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 포르투에서 미국 뉴욕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첫 장을 펼쳤고 마지막 장을 읽었다. 책을 읽은 이 타이밍은 신의 한 수에 가까웠다.
포르투에서 뉴욕을 가려면 경유가 필요하다. 이 책이 신의 한 수가 된 사건은 경유지에서 일어났다.
포르투에서 폰타델가다까지 비행기로 2시간 30분을 이동한 뒤에 3시간을 기다려 뉴욕행 비행기를 타는 거였는데 뉴욕행 비행기에 못 탄다는 거다.
"뉴욕 비자 있어?"
"한국인은 이스타비자만 있으면 돼서 이스타 비자만 있어"
"뉴욕에서 어디 가는데"
"캐나다 가려고. 항공권이랑 숙소는 예약했어."
"캐나다? 캐나다 비자는."
"뉴욕 가서 준비하려고"
"그러면 비행기 못 타는데. 캐나다에서는 어디 가는데. 왜 한국 안 가."
"세계여행 중이야. 캐나다에서는 볼리비아 갈 예정인데 정확하지는 않아"
"너 비행기 못 타. 지금 여기서 캐나다 비자 승인받고, 캐나다에서 다른 나라도 떠나는 항공권 사."
네? 30분 뒤 탑승 마감인데? 아니 그리고 세계여행자가 다음다음 항공편까지 어떻게 사는가. 다음 나라에서 언제 떠날지까지 정하면서 여행 다니는 것도 아니고. 구구절절 말하고 싶었지만 영어도 못 하고 당장 시간이 너무 촉박해서 입을 열수록 손해였다. 이 비행기 못 타면 어떡하지- 시나리오를 생각할 정신도 없이 바로 캐나다 비자 신청 방법을 검색해 따라 신청했다. 작은 휴대폰 화면으로 화면 왔다 갔다 신청 방법 보면서 신청서 작성하는 게 사람을 아주 속 터지게 했다. 안 보고 하려고 해도 질문도 많고 적어야 할 것도 많고 나는 뭔 소리인지 모르겠고. "제발 제발" 울기 직전의 표정으로 겨우 결제까지 완료했다.
이후에 항공권도 원래 예정이었던 볼리비아행을 검색했더니 대기시간 13시간 나오고 경유 2 회고 난리도 아닌 거다. 일분 정도 뒤적이다가 이러다가 비행기 못 타겠다 싶어서 그다음 예정 여행지였던 영국 런던행으로 다시 검색했다. 캐나다에서 언제 떠날지는 정말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대충 날짜를 러프하게 2주 잡고 예약했다(이후에 항공권은 변경했다. 취소 수수료는 당일이라 0원). 무슨 정신으로 항공권까지 산지 모르겠다.
이후에 직원 하나 통과했더니 또 다른 직원이 이스타 비자 번호 보여달라 혼자 가냐 왜 한국으로 안 돌아가냐 질문으로 또 한 번 붙잡고 있는 정신을 무너뜨리려고 시도하더라. 그래놓고 한다는 소리가
"너 비행기 놓칠 뻔했어. 다음부터는 잘 준비해서 다녀"
.... 세계여행 중에 인종차별적인 말보다 더 싫은 말을 만났다.
스트레스가 짧고 굵었는지 세계여행 출발 이후 처음으로 그냥 한국 갈까 생각했다.
'뉴욕까지만 여행하고 한국 가면 정말 편하지 않을까. 무조건 편하겠지. 그냥 툴툴거리면서 출퇴근하는 게 이것보다 더 나은 것 같아. 익숙한 가족도 보고 집-회사나 왔다 갔다 하고 내 침대에서 자고 얼마나 좋아.'
괜히 세계여행은 가겠다고 집을 나와가지고 안 해도 될 고생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심적으로 너무 힘들었다. 그 와중에 비행기 안에서 누구한테 털어놓지도 못하고 급격하게 외로워졌다. 뭐라도 위로받고 싶은 생각에 미리 받아두었던 이 전자책을 열었다.
하나도 뜻대로 되는 일이 없는 것 같은 상황을 견뎌 빛을 본 과정이 담긴 책을 읽은 덕분에 뉴욕 땅을 밟았을 때는 다시 사건 이전의 정신을 되찾을 수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여행자에서 더 넓은 세상과 경험을 직접 해보고 싶은 사람으로. 겪고 있는 상황은 다르지만 심리적으로 아픈 상황이라는 것만으로도 유대감을 느꼈다. 작가에게 가난과 우울함은 아픔이었지만 현재의 자양분이기도 하다. 내가 겪은 이 에피소드도 앞으로 사는 데에 있어 그리고 여행을 이어가는 데에 있어 용기가 되어줄 거다. 그렇게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되는 책이었다.
무엇보다 신기한 건 호카곶 이야기가 나오더라. 포르투갈 호카곶이 책에 있다니! 호카곶에서 느낀 감정이 내가 느낀 감정과 너무 똑같아서 신기했다.
'맞아 나도 끝없는 바다를 보면서 작은 줄 알았던 내가 이렇게 유럽의 끝까지 왔다며 감동했지.'
'호카곶에서 느낀 감정을 잊지 말자고 다짐했는데. 벌써 잊을 뻔했네.'
나는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우당탕탕 사건 하나에 울상이라니! 다시 용기의 심지에 불을 지폈다. 지금 생각해도 포르투갈을 막 떠난 시점에 포르투갈 이야기가 나온 책을 읽은 게, 하필 그 책을 대출했다는 게 신기하다.
신기하면서도 책을 읽는 타이밍이 얼마나 중요한지 체감한 독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