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산기 산모의 장기입원의 기록
아기야, 뱃속에서 버텨줘. 엄마도 버틸게.
아직 뱃속에서 더 여물어야 할 둘째가 금방 세상에 나올까봐 두려웠다. 점점 더 악화되는 상황 속에서 긍정적인 생각을 하기가 어려웠다. 평생 무교로 살았으나 종교에라도 의지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잦은 출혈, 짧은 경부길이, 자궁경부벌어짐, 자궁수축까지. 총체적 난국이었다. 세 번째 입원하는 순간부터 둘째를 낳을 때까지 퇴원하지 못할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이제 퇴원해서 집에 가는 것도 두려웠다. 입원해 있으면 매일 검진 받으며 상태를 꾸준히 관찰할 수 있고 의료진이 옆에서 케어해주니 마음이 놓이는 면도 있었다.
온 가족이 함께하는 버티기
다시 정신을 차려야했다. 장기입원을 한다고 가정하고 현재 상황에 대처해야 했다. 엄마의 부재로 별이의 양육에 큰 변화가 있었다. 시부모님과 남편의 역할이 매우 커졌다. 18개월이었던 별이는 9시~12시 집 앞 가정어린이집에 다니고 있었다. 남편은 출근이 빠르므로, 별이의 등원은 시부모님이 담당했다. 12시부터 저녁 7시30분까지는 베이비시터 L이모님이 별이를 돌보았다. 퇴근 후부터는 남편이 별이를 전적으로 돌보았으며, 야근이나 회식이 있어 늦는 날에는 시부모님이 별이를 돌보았다. (이로 인해 별이는 아빠와 아주 각별한 사이가 되는데, 이에 대해서는 차후에 좀 더 상세하게 쓰도록 하겠다.) 다음으로, 병실에서 누워만 있어야 하는 나를 돌보아줄 사람이 필요했다. 친정엄마는 사업을 하고 있어서 병원에 매일 오갈 수는 없는 상황이었고, 아빠가 나의 케어를 담당하게 되었다. 아빠는 하염없이 누워있는 나의 손발이 되었다.
그렇게 누워서 버텼다. 하루 두 번씩 오시는 교수님도 회진 때 말씀하셨다. "오늘도 잘 버티세요." 그렇다. 이게 바로 진정한 존버인것이다. 그러나 나 혼자 하는 존버가 아니었다. 별이, 남편, 시댁, 친정 모두 존버했다. 그렇게 한 주 한 주 보냈다. 임신 주차가 늘어날수록 조산하지 않고 한주 한주 뱃속에서 둘째를 키워내고 있다는 생각에 뿌듯했다. 30주가 된날, 앞에 3을 달았다는 사실이 어찌나 기쁘던지. 만삭은 멀었지만 '이렇게 버티면 나 조산하지 않을수도 있겠다.' 싶었다.
드디어 퇴원
임신 주수가 채워져갈수록 희망은 생겼으나, 별이를 보고 싶은 굴뚝 같은 마음은 여전했다. 별이는 잘 지내고 있다고 하는데, "엄마 어디갔어?" 라고 물으면 손가락으로 현관문을 가리킨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눈물이 흘렀다. '혹시나 내가 별이를 버리고 나가버렸다고 생각하진 않을까...' 억장이 무너졌다. 남편한테 말했다. "별이한테 꼭 말해줘. 엄마가 지금 아파서 병원에 있는데 반드시 돌아갈거라고 꼭 전해줘."
그렇게 나는 둘째 임신 36주까지 병원에서 버텼다. 25주에 첫 입원하여 36주까지 있었으니 3개월 가까이 되는 기간 동안 존버한 것이다. 36주에 이제는 낳아도 태아의 건강에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의료진의 판단에 퇴원했다. 퇴원해서 집으로 향하는 자동차 안에서 영겁과 같던 입원생활이 스쳐지나갔다. 동시에 3개월 만에 별이와 마주할 생각에 설렜다. 집 현관문을 열었다. 아빠와 함께 있던 별이가 나를 보고 오열했다. 좋아서 우는 울음이 아닌 두려워서 무서워서 우는 울음. 엄마에게서 뒷걸음치며 자지러지듯 우는 아이 앞에서 가슴이 미어졌다. 엄마의 장기입원으로 인해 애착대상이 한순간에 눈 앞에서 사라졌으니, 본능적으로 얼마나 두려웠을까. 그렇게 나의 첫째 별이는 나의 아픈손가락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