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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뚜벅이는 윤슬 May 10. 2020

도피는 나쁜 것이 아니야

내가 붙잡고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떨어져 보는 경험

원치 않는 일이나 감정이 생겼을 때 사람들은 소소하게 좋아하는 것을 하며 버티고 버틴다. 술을 마시거나 무언가를 소비하거나 음악을 듣거나. 하지만 인생이 이것들만으로 버텨진다면 굉장히 행복하게 사는 편이라는 거. 무언가를 놓고 싶을 때, 쉬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때.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는 경험자로써 적극 추천하고 싶은 방법은 역시 익숙한 것들로부터 도망가는 것. 김영하 작가는 최근 호캉스가 유행하는 이유 중 하나가 '해야만 하는 무언가를 떠오르게 하는 사물과 공간이 없어지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처럼 내가 매일 보는 모든 것들로부터 떠나는 것이다. 내가 택한 떠남의 방식은 '한 달 살기'였다.


작은 것들의 소중함을 깨닫는 시간

한 달 살기를 떠나고 가장 금방 변하는 나의 모습은 '평소에 흘려보내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었다. 길고양이, 몽돌, 해수욕장의 모래 위를 밟고 지나가는 강아지들의 모습들을 그냥 스쳐보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에는 온전히 그 존재들에 집중하게 된다.

'저 고양이들은 가족일까?' 

'돌이 신기하리만치 둥그네.' 

'이 밭은 뭘 심은 걸까?' 

평소에는 무감정으로 대했던 것들이 사실은 영감 그 자체였음을 깨닫는 시간이었다. 붙잡아야 할 것들을 위해 온 시간과 마음을 다하느라 보지 못한 것들을 알아갈 수 있는 것이 한 달 살기의 매력인 것 같다.


무작정 걷는 시간의 중요성

오래 걷기가 생각을 비우거나 테트리스처럼 정리하기에 좋다는 사실은 이미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내가 오래 걷는 시간은 출퇴근길을 빼면 1시간? 회사 일 외에도 집안일, 누군가와의 약속으로 온전히 '걷기'가 주인공인 시간은 마련하기 참 어렵다.

그러다가 한 달 살기를 하면서 부쩍 하루에 걷는 양이 많았졌다. 어딜 가기 위함이 아닌 정처없이 걷는 시간. 2시간 반 정도를 매일같이 걸었다. 숨은 마을들을 구경할 겸이라고 생각하고 버스를 탈 거리를 뚜벅뚜벅 직접 이동했다.

처음에는 걷는 행위에 집중하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되지만 걷는 시간 동안 꽤 많은 생각을 하기도 버리기도 했다.

지금까지 안고 있던 불안감, 걱정, 스스로에 대한 불만들의 근본을 찾고 때로는 해결책까지 떠오른다. 실제로 그 때의 목표 재설정으로 개인적으로 얻은 것들이 많기도 하니 그 오랜 걸음들은 여러모로 인생에 필요한 걸음들이 확실하다. 

제가 한 달 살기를 한다고 했을 때 '한 달 동안이나 뭐해?'라고 묻는 지인들이 있었다. 지금 대답한다면 나는 걸었다고 답하고 싶다.


 새로운 도전으로 자존감 높이기

한 달 살기를 간다면 한 개의 도전을 미리 정하고 가는 것도 좋다. 1인 1빙수 먹기도 좋고 일출보기도 좋다. 나의 경우에는 한라산 정상 정복하기였다. 한 달 살 때나 하지 평소에는 여행 기간이 길지 않아 생각도 못할 것 같은 것이 이유였다. 

한라산은 참 오르기 힘들었지만, 그 덕분에 지금까지도 힘든 일을 마주할 때마다 '한라산도 정복했는데 이것쯤이야-'하고 나를 다잡게 된다. 몇 년이 지났는데도 자존감을 높여주는데에 큰 몫을 하고 있는 목표다.

지금 생각해보면 평소에 산 근처도 안 가는 제가 어떻게 올랐을까-싶어 정말 잘한 일인 것 같기도 하고. 하고싶은 많은 것들 중 그 때만 할 수 있는 것이 있다. 한라산 백록담을 본 일이 딱 그 일인 것 같다.


나를 위한 사치가 주는 확실한 행복

먹고 싶지만 가격이 비싸거나 다른 것을 위해 포기했거나 먹을 여유조차 없었던 이유로 포기했던 음식이 있었다. 바로 브런치. 회사를 출퇴근하면서 브런치 먹을 일은 없기 때문. 그 시간에 카페에 있는 것이 비현실이야...

제주도에서 브런치를 매일같이 먹었는데(때로는 식사 대신에 먹었다) 언제나 만족스러운 배부름에 배를 땅땅.


한 달 살기를 한다면 평소에 자주 먹는 음식 외에 접하기 어려운 미식의 세계로 입장해보는 것을 권하고 싶다. 맛이 주는 행복감은 생각보다도 힘이 강하니. 먹은 경험 자체가 10년 뒤에도 특별한 추억이 될 수도 있다.

게다가 그 어떤 방해도 없는 한 달 살기라면 맛의 '확실한 행복' 속으로 빠지는 것은 어려운 일도 아니다.


한 달 살기를 다녀온 지는 몇 년이 지났다. 이쯤되면 다른 추억에 밀려 순위권 밖일 법도 한데 나는 아직도 이때의 추억에 기대 살고 있다. 단순히 과거에 기대는 것이 아닌, 그때 얻은 것들을 생각하며 스스로를 응원하고 있달까?

주변 사람들에게 한 달 살기를 추천하는 이유다. 때로는 붙잡고 있던 것을 놓았을 때 더 크고 오래가는 것을 잡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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