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구니에 먹을 것을 담는 행위 그 이상의 무언가
여행은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장단점이 있는지를 알게 해 준다. 이번 유럽여행도 그랬다. 여행 중 종종 '역시 길 하나는 잘 외워!', '나는 아침형 인간이구나.' 스스로를 알아가는 순간들이 있었는데 그중에서 이번 여행에서 새로이 확신한 사실은 동네 마트 가는 것을 굉장히 좋아한다는 점이었다.
프라하에는 테스코(TESCO. 이하 '테스코'라 표기)라는 프랜차이즈 마트가 있다. 한국의 마트처럼 몇 층짜리 마트는 아니지만, 내부는 한국의 L사마트나 E마트와 흡사한 마트로 현지인들이 이른 아침부터 장을 본다. 실제로 오전 8시에 갔는데도 계산대들이 모두 줄이 있었다. 크리스마스 파티 준비 때문에 많았던 걸까?
그런 테스코가 운이 좋게도 숙소에서 도보 5분 거리에 있어 프라하에 있는 4일 동안 매일같이 들릴 수 있었다. 여행 중 들고 다닐 물을 구입하거나, 한국에 가져갈 과자를 사거나... 아, 딸기 요플레가 먹고 싶어 집어 오기도 했다. 덥석덥석 집어 바구니에 넣어도 5,000원을 넘지 않으니 프라하의 물가에 배신당한 나로서는 눈물 나게 행복한 시간이었다. 과자가 개당 900원대였고 물은 프라하 어디서도 살 수 없는 가격 3코루나! 한화로 154원 정도다. 세상에.
제품을 싸게 산 것보다 더 좋았던 것은 크리스마스이브의 전날이었다. 유럽의 크리스마스는 한국에서보다 큰 의미를 가지고 있어 마트 역시 크리스마스이브부터 크리스마스 다음날까지는 문을 닫았다. 테스코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래서인지 이브 전날 마트는 이른 오전부터 사람들이 한 바구니 가득 장을 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단순한 가득히 아니었다. 보통 많이 넣는 것이 아니더라. 빵을 하나 사더라도 같은 빵을 열몇 개는 사는 것 같았다. 계산대에서 줄을 서면서 앞의 현지인이 바구니에서 물건을 꺼내 올려놓는 모습을 보는데 '저걸 언제 다 먹지? 파티 하시나?'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 정도였다. 크리스마스라서 그런 것 같다는 확신이 그제야 들었고 체코 현지인들이 크리스마스를 얼마나 큰 기념일로 생각하는지를 눈으로 볼 수 있는 한 순간이 되었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도 마트 사랑은 계속됐다. 부다페스트로 넘어간 날이 크리스마스 당일이어서 마트들은 모두 문을 닫은 상태였는데 그게 그렇게 불편할 줄이야. 작은 슈퍼마트가 일부 문을 열어 물 정도는 사 마셨는데 음? 500포린트? 프라하에서 3코루나 먹은 것을 생각하니 아이고 배야. (500포린트면 한화로 1,980원 가량이다) 손해 of 손해를 본 기분이었다.
그런 불편함을 참고 참아 드디어 오픈 날! 전 날부터 "전 마트에서 장 봐올 거예요!"라며 함께 방을 쓴 사람들에게 선포한 바를 지키러 오전부터 마트로 출격했다. 부다페스트에도 여러 마트 브랜드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주요 대형 마트라 할 수 있는 스파(SPAR)와 테스코(TESCO)가 그 대상이었는데 마트에 들어서자마자 자유의 몸을 얻은 기분이랄까. 그 기분만큼이나 많은 것들을 바구니에 담았다. 한국의 던 X도넛에서 도넛을 집어 들듯이 집게로 직접 바게트 빵을 집어 들어 빵 봉투에 넣어도 보고, 맛있다는 후기가 있었던 초콜릿들을 찾아 과자코너를 연신 서성이기도 했다. 치즈들은 종류가 얼마나 많던지!! 정육점처럼 치즈를 잘라주는 코너 말고도 긴 냉장 코너 선반을 가득 채운 수많은 치즈 앞에서 10분은 헤맨 것 같다. 계산대 직원분께 담을 봉투를 달라는 말을 영어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난감했지만 마트에서의 기쁨은 웬만한 여행지 저리 가라였다.
여기서 언급한 테스코는 프라하에서 언급한 그 테스코와 동일한 브랜드다.
한국에 돌아온 지금 가장 기억에 남고 다시 경험하고 싶은 순간을 누군가 물어본다면 나는 꼭 마트를 말할 것이다. 단순히 장바구니에 물건을 담아 계산했던 곳이 아니었다. 가볍게는 현지인들이 먹는 채소/과일이 무엇인지를 볼 수 있던 견학이었고 크게는 현지인들의 크리스마스 그 맘때쯤의 모습을 본 삶의 현장이었다. 어느 여행지보다 현실감 있는 곳이 아니었을까. 혹시 누군가 짧은 여행 일정 속에서 현지에 좀 더 깊게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묻는다면 마트를 가보라고 추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