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을 가보지 않아도 아는 익숙한 수식어들이자 머리로는 알지만 와닿지 않는 표현이기도 하다. 그런가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이 심드렁한 수식어가 다르게 느껴지는 날이 올 줄이야.
8박 9일은 뉴욕여행치고 짧은 기간이라 할 수 있는데도 단번에 깨달았을 정도로 뉴욕은 모든 것이 다양한 도시였다. 도시별 풍경부터 사람들의 행동이나 옷차림 음식과 여행지로 유명한 여러 장소들까지 모두 복사된 것이 없었다.
마치 타임스퀘어의 전광판같다. 숙소 위치 덕분에 매일 아침 저녁으로 봤는데도 언제나 처음같았던. 익숙함이라고는 없어 웬만해서는 한 두번 간 길은 해외일지라도 잘 기억해 구글맵없이도 다니는데 뉴욕에서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기까지 며칠이 걸렸다. 내가 가는 경로를 기억하기에는 주변에 시선을 두게 되는 새로움이 자주 등장했다. 정신차리고 다니기 힘든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뉴욕에서 눈으로 본 새로움을 크게 분류지어 보자면 다음과 같다.
패션
한국에서는 큰일날 정도로 벗다시피하거나 체형과 무관하게 내가 입고싶은 형형색색의 옷과 머리를 한 그야말로 '라이브한' 사람들이 가득한 거리는 여행 초반의 신기함에 불과했다.
꾸미는 쪽보다는 행동이 더 놀라웠으니까. 행동이 패셔너블하다 느낀 건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웃통을 벗고 공원을 뛰는 일이 흔해 센트럴파크에서는 상의 탈의를 하지 않으면 뛰지 못하는 건가 싶었고, 아무 잔디밭에 (심지어 정말 아무 잔디밭에) 털썩 앉는 모습, 지하철에서 대뜸 기타를 꺼내 띠리링하는 모습, 손님과 카페 직원이 만나자마자 "굿모닝!"을 시작으로 사람이 많네요-그러게요 오늘 바쁘네요- 일상적인 대화를 하는 풍경 등 한국에서는 꽤 접하기 어려운 광경들을 숱하게 목격한 시간이었다.
무엇보다 어떤 말을 표현하고 행동하는 과정에서 쑥스러워 하거나 남 눈치를 보지 않은 것 같았다. 그리고 실제로 눈치를 주는 사람도 없었다. 당당하고 모두가 개성을 인정하는 듯 했다.
미국에서 일하는 여러 유튜버들은 미국에서 일하려면 자신의 생각을 명확하게 잘 말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조언하고 있다. 한국에서 일하다 오면 가장 힘들어하는 것 중 하나가 커뮤니케이션 문화라고 한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말하지 않으면 오해를 사고 실력을 인정받기 힘들어져 인사에 반영된다는 거다. 혼자 공원가서 혼밥을 해도 괜찮은 문화이니 먼저 말을 해야 스스로 힘들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뉴욕을 여행하는내내 이런 환경이라면 그런 회사 생활을 할 만 하다고 생각했다.
소속감을 중요하게 여기고 혼자 벗어나는 것에 두려움이 있는 한국과는 거쳐 온 역사가 다른 만큼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고 어떤 문화든 장단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뉴욕에서만 해도 무단횡단이 너무나 당연한 문화는 다소 위험해보였다. 차들이 무단횡단하는 사람들에게 클락션 한번 울리지 않고 기다려주는 모습에 헛웃음이 날 정도다. 여기 신호등 왜 있는 거지?
그럼에도 분명한 건 사람들이 모두 '나'를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는 거다. 한국에서는 나를 셀프 칭찬하는 것이 겸손하지 못한 사람으로 비춰지기 쉬운데, 미국에서는 내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런 거다.
어차피 국내여행도 해외만큼 좋아하는데 굳이 해외여행을 챙기는 이유는 단 하나다. 시야가 넓어지는 기분이명확하게 든다.
'와 이런 자연도 있구나!'
'이렇게 넓은 나라도 있구나!'
