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에 푹 빠지게 된 계기 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건 '발견'이다. 익숙하다고 생각한 곳에서 새로운 무언가를 찾아냈을 때의 기분이 마치 제3세계를 발견한듯한 판타지적인 기분이 든다. 애니메이션에서 주인공이 새로운 세상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 눈이 휘둥그레지는 표정으로 표현하는 그 기분을 국내를 여행하면서 간간히 경험한다.
특히 애니메이션 속 주인공들과 같은 기분을 느꼈던 국내 여행지들을 카메라가 있는 상태에서 만난 건 크나큰 행운이다. 그대로는 아니더라도 순간의 색감과 모양을 기록할 수 있으니(국내여행에 대한 호기심을 갖고 있는 분들께 이렇게 소개도 할 수 있고?).
그 순간들을 오랜만에 꺼내 한 자리에 모았다. 꼭 한번 다시 보고 싶은 인생 풍경들을 추억하며.
서울 화계사에서 본 일출
인생 풍경은 대부분 예상치 못한 순간에 예상치 못한 크기로 등장한다.
템플스테이에서 인생 최고의 일출을 보게 될 줄이야. 테마 특성상 당연히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니 일출이야 보려면 보겠지만 서울 도심에서 이렇게 선명한 일출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촘촘한 건물들 뒤로 뜨는 태양은 특별했다. 일출을 보면 당연히 산과 바다로 떠나는 경우가 많은데 도심으로 찾아가는 것도 괜찮구나 처음으로 일출 명소에 도심을 넣어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서울 강북구에 위치한 화계사에서 본 일출은 그 유명한 정동진에서 본 일출보다 더 선명하고 강렬한 기억이 됐다. 수줍게 빼꼼 고개만 보이다가 낯가림에 적응하며 슬슬 올라오는 태양에 표정이 있는 것 같았다. mbti는 일단 I로 시작하는 게 분명하다.
일출을 보고 난 뒤에 생각했지만 화계사의 위치가 일출을 보기 대단히 좋은 장소다. 북한산 둘레길을 바로 옆에 끼고 있고 전망대까지 있어 서울 도심을 360도로 광활하게 내다볼 수 있으니.
새벽 일찍 일어나 아침 공양을 먹고 바로 일출을 보러 가면 완벽한 아침 코스! 전망대까지 가는 길도 동네 뒷산 약수터 가는 것보다 힘들지 않은 짧은 코스라 등산에 흥미가 없어도 충분히 볼만한, 보기 쉬운 인생 풍경이다.
영주 부석사에서 본 일몰
한국에 돌이 떠 있는 사찰이 있다는 사실을 비교적 어릴 때부터 알았다.
부석사는 생활권에서 멀어도 그렇게 멀 수가 없지만 어릴 적부터 매년 추석이면 산소 갔다 들리는 사찰이라 전국에서 가장 익숙한 사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도 단 한 번밖에 보지 못한 인생 풍경이다. 바로 부석사에서의 황금 일몰. 정확히 말하면 황금색으로 사찰 전체를 물들이다가 보랏빛으로 끝나는 기승전결이 모두 하이라이트였던 일몰이었다. 해가 지는 게 아니라 동그란 해가 액체가 되어 부석사 일대에 흐르는 것 같았다. 마치 화산에서 용암이 와이악- 쏟아져 세상에 퍼지는 그런 황금빛 분출을 눈으로 보고 있는 듯했다.
부석사는 가을이면 은행나무를 비롯한 가을 풍경으로도 유명세가 더해지는데 그 계절감과도 잘 어울려 더 큰 감동을 받았다.
이날은 당일치기 버스투어로 부석사를 다녀온 조금 특별한 형태의 여행이었는데 특별함에 특별함이 제대로 더해진 완벽한 날이었다.
제주도 카페 마당에서 본 일몰
일몰을 꼭 떨어지는 해에 집중할 필요는 없다. 특히 제주도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제주도에서 일몰을 보고 싶을 때 오름을 찾아가지만, 사실 그보다 더 간단하게 제주도스러운 일몰을 볼 수 있다. 무려 카페 앞마당에서.
제주 한동리에 위치한 카페 <화수목> 앞에서 우연히 발견한 일몰은 산 뒤로 내려가는 해보다 해 주변으로 넓게 퍼진 빛의 색감에 주목하게 되는 풍경이었다. 제주도는 인위적인 빛이 많지 않은 곳이라 해만 떨어지면 마을 안은 급격하게 깜깜해지는데 그 직전 마지막 여운으로 남색과 분홍색 그리고 노란색 세 개의 띠가 무지개떡처럼 쌓여있는 모습이 제주도의 자연과 참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차분한 일몰이었다.
