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고 굵은 등산길만큼 짧고 굵은 지미봉 여행기
지미봉의 존재는 종달리에 처음 숙소를 잡았던 2017년에 처음 알게 됐다. 어떤 여행지보다 제주도 마을들을 구경하는 것에 푹 빠져있을 때 종달리라는 마을에 들어서게 되었는데 알록달록 지붕 색깔과 잔잔한 당근밭, 해안 도로, 귀여운 외관의 초등학교까지 모든 풍경이 마음에 오래 남았다. 그 풍경들 중에 지미봉도 포함된다. 오름 중에서는 키가 작아도 더 낮은 존재들로 이루어진 종달리라 마을 어디에 서 있든 지미봉이 무조건 보이는데 그 모양이 책 어린 왕자에 나오는 보아뱀을 닮아 상상력을 자극할 때도 있다. 실제로 가만히 있는 지미봉을 보며 "모자 같기도 하네" "은근히 귀엽단 말이지" 밖으로 중얼거린 날도 있다.
코로나가 시작된 이후로는 처음 지미봉에 올랐다. 해외여행을 떠나던 사람들이 제주도로 눈길을 돌렸다길래 그 사이에 지미봉 인기가 급상승했을 거라 생각했는데 웬걸? 아침이라 그런지 모르겠지만 누가 봐도 도민이었던 아저씨를 빼면 딱 한 팀의 관광객밖에 없었다.
'아직도 이 엄청난 뷰를 가진 지미봉은 숨은 보석 역할을 하고 있는 건가?' 의아해하며 배낭을 고쳐 매고 올랐다.
이미 오른 경험이 있는 만큼 오르기 전에도 '분명히 힘들어할 거다' 예상했지만 역시. 한결같이 짧고 굵다. 오르는 시간은 빠르면 십 오분, 대체로 이십 분이면 정상에 도착할 만큼 짧지만 그렇다고 우습게 보면 올라가다가 눈살이 찌푸려질 수 있다. 계속되는 오르막길에 바람 한번 불면 날아갈 것 같은 얄팍한 체력이 한심해진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2017년에는 함께 오르다가 중도 포기한 분을 봤고, 카카오맵에 지미봉을 검색하면 뜨는 리뷰에도 같은 고통이 쌓이고 있다. 이처럼 누구나 힘들어서 헥헥대는 딱 그 지점에서 5~8분을 더 오르면 지미봉 정상에 도착한다.
제주도에서 중산간 해안가 가리지 않고 여러 오름을 올랐지만, 개인적으로 지미봉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삼십 분 이내의 시간으로 이렇게 다양한 요소를 담은 풍경을 볼 수 있는 곳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옹기종기 모여있는 지붕들과 테트리스처럼 빈 틈 없이 채운 밭, 윤슬 가득 머금은 눈부신 바다, 성산일출봉과 우도, 이름 모를 여러 오름들까지. 과장 한 스푼 얹으면 제주도를 이루는 모든 존재들을 볼 수 있는 곳이 지미봉이다. 주요 관광지보다 제주도 도민들의 삶과 일상이 녹아져 있는 자연을 좋아하는 나에게 특히 잘 맞는 전망을 간직한 곳이다.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이번에 지미봉을 오르고 나서 문득 제일 처음 지미봉에 올랐을 때의 사진이 궁금해졌다. 그 생각을 잊지 않고 육지로 돌아와 외장하드를 열었고 2017년 지미봉 사진을 몇 년 만에 다시 클릭했다. 2017년 10월에 오른 지미봉은 가을이 짙어지기 시작하는 시작점에 있다. 햇살의 색감이 익어가는 벼만큼 노란 때에 지미봉을 찾았다. 심지어 머리도 노랗다. 이후로 염색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아 더 까마득한 과거로 느껴지는 때다. 그때 신던 신발과 옷이 없는 것도 깊은 과거임을 알려주지만, 무엇보다 25살이었다는 점이 어린이처럼 느껴질 정도다.
25살은 카카오 브런치를 시작하기 전인 것은 물론, 생애 첫 직장을 막 퇴사하고 제주도 한 달 살기라는 버킷리스트를 이룬 지 삼 개월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다.
날씨가 주인공인지
저 멀리 그러나 선명하게 보이는 섬들이 주인공인지
또 한 번 제주에서 끈기를 보여준 내가 주인공인 건지
아무리 힘든 코스라지만 고작 20여분이면 오르는 오름을 정복했을 뿐인데 그 순간조차 스스로를 대견하게 생각하는 25살의 나는 긍정의 끝판왕이었다. 불과 반년 전까지 직장 내 괴롭힘과 철야와 새벽까지의 야근을 감당했어도 작은 성공에도 격하게 스스로를 칭찬했던 것을 보면 자존감 하나는 끄떡없었다. 오직 '여행'과 '경험' 두 개의 단어에만 집중했고 여행자로서 경험주의자로서 원하는 모습을 갖춰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스스로가 만족스러웠던 때다.
신기하게도 며칠 전 다녀온 지미봉에서도 나는 스스로에게 대견함을 느꼈다. 2017년 기억을 꺼내기 전인데 말이다. 마스크를 쓰고 오르느라 더 숨 가빴던 과정 끝에 기어코 직접 지미봉 정상 풍경을 보면서 한다면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고 다짐이 절로 나왔다. 특히 자꾸만 단점에 시선을 돌리는 요즘의 나로부터 벗어나자고 생각했다. 무형의 것들을 좋아했는데 5년 사이에 나는 부쩍 외모나 패션 돈 등 유형의 것들을 쫒으며 부족한 현재의 나에게 화를 많이 내고 있기 때문이다.
지미봉 위에서는 그 생각들이 일절 떠오르지 않았다. 5년 전의 나처럼 모험심 가득한 여행자로서의 내 모습이 만족스러웠다. 어떤 걱정 없이 평온한 상태로 사방을 둘러봤을 뿐이다.
이쯤 되면 지미봉 자체가 용기를 주는 존재라고 봐야 할 것 같다. 20여 분간의 고통이 자존감을 심어주는 과정인 걸까?
제주도를 갈 때마다 오르는 지미봉이기에 앞으로도 수없이 지미봉 정상에 서 있을 거다. 그 위에서 나는 또 어떤 다짐을 하게 될까? 다음 등산길에는 언제나 변함없이 종달리 마을에 든든한 리더 역할을 하고 있는 지미봉만큼 단단한 사람이 되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