둔한 미각은 미식가는 못 되게 해 주지만 여행자로서는 꽤 많은 득을 보게 해주고 있다. 누군가에게 맛집을 자신 있게 추천해주기는 어려운 대신에 해외에서 음식 때문에 힘들거나 고통받지 않으니 말이다.
심지어 토종 한국인 입맛도 아니다. 장담하건대 나는 쌀 없이도 어디 가서 잘 살 수 있을 것이다.
단순한 내 성격만큼이나 단순한 미각 덕분에 해외에 갈 때마다 새로운 음식들을 곧잘 접하고 있는데 그 음식들은 여행지에서뿐만 아니라 그 이상으로 더 큰 범위인 인생에 영향을 준다. 꼬리가 길어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가지를 않는다. 이게 바로 출구 없는 입덕인가.
카프레제
카프레제에 대해 찾아보니, 본 명칭은 '인살라타 알라 카프레제'라고 한다. 재료는 레스토랑마다 다르기도 하지만, 가장 FM적인 재료라면 토마토와 모차렐라 치즈를 슬라이스 해서 바질을 곁들여먹는 샐러드류다. 이탈리아 카프리섬에서 시작된 여름철 요리라고 하는데, 나 또한 여름에 가까운 날씨였던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에서 카프레제를 처음 먹었다. 크로아티아 여행은 2015년? 2016년?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쯤 다녀왔는데 아직도 기억난다. 친구에게 "카프레제? 나 그거 안 먹어보았는데."라고 했더니 친구가 엄청 맛있다며 먹어보자고 했던 상황을.
음식의 맛이 재료의 개수와 비례하지 않다는 말에 근거를 붙이면 바로 이 카프레제가 아닐까. 아니 치즈랑 토마토를 같이 입에 넣은 것뿐인데 이렇게 맛있을 수가 있나? 부드러운 치즈와 씹는 맛이 있는 토마토가 주는 충격이란. 아기가 초콜릿을 처음 먹어봤을 때의 충격과 흡사할 것 같다.
그 이후로 한국에서도 곧잘 카프레제의 기억을 소환했다. 아쉽게도 한국 레스토랑에는 카프레제가 메뉴에 잘 없어 집에 치즈가 생길 때나 먹고 있지만.
그러고 보니 먹어 본 지 오래된 것 같은데 제대로 된 카프레제 맛집을 찾아봐야겠다.
상그리아
상그리아는 사실 이전에도 많이 마셔봤지만 그럼에도 첫 상그리아는 'IN 스페인'이라고 말하고 싶다. 본래 상그리아를 좋아했던지라 스페인 여행을 확정 지었을 때 제일 많이 기대하고 목표로 했던 것이 상그리아였다. 당연히 스페인 여행 내내 상그리아를 몇 번 마셨는데 사람들이 혀를 내두를 만큼 맛있는 상그리아는 마지막 저녁식사 때가 돼서야 발견할 수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였다. 한국에서는 절대 경험할 수 없는 상그리아라고 생각했기에.
실제로 그 뒤로 한국에서 상그리아는 몇 번이고 더 마셨지만 안타깝게도 '맛있다'를 뛰어넘는 그 놀라운 상그리아의 맛은 만나지 못했다. 생각에는 과일도 과일이지만 레드와인 자체도 굉장히 맛있는 와인이었을 것이다-추측된다.
맛은 덜 하지만 스페인 이후로 한국에서 상그리아를 마시는 횟수는 이전의 배 이상으로 늘었다. 가게마다 다른 과일을 넣고 와인을 다르게 쓰다 보니 매번 고를 때마다 도전하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스페인 여행이 자동으로 떠오르는 것 자체를 즐기고 있어 메뉴판에서 놓치지 않고 있다.
그 스페인 상그리아에 비하인드가 있다면 그때 남은 돈이 많지 않아 그 상그리아를 고르는 것은 계획보다 큰 소비였는데 총무를 담당한 동생이 허락해줘서 인생 상그리아를 마실 수 있었다. 동생의 큰 그림이었던 건가. 그게 보통 상그리아가 아니라는 것을 예상하고 있던 거지.
젤라토 아이스크림
젤라토 아이스크림은 스페인에서 1일 1 아이스크림을 먹은 뒤로 해외의 어디를 가든 꼭 먹는 디저트다. (젤라토에 대한 사랑은 이전에 따로 긴 글을 썼을 정도로 대단하다. 그럼에도 간략하게 조금 이유를 쓰자면 다음과 같다.)
젤라토의 쫀득하고 시원한 맛은 조금 과장하자면 언제나 뚜벅이 여행자인 나에게 마라톤 중 마시는 물 같다랄까. 심지어 그리 헤비 한 간식도 아니니 하루에 몇 번이고 먹을 수 있다. 여기에 가게마다 같은 맛도 같은 맛이 아닌 것도 젤라토의 매력! 이쯤 되면 안 먹을 이유가 없는 음식이기도 하다.
한국은 젤라토 가격이 비싼 편이다. 가격 대비 양도 적어 자주 먹을 수는 없지만(여행에서 먹는 것만큼 한국에서 자주 먹으면 여행 갈 돈을 못 모을 거다), 젤라토를 얹어주는 디저트를 파는 카페에서는 곧잘 시켜보고 있다.
까눌레
까눌레는 프랑스 디저트로, 겉면은 캐러멜로 딱딱하게 만들고 안은 촉촉 부드러운 빵인 반전 매력이 있는 핑거 디저트다. 빵을 좋아하는 이유야 말해 뭐하겠냐만은 많은 빵 중 까눌레를 콕 집은 이유는 제주도의 한 카페에서 시작됐다. 음악이 흐르는 조용한 카페 '모뉴에트'에서 먹은 까눌레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겉으로 봐서는 크게 다를 것이 없지만 모뉴에트의 까눌레는 한라산 소주로 만든다는 특이한 차이점은 있다.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까눌레를 먹고는 까눌레의 참맛을 알았고 포장에서 육지에 데려왔을 정도로 푹 빠졌다. 그 이후로 까눌레를 파는 카페에 왔다? 무조건 까눌레를 고른다. 고민도 안 하고 집어 든다.
최근에는 육지에서 모뉴에트 까눌레를 대체할 맛집도 찾아냈다. 야호! 까눌레 못 잊어 못 잃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