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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뚜벅이는 윤슬 Jan 23. 2020

여행지가 낯설지 않을 때 가장 위험하다

소매치기보다 더 무서웠던 여행지에서 느끼는 익숙함

평소에 여행지에 대한 적응력이 굉장히 빠른 편이다. 길도 잘 찾고 공간을 외우는 것에 능한 편이라 언어만 적응을 못할 뿐 쉽게 사는 동네처럼 그곳을 적응한다. 이는 여행할 때 대체로 장점인데 딱 한번 단점으로 작용할 때가 있다.


프라하는 여러 지구로 구역이 나뉘어 있다. 보통의 여행자들은 1구역을 돌아다니는데 나 역시도 다른 구역을 고민하다가 혼자 여행하는데 너무 조용하면 심심하겠다 싶어 여느 여행자들처럼 1구역만 돌아다녔다. 프라하성-까를교-올드타운 광장 등 대표적인 여행지들이 있는 곳이었다. 역시 이른 오전만 제외하면 항상 거리들은 북적였고 크리스마스 주간이라 해가 지면 활기참은 절정에 달했다. 크리스마스 주간이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그 분위기가 항상 좋았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핫와인을 마시는 사람들, 레스토랑 앞 테라스를 가득 채워 시끌벅적한 테라스, 실제로 보는 것이 버킷리스트였던 크리스마스 마켓, 까를교 주위를 가득 메운 새들.

'이게 내가 실제로 보고 싶었던 연말이지!'

덕분에 혼자 다녀도 심심하지 않았고 매일 이곳저곳을 열심히 걸어 다니며 카메라를 들었다.

프라하에 온 지 5일째. 야간열차를 타고 부다페스트로 넘어가는 날이라 아침 일찍 체크아웃을 하고 프라하 중앙역 물품보관소에 캐리어를 넣었다. 그리고 시작된 프라하에서의 마지막 하루. 오전까지는 좋았다. 크리스마스 연휴라 레스토랑과 마트가 거의 문을 닫아 비교적 조용한 오전이었고 덕분에 필름 카메라 셔터를 많이 누를 수 있었다. 예쁜 풍경이 참 많이 보였던 오전이었다. 문제는 오후였다.

심심하기 시작했다. 1구역의 웬만한 길은 다 가봐서 구글맵을 보지 않아도 됐고 눈에 익은 풍경들만 보였다. 어제도 본 마켓, 그저께도 온 거리, 예상되는 그다음 거리, 문 닫아 들어갈 곳 없는 가게들.

'아 빨리 야간열차 타고 싶다.'

심지어 매일 롱패딩에 크로스백을 매고 다녀서 어깨까지 아팠다. 추워서 벗을 수도 없고 어깨가 너무 아파서 어쩔 수 없이 영업 중인 스타벅스를 들어갔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돈을 썼다. 어차피 프라하에서 마지막 날인데 그냥 남은 돈을 다 써도 됐지만 바보같이 그 와중에 돈을 아끼겠다고 물을 샀다. 스타벅스에서 생수를 사 마시는 날이 오다니. 그렇게 테이블 위에 물병을 올려놓고 패딩을 벗어 맞은편 의자에 걸쳐두고 늘어졌다. 어휴 힘들어. 시차 적응도 못 했던 때고 어깨는 아프고 볼 것도 없고 배도 안 고픈데 따뜻한 곳에 앉아있으려면 어딘가는 들어가야 하니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었다. 오전의 좋았던 기억이 급격히 추락하기 시작했다. 가장 속상한 건 이렇게 멀리까지 와서 지겨워하는 내 모습이었다. 1년 동안 어떻게 기다렸는데. 중간에 해외를 갔어도 두세 번을 갔을 돈을 어떻게 아꼈는데 이러고 있다니.

일단 기분 좀 어떻게 해야겠다 싶어 유튜브를 들어갔다. 사람은 좀 단순하게도 웃긴 건 못 참는다. 키득키득거리다가 스타벅스에서 대뜸 어울리지도 않게 어깨를 돌리고 두들기며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 생각해봤다.

'우선 여기서 1시간을 쉬고, 크리스마스 마켓이 버킷리스트였으니까 마지막으로 한번 보자. 분명히 한국 가면 그리울 거야. 그리고 일찍 역을 가서 저녁을 먹고 열차를 기다리자.'

그렇게 다시 크리스마스 마켓을 갔고 먹고 싶었지만 매번 배가 불러 못 먹은 핫도그가 눈에 띄어 사 먹었다. 이 때도 배고프지 않았지만 이제 더 이상 먹을 기회는 없어서 배 터지게 먹었다. 그런데 웬걸. 소시지가 지금까지 먹어본 소시지와는 차원이 다른 맛이어서 허겁지겁 위에 넣었다. 먹고 싶었던 것을 먹는 동안 또 기분이 좋아졌고. 그리고 길거리를 배회하다 프라하 중앙역으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길에 생각했다. 오늘 프라하를 떠나서 참 다행이라고. 도시를 탓하는 것은 아니지만 체력을 생각했을 때 내일 새로움이 없으면 넉다운이 아니었을까. 이래서 평소 건강관리가 진짜 중요해-한국 가면 어깨 좀 어떻게 해야지-궁시렁궁시렁거리며가니 걷기엔 좀 힘든 프라하 중앙역에 생각보다 금방 도착했다.

차원이 다른 맛의 핫도그(속 소시지).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을 정도로 소시지가 맛있었다.


돌아온 지 반달이 다 되어가는 시점에서 다시 되돌아보고 사진을 봐도 프라하는 분명 마지막 날까지 예뻤다. 단지 첫날의 나와 마지막 날의 내가 달라졌을 뿐이지. 여행지에 익숙해지는 것이 이렇게 무섭다. 어쩌면 소매치기를 만나서 중요한 뭔가를 털리는 만큼이나 절망적이다. 간절했던 여행마저 한순간에 지겹다고 느끼게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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