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한정식은 왜 모래알 같았는가
2000년대 초, 직원 10여 명도 채 되지 않던 작은 회사에 경리로 입사했다. 결혼과 함께 경력이 단절됐다가 다시 시작한 일이었다. 나이도, 경력도, 사수도 없었다.
6년이 지나 회사는 20여 명이 됐지만 인사, 노무, 회계, 총무 전부가 여전히 나 혼자의 몫이었다.
임계치에 다다른 나는 대표에게 간곡히 청해 일주일에 딱 한 번, 6시간짜리 아르바이트생을 구했다. 대표는 흔쾌히 승인했다. 그 6시간으로 겨우 숨통을 틔웠다.
그런데 아르바이트생이 온 지 고작 일주일 만에 대표가 나를 한정식집으로 불렀다.
고맙다는 인사 뒤에 이어진 질문은 내 귀를 의심케 했다.
"오 대리, 이제 여유가 좀 생겼을 텐데 또 무슨 일을 더 해볼 건가?"
머리가 멍해졌다. 뭔가 세게 맞은 것처럼. 20여 명의 살림을 혼자 꾸려가는 내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겨우 생긴 틈새를 보자마자 새로운 짐을 얹으려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경영자의 추진력이 아니라 잔인한 독촉으로 느껴졌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그날의 한정식이 모래알처럼 서글프게 느껴졌던 기억이 선명한 이유다.
자리를 나서면서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만 맴돌았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하나. 마침 옆 사무실에서 상공회의소 재경 모임에 간다는 말을 듣고 나는 직관적으로 따라나섰다.
거기서 매출 약 400억 중견기업의 이사 한 분을 만났다. 나는 그분을 붙잡고 하소연하듯 물었다.
"이사님, 우리 대표가 저한테 이런 질문을 하셨는데, 솔직히 제가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막막합니다."
이사님은 내 하소연을 묵묵히 들으셨다. 그리고 밤새 본인의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업무를 어떻게 정리하고 관리하는지, 직원과의 관계와 대표와의 관계를, 재고 관리의 노하우까지. 모진 시간을 어떻게 견뎌냈는지, 어떻게 스스로를 갈고닦아 그 자리에 올랐는지.
그때 처음으로, 그런 자리에 오른 여성을 봤다. 나도 저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그 순간 그분은 내 롤모델이 되었다. 그래서 그 말이 더 무거웠다.
"말로 하지 말고 문서로 체계적으로 일하세요. 필요한 양식은 제가 드릴까요?"
우왕좌왕하던 내 마음이 그 말 한마디에 방향을 잡았다. 이제 방향대로 하나씩 하면 되겠구나. 그날 밤 처음으로 마음이 안정됐다. 이사님은 아침에 출근하면 받을 수 있게 해 두겠다고 하셨다.
주말 내내 아이를 돌보고 살림을 챙기면서도 이사님 말씀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억울함이 아니었다. 대표라는 자리가 원래 그런 것이었다. 항상 다음을 보고, 여백이 생기면 그 여백을 채울 일을 찾는 것. 그게 경영자의 정체성이었다. 그걸 깨닫고 나니 차갑고 단단한 결심이 마음에 들어왔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이 일을 해야 하는지 비로소 정확히 알게 된 것이다.
월요일 아침, 누구보다 일찍 출근해 책상 앞에 앉았다. 이메일함에는 이사님께서 보내주신 양식들이 이미 와 있었다. 하나씩 펼쳐놓고 우리 회사 상황에 맞게 고쳐 나갔다. 현금입출금장표 고도화, 매입매출 통합장표, 재고관리장표, 채권관리현황장표, 받을 어음관리장표, 자금결제 리스트, 연차관리장표, 공헌이익 등, 그리고 마지막에는 이 모든 장표를 하나로 연결했다. 월말이 되면 약식 재무제표가 자동으로 나오는 통합장표였다. 그렇게 향후 해야 할 20여 가지가 넘는 업무 리스트가 완성됐다.
그리고 대표께 메일을 보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단계별로 아래 작성된 일들을 추가로 하겠습니다."
답장은 없었다. 너무 거창하다고 생각하셨을 수도 있고, 굳이 회신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셨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나는 이미 시작하고 있었다.
그 이후로 나는 이사님을 오랫동안 챙겼다. 그분이 내게 준 것은 문서 양식이 아니었다. 방향을 모르던 나에게 방향을 준 것이었다. 나는 그 빚을 행동으로 갚았다.
인생에는 답이 보이지 않는 질문이 던져지는 순간이 있다. 그때 막막함에 멈출 것인가, 아니면 그 질문을 발판 삼아 나아갈 것인가.
오늘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은 그날 그 질문 덕분이다. 경영자는 원래 다음을 보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날 처음으로, 내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알았다.
나를 키운 것은 달콤한 격려가 아니었다. 방향을 잃은 나에게 던져진 그 차가운 질문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