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 때부터 십 년 넘게 인연을 이어 온 친구들과 메신저로 대화를 나누다가 십 대 때 기억을 꺼냈다.
[그때는 덕질이 전부였는데 아련하다 진짜. 그렇게 온 마음으로 뭔가에 빠지고 싶다. 그 정도로 빠지는 게 이제는 없는 것 같아]
[십 대는 열정이지]
[진짜 어떻게 그렇게 몰입했는지ㅋㅋ 지금도 덕질하지만 그때만큼은 절대 못해]
나의 십 대는 아이돌만으로 가득 채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장 몇 스푼 보태면 사생팬 빼고는 팬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 아직도 기억난다. 엄마가 앨범 못 사게 한다고 멤버가 아프다고 앨범 끌어안고 펑펑 오열한 날들을. 처음 콘서트장에서 그들을 본 날 울면서 응원법을 외쳤던 날을. 그들은 감수성 풍부한 한 고등학생을 울고 웃게 만드는 존재였다. 교복을 입던 시절의 나는 아이돌을 빼면 시체였다.
지금도 여전히 아이돌에 진심이고 팬을 자처하고 있지만 십 대 때보다 그 깊이가 많이 얕아졌다. 더 이상 좋아하는 멤버가 아프다고 울지 않고(심지어 현생에 바빠 깜빡하기도 한다) 앨범은 딱 한 번만 샀다. 음원이면 충분히 만족스럽다. 콘서트 티켓팅에 실패해도 좌절하지 않는다. 나중에 유튜브로 보지 뭐.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딱 거기까지다.
덕분에 감정이 롤러코스터를 타지 않아 감정적으로 힘들 때가 많이 줄었지만, 요즘은 그 힘든 마음이 그립다. 뭔가에 푹 빠지다 못해 미쳐보고 싶어졌다.
깊은 흥미에 대한 갈증은 일상에 대한 피로감이 높아지면서 여드름처럼 툭- 튀어나왔다.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회사 일과 돈 관리, 끝이 정해져 있지 않아 막연한 N잡, 이루고 싶지만 거리감이 아득한 목표들이 주는 조급함, 읽어야 할 책, 그 밖의 자잘한 할 일들을 버텨내고 감당하는 하루하루가 피곤하다. 목표지향적인 삶은 분명 뜻깊고 보람차지만, 그 과정이 길고 마침표가 명확하게 보이지 않으면 숨이 차다. 대체 언제까지 올라가야 하는 거야. 빨리 탁 트인 뷰를 경험하고 싶다.
문제는 등산 모임 활동도 하고 요리도 해보고 책도 다양하게 읽어 보고 전시도 다니고 뮤지컬도 자주 봤지만 아직까지 미쳐볼 만한 흥미는 찾지 못했다(여행이 있기는 하지만 그건 날을 잡아야 하고 돈도 비교적 크게 들다 보니 미치고 싶어도 일부러 최소한의 거리를 두려 애쓰고 있으니 제외다).
그때 도대체 어떻게 미쳤던 걸까?
이 잡듯이 흥미를 찾는 과정에서 과거의 나를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다.
몇 달간 홈트레이닝에 미쳐 십 키로 넘게 뺐던 나.
하루에 대외활동을 두 세탕씩 뛰며 경험을 쌓던 나.
어느 것도 무슨 바람이 불어 그랬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다시 그때의 마음을 재생하고 싶어도 테이프를 찾지 못해 플레이 버튼을 누르지 못한다. 뭐든지 다 때가 있다는 어른들의 말이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었을까.
확신 없는 궁예가 되어 보자면, 현실을 챙겨야 한다는 부담감이 맹목적인 취미를 가로막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미래에 대한 욕심이 명확한 편이다. 직업 자산 소양 등 나를 만들어내는 모든 것에 목표가 있다 보니 어느 것 하나에 빠지기가 쉽지 않은 것 같다. 챙겨야 할 것이 많고 손을 놓고 있으면 불안함을 엄습해온다. 천성이 막 살 용기가 없다. 앞자리가 3이 된 직장인은 쉽게 어느 것에도 마음 놓고 미치지 못하고 있다.
얼마나 오래 살았다고 그새 일상에 찌든 어른이 되어 웬만한 것들에는 쉽게 빠지지 못하지만, 뭐라도 하나쯤은 그들이 쌀은 안 줘도 밥 먹을 힘을 주는 존재라고 생각했던 '그 시절'처럼 빠지다 못해 미치게 하지 않을까. 오늘도 그 바람을 안고 경험에 집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