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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뚜벅이는 윤슬 Jan 06. 2020

이거 혹시 호그와트행 열차인가요?

인생 첫 야간열차에서의 10시간

덜컹이는 기차에서 하룻밤을 보내보고 싶었다. 시베리아 횡단열차든 동남아의 어느 도시 이동이든 불편해도 괜찮으니 덜컹이는 기차에 누워 5시간 이상을 가는 여행을 해보고 싶었다. 그 바람을 몇 년쯤 가지고 지냈을까. 드디어 2019년 12월, 체코 프라하에서 헝가리 부다페스트로 이동하는 일정이 확정되면서 기회가 왔고 나는 그 기회를 망설임 없이 덥석 물었다.




예약하고 꼭 프린트해야 하는 티켓. 없으면 못 탄다.

본래 체코 철도청의 기차는 탑승일 기준으로 대략 2-3개월 전에 좌석을 오픈한다. 하지만 크리스마스 주간은 예외.  인기가 많은 주간인만큼 탑승일 기준 1달 전에 열린다. (정확한 정보가 없어 매일같이 들어간 결과, 1달 전이었) 그렇게 또 다른 여행으로 있던 숙소 거실에서 최고의 집중력을 발휘하며 안 되는 영어를 되게 만들며 1인실을 예약했다. 물론 더 가격이 저렴한 다인실이 있었지만 소매치기로 여행을 망치고 싶지 않아 14만 원짜리 1인실을 선택했다. 유럽 소매치기가 배드버그보다 무섭다.

주석을 달자면, 체코 프라하에서 헝가리 부다페스트로 가는 열차 티켓의 가격은 같은 클래스라도 매일같이 가격이 다르다. 항공권 가격이 매일같이 차이가 있는 것과 같은 이유.




IC575가 내가 탔던 전광판. 사실 저 열차번호 아니었으면 출도착지를 보고도 읽지도 못했을 것이다. 영어가 아니잖아!

'아직도 두 시간이나 남았어!'

크리스마스 이브라 프라하 대부분의 카페, 레스토랑 심지어 맥도널드도 영업을 조기 종료해 갈 곳이 없어 출발시각 4시간 전부터 중앙역에 있었다. 출발 시간 자체도 21시가 넘은 시간이라 중앙역에는 노숙자 외에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술에 취한 노숙자들의 큰 소리 외에는 딱히 눈길이 갈만한 일도 소리도 없어 계속 앉아만 있었다.

'아이고 허리야 어깨야.'

매일같이 롱패딩과 핸드백을 매고 여행한 지  4일째 슬슬 어깨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본래 어깨가 만성으로 아팠던지라 여행 중이라고 해서 안 아픈 행운 따위는 없었다. 뭐 어쩌랴. 어렸을 때 자세에 무관심했던 나를 원망하며 두 시간을 보냈다.


투덜거림에 이어 졸음도 쏟아져 캐리어 손잡이에 이마를 기대기 시작할 때쯤, 전광판에 플랫폼 번호가 떴다.

와! 드디어 간다! 지금 생각해보니 이때부터 잠은 달아났나 보다.

두근두근 여기 9와 4분의 3 승강장인가요?

플랫폼을 찾아 캐리어를 끌다 보니 도착한 승강장. 기차 소리의 울림과 차가운 공기가 진짜 야간열차를 타는 실감을 주었다. 추운 날씨에도 난생처음 놀이동산에 가는 어린이처럼 웃음이 가시지를 않았다. 그만큼의 설렘과 기대를 가진 적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열차 칸 번호를 프린트한 티켓에 적힌 번호로 찾으면 문 앞에 역무원께서 프린트한 티켓을 확인 후 들여보내 주신다. 마치 마법사만 호그와트에 갈 수 있으니 마법사인 증거를 대!라고 하는 것만 같은 상황. 네 저 마법사예요!

열차칸에 들어서면 긴 복도에서 나의 객실 번호를 찾을 차례다. 혹시 헤맬까 봐 한국에서 미리 숱하게 봤던 유튜브 영상을 기억하며 한 번에 객실을 찾았고 보자마자 "우와~!"

모닝콜 알람도 울리고 비상 전화 버튼과 무료로 제공되는 생수, 슬리퍼 등 있을 것은 다 있다.

이번 여행 일정 내내 도미토리만 이용하는 나에게 객실 컨디션은 단연 호텔급이었다. 포근한 이불과 집에서 쓰는 베개와 같은 높낮이의 베개가 마음에 들었고, 한 병은 새 것으로 두고 가겠구나-싶은 두 병의 생수, 꽤 도톰한 수건은 낸 돈에 비해 후하다는 생각을 들게 했다. 유튜브 영상으로 봤을 때부터 신기했던 세면대는 덤. 장롱처럼 문을 양옆으로 열면 세면대가 나타나는데 아무래도 이 열차는 진짜 호그와트로 가려는 모양이다. 신기해.

오른쪽에 특이한 손잡이의 장롱 문을 양옆으로 열면 세면대가 된다.
다소 뭐지? 싶지만 세면대다. 빨간 버튼을 누르면 물이 나온다. 양옆에 있는 것은 조명과 콘센트.

