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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뚜벅이는 윤슬 Oct 30. 2023

가을의 경주는 선이 아름다운 도시다

'제일 좋아하는 국내 여행지가 어디예요?'

여행 크리에이터가 흔히 듣는 질문이다. 덕분에 꾸준히 '내가 제일 좋아하는 여행지가 어디지?' 자주 생각하는데 매년 빠지지 않는 지역이 경주다. 

남녀노소 누구나 한 번쯤 가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모두에게 익숙한 경주를 말하는 게 여행 크리에이터로서 머쓱할 때가 있지만 사실이다. 경주는 내가 매년 그리고 앞으로도 좋아할 지역이다. 


경주는 내 관심 분야를 기준으로 하나 여행 스타일을 기준으로 하나 좋아할 수밖에 없는 지역이다. 

어릴 적 100점은 못 받았지만 한국이 역사 이야기를 좋아한다. 여행 스타일도 새로운 걸 보고 듣느라 뽈뽈 돌아다니는 꽤나 바쁜 뚜벅이 여행자다. 

경주는 신화 · 역사적 사실 등 과거부터 전해져 오는 수많은 이야기가 글과 유물 그리고 능 곳곳에 가득하다. 박물관이 아니어도 여행 내내 문화재가 함께 한다. 심지어 카페에서도 능이 보이니 이 정도로 역사의 산물이 가득한 도시가 또 있을까.

현재 경주에서 가장 인기 있는 거리인 황리단길은 수많은 사람들의 아이디어가 채워져 있다. 갈 때마다 바뀐 가게들이 있는 걸 보면 참신한 컨셉과 구성으로 완벽에 가까워야만 오래 남을 수 있는 치열한 터인 것 같다. 그만큼 다른 지역에서 보기 힘든 형태와 특징을 갖춘 제품들이 가득하다. 영감의 장이다.


그러나 이번 경주여행에서 발견한 도시의 모습은 추가적으로 무언가 더 있었다. 그게 뭘까 생각하며 여행하다 끝자락에서야 알아차렸다. 


'경주는 선이 아름다운 도시구나.' 




이른 가을 아침, 둥근 곡선 위는 분주하다

일찍 눈이 떠져 오전 9시에 게스트하우스를 나왔다.

'숙소에서 뒹굴면 뭐 하나 대릉원 산책이라도 가자!’

적당히 시원한 공기가 감도는 가을 날씨는 아침 산책하기에 더없이 좋은 시간이었다. 숙소에서 도보 오분 거리에 있는 대릉원으로 카메라를 메고 걸었다. 멀리 날아온 도시가 익숙해져서 좋다고 생각하며.
하지만 언제나 여행에 익숙함이란 없다.

대릉원 입구에서부터 지지직- 깨끗하지 못한 소리가 들렸다. 여유로운 분위기 속 산책이라고 하기에는 어려울 만큼 꽤 큰 소리였다. 공사 중인가?

여전히 무료입장으로 문이 열려있어 일단 들어갔다. 그리고 한 스무 발 자국을 걸었을까. 애니메이션 <토이스토리>의 군인 장난감들을 실제로 만났다.

어린이들이 언덕 또는 산이라 말하곤 하는 거대하고 높은 능 위에서 용역업체 직원들이 잡초를 정리하고 있다. 불편한 소리는 키가 자란 잡초들을 잘라내는 소리였던 것이다.  

능이 높고 넓은 만큼 사람들이 작게 보이는데 분주한 장난감의 움직임을 보는 것 같았다.

톱이 잡초를 잘라내면서 나오는 연기들은 때때로 산을 오르는 구름이었다.

이 모든 장면 조각들이 그늘져 검은색으로 보일 때면 노고가 한 편의 작품이었다.

능의 곡선을 따라 시선이 능 위로 올라가면 어느새 정상에서 맡은 바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뿌연 구름을 만들어내며 과거에서 현재로 그리고 미래까지 지켜내는 사람들. 그분들을 만난 건 경주여행 전체를 통틀어서도 엄청난 행운이었다. 덕분에 지금의 역사를 지켜내는 사람들 중에 이런 방식으로 지키는 사람도 있다는 걸 배울 수 있었으니까.  

