이 내 맘대로 되지 않고 나를 못 알아줄 때 화가 나고 섭섭하다고.

진짜 나였거나 내 자식이면 다그치고 회초리라도 들었지.


말 안 듣는 부모는 참 힘들고 어렵다.


윽박이 안 통하면 달래야 하는 거 아니겠나.

아버지의 고장 난 보청기를 들고 티비를 보는 그의 옆에 가서 조용히 앉았다.

"내가 할 수 있을진 모르겠는데.. 나 새 결혼하고 애도 낳고 싶어. 아빠가 내 자식 목소리도 듣고 그렀으면 좋겠어. 내가 이거 수리 보낼 테니까 수리 다 되면 다시 같이 가서 검사하고 오자 응? "


담백하게 말하고 싶었는데 이상하게 눈물이 차오르더라 그리고 아버지는 묵묵부답이었다.


"안 들리는 거야? 아님 내가 못할 거 같아서 그런 거야? 응?"


그제야 "들었다."라고 대답하시더라.


거울 속에 나이 들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을 관찰하는 것은 꽤나 서글픈 일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빠르게 늙고 있는 부모님의 모습을 보는 것은 더 괴롭다. 난 아직 어른이 되지 못했는데 아직도 나이 든 두 어깨에 기대고만 싶은 이 마음이 바보 같고 뻔뻔하다.


이 가을, 해당 글을 쓰며 문득 나는 부모님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부모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 행복을 증명해서 부모님을 안심시켜 드리고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


아버지의 노화 감속을 위한 노력은 계속될 것이다.

그러니까 제발 늙지 마시오, 이것은 경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