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뚜벅이는 윤슬 Feb 19. 2022

목적지보다 '가는 길'이 좋아서 걷습니다

제주도의 진짜는 '가는 길'에 있다

제주도에서는 다른 어떤 여행지에서보다 많이 걷는다. 하루에 2만 보는 꾸준히 달성한다. 보통 한라산이 왕복 7~8만보 정도 되는 것에 비교하면 이번 6박 7일간의 제주도 여행 동안 한라산을 거진 두 번쯤 다녀온 셈이다. 지도 앱에서 목적지를 도보 검색했을 때 한시간 미만이다? 하루 일정이 시간을 맞춰서 움직여야 하는 상황이 아닌 이상 걷기 시작한다. 항상 세 가지 이상의 색이 보이는 바다 옆을, 때로는 알록달록 지붕의 키 작은 집들 사이를, 중산간 지역에서는 차도의 갓길을 걷는다(인도가 대부분 없다).

걷는 것에 대쪽 같은 자부심은 아니더라도 166.7cm인 내 키 정도 으쓱함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최근에 나는 곧잘 혼자 걷기 시작한 나이 때부터 안기는 것보다 걷는 것을 좋아했다고 들었다. 그런 아기는 점차 등산을 가면 제일 앞서 저만치 가는 학창 시절을 보냈고 이십대가 되자 혼자 지구 방방곡곡을 걸어 다니는 뚜벅이 여행자의 삶을 택했다. 당연히 '제주도에서도 걷는 것을 좋아서 그런가 보지 뭐' 가볍게 생각할 법도 하다.


그런데, 제주도에서는 어쩐지 지도 앱에 목적지로 입력하는 여행지보다 가는 길에 대한 기대를 더 크게 갖는다는 것을 최근 여행을 통해 확신했다. 여행하면서 매일 기록했다. 오늘 뭐가 좋았고 어느 순간이 기억에 남는다는 수첩 한 페이지를 넘지 않는 짧은 메모 같은 일기였는데 매일 그 안에는 목적지보다 가는 길에 있는 풍경이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피시 앤 칩스를 먹으러 가는 올레길의 어느 지점에서 본 바다 위 아저씨 두 분, 해변 모래사장 위에서 가만히 바다를 바라보던 사람들, 지미봉 정상을 150m 앞두고 있는 벤치에서 바라본 종달리 앞바다, 정물오름에서 금오름으로 가는 길에 본 목장 위 말들. 목적지보다 '~가는 길'이라는 과정에 큰 의미를 두었다.


해안도로는 그저 바다가 있는 도로 같지만 대략 삼사십걸음마다 바다를 다른 각도에서 보게 되면서 새로운 바다가 된다. 바다 위에 둥둥 떠 있는 빛 조각이 보이기도 하고, 뭐가 그리 즐거운지 날았다가 떠 있다가를 반복하는 푸드덕 갈매기들의 일상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렇게 걷다가 일몰을 만나면 낮에는 안 보이던 색이 머리 위에 번진다. 핑크색 주황색 황금색 때에 따라 색을 골라 하늘을 물들이고는 마지막에는 검은색에 가까운 남색으로 덮어 버리며 하늘의 미술 시간은 끝이 난다. 실제로 바다 사진을 잔뜩 찍은 여행이 끝나고 결과물을 볼 때면 같은 바다에서 찍어 놓고 다른 위치의 바다로 착각할 때가 종종 있다. 바다는 옆을 삼십 분 정도만 걸어도 열몇 곳의 여행지를 다녀온 것 같은 기분을 들게 한다.


마을은 지금의 제주도를 만들어낸 많은 요소 중 가장 애정을 갖고 있는 존재다. 정확히 말하면 마을 속 밭과 집을 아낀다. 마을에 시선을 두기 시작한 것은 한 달 살기 때부터다. 일주일 이하의 여행 때에 비하면 마음에 느긋함이 상시 있어 더 많이 걸어 다녔는데 한 달 살기 첫 숙소가 있었던 월정리의 잔잔한 모습들에 자연스레(그 당시에는 월정리가 그리 북적이지 않았다) 호기심이 들어 숙소에 머무는 동안 매일같이 마을 골목골목을 걸었다. 그게 아랫마을 그 아랫마을 다음 숙소가 있던 마을.... 이런 식으로 번져 "제주도 마을을 좋아해요!"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가 됐다. 제주도의 마을들을 통해 건물의 키와 색깔이 사람들의 생활에 얼마나 중요한 영향을 주는지 알게 됐다. 키 낮은 집들을 보면 심리적으로 '여긴 괜찮아' 안심하게 된다. 잘 살아내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감과 눈치 봐야 할 것 같은 북적이는 도보 위의 풍경을 벗어나 그저 제주도의 자연과 어울리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건물로 만든 것만 같다.


면허가 없는 사람치고 중산간 지역을 많이 다녔다. 사실상 뚜벅이는 갈 수 없다고 봐야 하는 오름이나 여행지도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그나마 가까운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걸었다. 중산간 지역에도 분명 사람이 사는데 이상하게 몇 년을 걸어 다녀도 인도가 거의 없다. 그러다 보니 차도의 갓길을 걷는 경우가 다반사인데 처음에는(물론 지금도 가끔) 쌩쌩 달리는 차들에 겁이 났지만 지금은 나름 노하우가 생겨 잘 다니고 있다. 이어폰은 절대 꽂지 않고 가급적이면 차가 내가 걷는 방향의 반대편에서 오는 위치에서 걷는다. 그렇게 걷다 보면 생각지 못한 풍경을 수없이 발견한다. 윈도우 기본 바탕화면 속에서 말과 소가 느릿느릿 움직이는 장면에 걸음을 멈추고 흔히 볼 수 없는 풍경을 최대한 눈에 깊이 담으려 노력하고, 차도에 대뜸 예쁜 건물이 나와 "여기가 뭐지?" 하며 지도 앱에 현 위치 검색을 하기도 한다. 언제부턴가 중산간 지역을 가게 되면 '발견'을 기대하기 시작한다.

*나중에 알았는데 중산간 지역의 도민분들도 그렇게 걸어 다니시더라. 하루빨리 인도가 해안도로만큼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


제주도의 진가를 알고 싶은 여행자가 있다면 조금 무리하게 걸으라고 권하고 싶다. 버스로는 택시로는 렌트카로는 일초만에 지나치는 진짜 제주도를 발견하게 될 테니. 해가 지고 숙소로 돌아왔을 때 웅-하고 우는 것 같은 발이 뿌듯하다.



*아래 사진들은 이번 여행 중 '가는 길'에 찍은 사진들이다. 이번에 찍은 몇 천장의 사진 중 가장 아끼는 사진이 여기에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