이것저것 다 만져보고 이리저리 고개를 다 돌려본 뒤 침대 이불을 들어 다리를 넣을 때쯤, 열차는 역을 떠나기 시작했다. '오오! 움직여 움직여!' 비행기를 처음 탄 학생들이 '오 뜬다 뜬다!' 하는 것처럼 처음 겪는 끌려감(?)에 2차 설렘이 왔다. 평소에 앉아서 기차를 탈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마치 온몸에 힘을 빼고 물 위에 떠 있는데 누가 나를 끌고 가는 느낌? 심지어 열차라는 것이 칸과 칸을 연결하여 달리는 형태이기 때문에 이리저리 양옆으로도 흔들린다. 그러니까 양, 옆, 앞, 뒤로 울렁울렁거리며 끌려가는 느낌이라는 거다. 아 이건 정말 직접 타보지 않으면 모를 느낌이다. 설명이 안돼.

날이 어두울 때 출발해서 몰랐지만 열차는 국경을 몇 번을 넘으며 다양한 풍경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 뒤로는 잤다. 아무리 좋아도 일단 잠은 자야 다음날에도 여행을 좋은 컨디션으로 할 수 있으니까 눈을 감았다. 물론 앞서 말했듯이 프라하 중앙역에서 전광판을 본 순간부터 잠이 달아난 덕에 새벽에 깨고 말았지만. 어차피 프라하에 있던 날동안 계속해서 시착 적응에 실패했는데 뭐. 아휴 포기.

졸졸졸-흐르다가 멈추는 세면대 물에 빨간 버튼을 계속해서 누르며 세수도 하고 앞머리도 감았다. (샤워를 할까-하고 객실을 나가 공용 샤워실을 갔는데 흠. 샤워는 숙소에서)

남은 시간은 휴대폰 속 음악을 작게 틀어놓고 해가 뜬 뒤의 창 밖을 구경했다. 추운 겨울에 포근한 흰 이불을 덮고 기차 창 밖을 보고 있다니. 졸부가 된 기분이었다. 졸부가 된 마법사인 척을 하다 보니 어디선가 알람이 삐비 비빅-삐비 비빅-. 그때 알았다 머리맡에 있는 버튼 중 하나가 알람 기능이 있는 버튼이었다는 것을. 오호! 좋은데!? 깨워도 주고.


열차는 도착 2시간 전쯤 알람을 울려준다.
받은 조식의 그대로. 끼워져 있는 종이는 프린트해간 티켓이다.

알람이 울리고부터는 복도가 꽤 시끌벅적하다. 세면대가 없는 다인실을 쓰는 분들이 씻으러 왔다 갔다 하는 것 같았다. 일찍이 옷도 갈아입고 내릴 준비가 끝난 나는 계속 감상 타임... 은 아니고, 조식 대기 타임. 조식이 굉장히 궁금했다. 딱딱한 돌 같은 빵이 들어있어 많이들 남긴다는 소문 무성한 조식. 그 조식은 도착 시간 1시간 전쯤 받을 수 있었다. 오 일단 박스와 티 너무 마음에 들어! 흰 이불 위에 두면 최소 갬성 인스타 그래머다.


티는 객실 체크인 타임 때 역무원이 객실을 설명해주면서 물어본다. "커쀠 올 티이~?" 그때 대답한 음료로 조식 타임에 갖다 주신다.


컵이 너무 귀여운 거 아닌가요?


결과적으로 그 소문 무성한 빵은 많은 탑승객의 평을 반영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완전 다른 형태의 빵으로 바뀌어 있었다. 곡물 식빵 같은데 어이쿠야... 곡물로만 만들었나. 푸석거림의 극치다. 다행히 잼, 버터, 크림치즈까지 잔뜩 줘서 치덕치덕 발라 차와 주스와 마시니 먹을만했다. 쿠키도 있었는데 이때 배가 불러 캐리어에 던져두었는데 그걸 한국까지 가져왔더라. 얼떨결에 기념품 당첨.


나중에 부다페스트까지 여행을 다 마치고서 확신했지만 유럽 사람들은 그냥 이런 빵을 잘 먹는 것 같다. 동네 마트에서 이런 빵들을 파는데 현지인들이 한 바구니를 산다.


조식 시간 뒤부터는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조식을 다 치우고 나니 캐리어를 들어야 했고 두고 간 것이 있는지- 이불 휙 배게 휙. 그렇게 나의 호그와트, 부다페스트 켈레티푸역에 발을 디뎠다.


지금 생각해봐도 마법 같은 일이다. 14만 원짜리 움직이는 호텔이라니. 기차가 국경을 넘는 것도 난생처음이라 신기한데 방 안에 세면대가 있지를 않나 알람이 깨워주지를 않나. 제복을 입은 아저씨가 조식을 주며 "굿모닝~"이라고 하는 난생처음 타 본 열차 속에서 나는 마치 9와 4분의3 승강장에 들어서 처음 호그와트행 열차를 탔던 해리포터의 모습만큼이나 호기심 가득하고 모든 것에 놀랐던 초보 마법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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