검게 드리워진 나뭇가지는 누군가 하늘에 새긴 그림 같은 타투였다.
제주도에 갈 때마다 일몰 시각에 여러 곳에 서 있었지만 제주도 일몰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곳이 카페 화수목 앞마당에서 본 일몰이다.
포항 케이프라운지 카페와 바다의 조화
여길 다시 가면 꼭 스케치할 무선 노트와 연필을 들고 갈 거다. 볼 때마다 연필로 직선 그리는 연습을 하고 싶어 지는 곳이다.
풀빌라와 카페를 함께 운영하고 있는 <케이프라운지>는 셔터를 누르는 곳마다 액자에 끼워 넣어 걸어야 할 것 같은 직선의 향연을 갖고 있는 곳이다. 날씨만 잘 따라주면 풍경 안에 담긴 수많은 선이 굉장히 깔끔하게 서로 만나고 맞물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건물의 색상이 온통 흰색이라 더욱더 모든 게 선으로 보인다.
카페 설계 단계부터 애초에 수평선과의 조화를 노린 것 같다. 카페 안에서 입구 방향으로 시선을 두면 수평선이 카페 사이에 담기는데 건물의 선과 수평선이 평행을 달린다. 덕분에 카페 안에서는 평행과 수직만이 존재한다.
케이프라운지는 처음 방문했을 때 단번에 반해 재방문을 한 곳인데 재방문 때 함께 한 엄마께서도 인상적이었는지 일 년쯤 지난 지금도 포항여행을 이야기하면 이 카페를 언급하신다.
제주 성산일출봉 정상 위에서 본 풍경
성산일출봉에 대해 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딱 이거다.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잃지 말자'
수학여행 혹은 신혼여행 등으로 제주도를 가본 사람 누구에게나 익숙한 존재라, 생각보다 정상을 여러 번 오른 사람이 없다. 보기보다 계단이 많아 힘들기도 하고 둘레길은 무료인데 입장료까지 받는다고 하니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날씨가 맑은 날을 만났다면 주저하지 말고 성산일출봉 정상으로 향하라고 권하고 싶다. 아래에서 보기에는 '오름이랑 비슷하겠지 뭐'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제주도에는 여러 색이 있고 오름 위에서 보이는 색과는 또 다른 색을 볼 수 있다. 성산일출봉 위에서는 고스란히 바닥을 볼 수 있는 분화구와 그 뒤로 펼쳐지는 진한 남색 얼룩이 있는 바다 그리고 건너편 우도의 모양까지 선명하게 볼 수 있다. 오름에서는 보기 어려운 모습들이다.
전망대에서 제주도 쪽으로 뒤를 돌아보면 동쪽 땅 모양도 한눈에 볼 수 있다. 제주도 동쪽의 테두리를 넓은 시야로 보고 싶다면 성산일출봉 정상에 오르는 게 정답이다.
발견한 인생 풍경의 공통점은 '예상 밖'이라는 점이다. 인생 풍경은 지극히 주관적이고 감동의 크기와 모양도 사람마다 제각각이겠지만 발견하겠다는 적극적인 발걸음이 뒷받침될 때 보여주는 것은 분명하다.
템플스테이를 신청해 새벽같이 일어나 구름 전망대를 가지 않았다면
굳이 집에서 멀어도 한참 먼 부석사를 당일치기로 다녀오지 않았다면
그 시간에 카페에서 나와 세심하게 주변을 보지 않았다면
바로 버스 타고 돌아가면 될 것을 마을 골목길을 고개 넘듯 25분간 걸어 찾아가지 않았다면
'오름이랑 비슷하겠지 뭐'하고 성산일출봉 정상에 오를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보지 못했을 풍경들이다.
뮤즈도 노력했을 때 택배처럼 띵동-찾아온다고 하지 않던가. 인생 풍경도 뮤즈와 다를 바가 없다.
걷고 걷는 자에게 짜잔-하고 찾아온다. 뚜벅이 여행을 사랑하는 이유다.
▼ 뚜벅이 여행자 윤슬이 운영하는 뚜벅이 여행자를 위한 국내외 여행 정보 뉴스레터 <뚜벅이는 레터> 무료 구독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