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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뚜벅이는 윤슬 Apr 29. 2021

서울 한복판 호텔에서 한 달 살기

반강제로 호텔에서 한달살기,일주차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20년도 넘게 살아온 집을 리모델링하게 되었다. 확장만 안 했지만 모든 것을 뜯어고치는 대공사를 부모님이 결심한 덕분에 이루어진 거대한 프로젝트다. 살고 있는 집이기에 리모델링을 결심하는 과정도 몇 년이 걸렸지만, 실제 리모델링에 필요한 절차를 밟는 것에 비하면 숨 쉬는 정도의 난이도다. 집에 이십 년 넘게 누적되어 왔던 온갖 가구와 짐을 직접 나르고 해체해서 버렸고 벽지와 바닥, 가구 등 골라야 하는 건 왜 이렇게 많은지. 우리 가족은 두 번 다시는 리모델링을 하지 않기로 공사가 들어가기도 전에 이미 합의를 봤다.

그 합의를 이끌어낸 것 중 하나는 공사기간 동안 살 집을 구하는 것도 포함이었다. 생각보다 한 달만 받아주는 오피스텔이나 원룸은 드물었다. 심지어 셰어하우스조차도 최소 세 달부터 가능하더라. 한 달만 렌트하는 것이 가능하더라도 보증금이 말도 안 되는 곳도 많다(보증금은 돌려받지만 이래저래 깎고 돌려줄 것이 분명하다. 아니 한 달인데 보증금을 왜 받지?). 에어비엔비는 생각보다 비싸고 호텔은 말도 못 하고. 몇 주를 알아봤지만 가족들의 출퇴근 거리를 모두 고려한 살만한 집을 구하는 건 불가해 당분간 각자 흩어지기로 결정했고 그렇게 동생과 둘이 서울 한복판에 있는 게스트하우스 개인실에서 한 달 살기를 하게 됐다. 호텔에서 한 달 살기가 유행이라던데 이걸 해 보게 될 줄이야? 그렇게 제주도에서 한 달 살기 이후 '해 봐야 해외에서 한번 해보겠지'했던 한 달 살기를 또 한국에서 시작했다.


처음에 구했던 에어비엔비가 가격에 너무 집중하다 보니 객실 컨디션이 최악이었다. 고시원 정도로 공간에 이층 침대가 있고 캐리어를 펼칠 수 없는 정도의 좁은 객실이었다. 맨발로 다니기 찝찝한 낡은 화장실 바닥과 시멘트 객실 바닥도 이마를 짚게 했다. 혹시 몰라 일주일만 우선 결제한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처음에 입실했을 때는 '일주일만 버티면 되는데 뭐'했다. 그런데 낡은 화장실에서 샤워하는데 갈라진 타일들을 밟고 있는 동안 생각이 달라졌다. 최근 시즌2 방영을 마친 펜트하우스에 등장하는 한 인물의 명대사가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가난한 게 세상에서 제일 싫어!'

워낙 배낭여행자 스타일이라 어딜 가든 숙소는 가려본 적이 없다. 애초에 잠만 자는 곳이 숙소라고 생각하는 곳이고 호캉스도 스스로 돈을 지불하고 가 본 적이 없을 만큼 큰 관심을 두는 존재가 아니었다.

난생처음이었다. 내가 숙소를 가리는 날이 올 줄이야. 그것도 한국에서. 이때 깨달았다. 나는 적어도 깔끔한 숙소를 가야 한다는 것을. 결국 하루 만에 환불을 요청하고 남들은 출근하는 평일 이른 오전에 무거운 캐리어를 달달 거리며 지금의 숙소로 옮겼다(꼭 영화 기생충 속 기우네 가족 같았다).

지금 숙소는 반대로 가격을 이마를 짚게 하지만 객실 컨디션은 이보다 좋을 수가 없다. 넓은 침대와 호텔식 침구류, 높은 빌딩 숲이 창밖을 가득 채우는 시티뷰, 깔끔한 화장실까지. 여기에 토스트와 슬라이스 햄, 치즈, 잼과 초코시럽 등 특별하지는 않아도 직장인에게는 큰 힘이 되는 조식까지 주니 완벽 그 자체다.


우당탕 와당탕 잡음이 많은 시간이 나흘 정도 지났다. 사실 겉으로 보면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아침에 일어나서 출근 준비를 하고 퇴근길에 저녁을 사 먹고 집(숙소)에 들어가는 과정은 한 달 살기 전과 동일하다. 그런데도 기분은 매일 기묘하다. 한 시간 반짜리 출퇴근길이 도보거리가 된 것도 신기하고 출퇴근 거리가 서울 한복판이라 거대한 빌딩이 우후죽순 대나무 숲처럼 뻗어있는 것도 적응이 안 된다. 퇴근길이 이렇게 북적북적한 적이 사회생활 이후에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숙소를 나오면 펼쳐지는 유명 쇼핑 브랜드와 인기 맛집도 자꾸만 출퇴근길에 눈여겨보게 된다. 오늘도 출근길에 본 한 카페에 꽂혀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무슨 카페인지 검색했다. 그렇게 숙소를 기준으로 맛집 지도를 만들어간다.

출근길에 회사를 향해 걸어가면서 알게 된 직장인들의 문화(?)도 있다. 어떤 가게가 있나-보는데 생각보다 많은 직장인들이 아침을 식당에서 해결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편의점도 직장인들의 성지 같은 편의점이 있다. 궁금해서 들어가 보니 컵과일, 고구마, 도시락 등 잠시 짧은 시간을 내어 먹기 좋은 온갖 신선식품들이 진열대를 채우고 있었다. 편의점 한쪽에는 누가 봐도 출근 중인 사람들이 흡입하듯이 식사를 하고 계셨다. 대중교통을 타고 출근했을 때는 못 본 풍경이다. 일본처럼 한국 직장인들도 출근길에 아침식사를 많이 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회사에 가는 십여 분동 안 지나는 식당마다 아침식사를 하는 직장인들로 가게가 활기찼다. 나도 조만간 출근길에 아침식사를 해 봐야지-소소한 계획도 세웠다.

또 하나의 좋은 점은 온갖 맛집과 유명 패션 브랜드, SNS에서 인기를 끄는 카페들이 모두 생활권에 들어오니 아직 다 가보지 못했어도 벌써부터 편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래서 ~세 권이라는 용어가 생겼나 보다. 가게들을 보기만 해도 든든하다. 언제든지 먹을 수 있고 언제든지 쉽게 갈 수 있다는 점이 마음에 쏙 든다. 생활권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는 계기를 경험하고 있다.


네 살부터는 한 지역에서 초중고를 나오고 계란 한 판을 다 채워가는 시점까지 살아온 터라 다른 지역에서 살아보는 것은 처음이다(살고 있는 동네는 특히 다들 이사를 안 가기로 유명하다. 초등학생 친구들이 아직도 다들 그대로 살고 있어 동네를 돌아다니면 익숙한 얼굴을 쉽게 본다. 우스갯소리로 이 동네 클럽을 가면 동창회일 거라고 말하곤 한다). 출퇴근 거리가 본가에서 다니기에 무리일 정도로 멀어본 적이 없어서 자취를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나가면 돈과의 싸움이라는 것도 이미 잘 알고 있어 나갈 이유가 딱히 없다. 그런 와중에 겪는 반강제 한 달 살기는 소중할 지경이다. 언제 또 이렇게 서울 한복판에서 출퇴근을 하며 없는 게 없는 곳에서 살아볼까. 부지런히 한 달 조금 안 되는 시간을 누려볼 생각이다. 하나의 여행으로 기억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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