뉴욕에서는 "와! 이렇게 사는 방법도 있구나!"를 배웠다. 내가 하고싶은대로 나를 만들고 그 과정에서 불안해 하거나 눈치보지 않는 삶. 내가 하고싶은 말을 분명하게 말하고 타인과 어울려 살되 나를 잃지 않는 삶. 머리로는 알면서도 한계를 느낄 때마다 안된다고 생각했는데, 안되는 건 없음을 눈과 귀로 배웠다.
틀에 갇혀있는 삶이 취향이 아닌 성향을 가진 사람으로서 정답을 찾은 듯 하다.
미술관
평소 전시를 좋아해 이번 여행에 미리 챙긴 메트로폴리탄 모마 휘트니 미술관.
메트로폴리탄 도슨트 시간에 가이드님이 메트로폴리탄과 모마 휘트니를 모두 가면 미술사의 큰 줄기를 쭉 훑는 것이라 했다. 그 만큼 미술에 제대로 심취한 여행이었다. 이집트부터 중기 현대까지 시대별로 다양한 작품을 대차게 보유하고 있는 뉴욕 미술관 여행은 시간여행을 하는 기분이었다.
이건희 전시에서 보고 감동한 모네의 [수련]의 또 다른 작품을 모마와 메트로폴리탄에서 마주한 순간.
반고흐의 [자화상]과 [별이 빛나는 밤에]의 과감한 붓터치.
이렇게 큰 그림인 줄 몰랐던 [댄스] 앞에 선 순간은 꽤 오래 잊지 못할 거다.
다양한 시대가 모인 만큼 표현 방식도 다양했다. 인상주의와 같은 단어를 쓰지만 그 차이를 눈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은데 뉴욕에서 그 경험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200만원짜리 비행기값은 충분히 했다고 본다.
음식
다국적 사람들이 생활하는 도시인 만큼 음식 종류가 어마어마하게 다양하다. 일식 양식 한식 멕시칸 음식 인도식 중식 등 국적으로 구분하는 것 외에도 할랄 푸드 채식 글루텐 프리 등 취향으로도 수 많은 음식들을 구분할 수 있다. 어느 음식점이든 꼭 다이어트 콜라(한국에서는 제로콜라라 하는 그것)가 있고, 비건 표기가 되어 있는 메뉴판이 흔하며 도심 블럭마다 꼭 있는 푸드 트럭에는 할랄 푸드가 다반사다. 충분히 '할랄가이즈'가 시작될만한 도시였다.
마트에서도 신기함은 계속 됐다. 뉴욕 도심에서 가장 흔한 마트인 '홀푸드 마켓'에서는 요거트 우유 종류가 엄청났다. 저지방 무지방 무당 등 다양한 성분의 유제품이 냉장고 한 켠에 빼곡했는데 특히 '오트 밀크'가 많은 게 눈에 띄었다. 한국은 이제 오트밀크가 스타벅스 음료 선택 사항에 추가됐는데 뉴욕은 이미 오트 밀크만으로도 한국 유제품 냉장 코너보다 훨씬 넓은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 이렇게 많이들 찾는다고? 호불호가 은근 강한 오트 밀크의 대중화를 이끌어낸 것이 신기했다.
치폴레와 타코벨 그리고 할랄 가이즈를 줄 서서 먹고 퇴근길에 한국식 포케를 포장해가고 그 와중에 피자 박스까지 챙기는 뉴욕 시민들의 풍경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기분을 선사해 주었다. 알 수 없지만 흥미로운 그래서 떠나기 싫은 곳이었다.
미국에 대해서는 뉴욕만 가면 굳이 다른 도시는 안 가도 괜찮을 것 같은 관심도를 갖고 있었다. 세계일주를 꿈꿨던 20대에도 여러 나라를 찜했지만 미국은 뉴욕 단 하나밖에 없을 정도이니.
좁았던 생각이 이번 뉴욕여행으로 완전히 바꼈다. 꼭 다른 도시도 가 봐야지. 뉴욕보다 자연의 분량을 많이 갖고 있다는 LA도 궁금하고 디즈니랜드에서 미키마우스도 만나고 싶다.
환율이 계속 올라 비용적인 부담이 큰 나라에 이렇게 빠져 큰일이다. 달러야 이제 그만 내려 와... 올려다 보다 목 꺾이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