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유럽여행의 몇몇 순간은 어학연수였다.
나는 영어를 할 줄 모른다. 기껏해야 아는 단어만 나열하는 정도에 불과하고 문장을 구사할 줄 모르기 때문에 모른다고 하는 것이 맞는 것 같다. 여행사에 다니는 사람이 영어를 못한다고? 다소 언밸런스할지 모르겠으나, 회사에서 외국어를 써본 적도 없고 쓸 일도 없는 직무이다 보니 불편함도 없고 필요성도 딱히.
물론 그렇다고 영어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강남의 유명 학원까지 다녀봐도 실력이 전혀 안 느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영어와 나는 등지고 사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영어는 그냥 언젠가 아-주 나중에 한 번쯤 다시 공부해보자-생각했는데 대뜸 이번 유럽여행에서 영어 공부를 하게 되었다.
TMI로 영어를 못해서 경험한 에피소드는 화려한데 그중 하나로 영알못을 증명하자면, 폴란드 공항 검색대에서 "주머니에 아무것도 없어요?"라고 물어봤는데 그걸 못 알아들어서 우물쭈물하며 "I don't speak English..." 했을 정도의 실력이다. 딱 그 정도.
다른 나라에서도 그랬던가? 싶을 정도로 유독 이번 여행에서 자주 들었던 말이 있다.
"anything else?"
처음에 굉장히 당황스러웠다.
'이상하다. 다른 영어권에서는 이런 거 안 물어봤던 것 같은데...'
아는 문장인데도 뭐라 말해야 할지를 몰랐다. 뭐라 대답해야 하지.
'더 필요한 것이 있니?라고 물어본 거니까 없으면 'NO'라고 해야겠지?'
"NO!" 왠지 NO라고 하는 것만으로는 자칫 내 의도를 잘못 알아들을까 봐 아니라고 손도 막 휘저었다. 점원이 왠지 'NO'라는 말보다 빠르게 휘젓는 손으로 의미를 파악한 것 같았다. 아닌가? 버릇이 없어 보이는 대답인가? 너무 짧게 말했나?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지만 뭐 때문에 점원의 표정이 뜨드미지근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니 그런데 자꾸 곤란하게 뭘 살 때마다 다들 그놈의(그때의 나에게는 그놈이었다) "anything else?"를 다 하는 것이 아닌가. 그때마다 나는 매번 손사래를 치며 "NO"라고 했고 그때마다 난감했다. 그렇게 열 번도 넘게 며칠 동안 점원의 친절한 배려에 곤란했을까. 어느 날 한 레스토랑에서 메뉴를 주문하기 위해 줄을 서 있었다. 앞에는 영어를 잘할 수밖에 없을 것 같은 비주얼의 서양인이 먼저 메뉴를 읊고 있었다. 그 서양인도 역시 똑같이 "anything else?"라는 질문을 받았다.
"That's all."
뭐... 뭐라고!? 순간 귀 쫑긋. 드디어 내가 '그놈의 질문'에 대한 답을 들은 건가!? 쾌감이 마치 인생의 숙제를 푼 것 같았다. 이게 뭐라고 그렇게 뿌듯하던지! 나는 내 차례가 왔을 때 너무나 유쾌하게 "That's all!"을 외쳤고 그 어느 때보다 자축하며 식사를 했다. 그 이후로 여행하는 내내 마치 원래부터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여유로운 척 "That's all."을 잘 써먹었고 한국에 돌아와서도 가장 강렬하게 머릿속에 남은 문장이 되었다. 초등학생 때부터 10년도 넘게 영여를 배웠지만 외우지 못했던 문장을 단 며칠 만에 알게 된 것이다. 역시 외국어는 그냥 부딪혀서 배우는 것이 빠르다는 것을 실감한 경험이었다.
해외를 다니면서 외국어를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은 몇 번 해봤으나, 이렇게 문장을 배운 경험은 처음이었다. 여행은 여행인데 몇몇 순간은 단기 어학연수 같았다랄까. 이래서 다들 유학을 가는 건가 싶기도 하고. 이렇게 1년 동안 영어권을 누비고 다니면 꽤 많은 문장을 구사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생각들을 하니 드는 한 가지 생각. 작년에 월 15만 원을 내고 중국어 회화학원을 8개월쯤 다녔는데 차라리 그 돈 다 떨어질 때까지 중국에 가 있을 것을 그랬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