경주가 언제나 신비로운 모습을 유지하는 데에는 보기보다 많은 땀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며 능과 능 사이를 걸었다. 가장 낯설고 신비로웠던 아침 산책이었다.


가을이 되면 분홍빛 바다가 일렁인다

여행하면서 우연히 핑크뮬리 군락지를 발견했다. 알고 보니 유명한 핑크뮬리 군락지였는데 유명하지 않을 수가 없는 위치와 면적이었다. 첨성대 바로 뒤에 있고 핑크빛이 주변 어떤 식물보다 튀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만한 장소인데 운 좋게도 여행 일정을 시작하기에는 다소 이른 시간이었다. 

야호! 풍경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신나게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평소 핑크뮬리에 큰 관심은 없다. 여러 지역에서 핑크뮬리를 봤지만 SNS에서 본 것보다는 매번 그 색이 연했고 막상 보면 사람들이 들어가 사진 찍은 흔적이 두드러져 감동이 덜했다. 

핑크뮬리를 보고 '오- 예쁘다' 보고 또 본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절정 주간을 보내고 있는 시월 중순의 핑크뮬리는 이름 그대로 핑크색이었다. 후보정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진한 핑크뮬리. 진짜 핑크뮬리를 이제야 만났구나!

희뿌연 안개였던 핑크뮬리를 넓게 감상하면 바다가 됐다. 가을바람에 넘실대는 진분홍빛 바다의 모양을 보고 있으면 물결의 선과 다를 바가 없다.

특히 경주 첨성대를 배경으로 둔 핑크뮬리 풍경은 꼭 핑크빛 바다를 지키는 등대였다. 바다 중앙에서 굳건하게 모습을 지키는 첨성대의 호리병 같은 선은 든든하면서도 아름답다.  


화룡점정은 달

경주는 유독 해가 진 뒤에도 볼거리가 많은 지역이다. 동궁과 월지 · 첨성대 등 야경을 위한 조명이 들어오는 곳이 많아서 혼자 여행할 때도 황리단길 근처에 숙소를 잡고 저녁을 느긋하게 즐긴다.

이번 여행에서도 황리단길을 거쳐 첨성대까지 걸어가 야경을 보는 일정을 가졌는데 황리단길을 지나 첨성대 방향으로 횡단보도를 건너면서 풍경에 치이는 사고를 당했다.

일몰의 여운이 담긴 하늘과 능의 조합은 동화책의 어느 한 페이지다. 아름다운 결말이 함께 쓰여있는 어느 페이지. 

아니면 어느 소품샵에서 볼 법한 포스터의 그림이거나.

능의 높이가 뒤로 펼쳐지는 산의 능선과 동일한 높이여서 계획된 한 폭의 그림 같았는데 이토록 완벽한 풍경에 “우와” 감탄사를 내뱉게 한 건 다름 아닌 ‘초승달’이었다. 얇은 눈썹달이 능 위에 떠 있는데 '이 장면을 찍어 올리면 사람들이 합성이라 생각하지 않을까?' 내적 호들갑을 떨 정도로 비현실적인 모습이었다. 초승달의 곡선과 능의 곡선이 닮은 것은 이마를 짚게 하는 포인트. 이때 확신했던 것 같다. 

'경주는 유독 선에 집중하게 되는 도시구나'



걷는 길의 모양이

눈에 계속 따라오는 능들의 모양이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지는 첨성대의 모양이

경주의 지붕이 되고 있는 토함산의 모양이

그리고 과거부터 미래까지 쭉- 연장선을 달리는 지역의 매력이

여정을 만드는 발자국이

선(線) 그 자체인 경주를 발견했다. 

그리고 무뎌지지 않는 경주에 대한 애정을 또 한 번 얻었다. 

어디로 가면 어디가 나오는지 이제 여행자들이 갈만한 길들은 다 아는 지역임에도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한 순간과 풍경과 시간이 있다는 사실이 또 한 번의 경주 여행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약하게 한다. 



▼ 윤슬의 2박 3일 경주여행 브이로그는 아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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