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상실감과 부끄러움이 가득했다. 25년 12월 미국 공무원 생활을 시작하며 생긴 나의 간절한 소원은 아무도 내 학력을 물어보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 고학력 소문은 쥐도 새도 모르게 내 주변 동료 사이로 확 퍼졌다. 내 직위가 고도화로 인플레이션 된 내 학력에 비해 너무나도 낮았기에 자기 비하감은 갈수록 커져만 갔다.
나보다 3년 정도 공무원 생활을 먼저 시작한 남편의 심정이 이제야 이해된다. 남편이 처음 얻은 공무원직은 뉴욕주에서 운영하는 정신병원에서 입소자 식사를 제공하는 일이었다. 최소 자격 요건은 고등학교 졸업증과 건강한 신체를 소유한 사람으로 매일 출근 가능한 자였다. 4년제 대학을 졸업한 남편은 대학에서 배운 내용을 써먹을 일이 없다고 항상 불평했다. 나 또한 주변 사람들에게 남편의 직장을 자랑스럽게 말할 수 없었다. 운 좋게 2년 후 남편은 더 좋은 공무원직을 얻었다.
난 미국 박사학위를 받고도 미국 대졸자들이 얻을 수 있는 공무원직을 얻었다. 내가 이런 불평을 할 때마다 남편은 자신은 대졸자인데도 고졸이 얻을 만한 직위를 얻었다면서 나보고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한다. 처음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화가 났다. 아니 대졸과 박사졸을 동급 취급하다니!
졸업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진짜 실력이 중요한 거라고 매번 매번 다짐하며 실력 없이 박사 졸업증만 딴 나를 채찍질하고 채찍질했다. 직장에서는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처럼 일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힘들었다. 내가 이런 속물 인간이었다는 것을 제대로 자각하며 난 더 깊은 수렁의 구덩이로 빠져들었다.
응어리지고 삐뚤어진 마음가짐 때문이었는지 첫 두 달은 무척 힘들었다. 첫 출근하고 2주가 되지 않아 내 직속 상사는 돌아올 기약 없이 병가를 내고 사라졌다. 6개월 전에 일을 시작한 리온은 병가를 낸 상사의 일을 임시로 맡게 되었고, 나보다 2주 전에 일을 시작한 벨라와 나는 리온의 업무 지시를 받게 되었다.
리온과 벨라는 서로 옆자리에 앉고 나는 반대편에 앉는다. 하지만 사무실의 모든 자리는 3면이 2미터 정도 되는 칸막이로 막힌 큐비클이다. 리온과 벨라는 매일 대화를 나누며 일하기도 하고 수다를 떨기도 하지만, 난 칸막이로 막혀 그들과 동떨어져 지내야만 했다. 심지어 리온과는 인사 한마디 없이 하루를 지낸 적도 있었다. 나 혼자 동양인이라 직장사람들이 나하고 대화를 하지 않는 건가, 내 영어 발음이 이상해서 못 알아들어 나와 말을 섞지 않는 것인가 하는 마음속 시궁창 찌꺼기가 하루에도 수없이 올라왔다. 결국 남편 앞에서 펑펑 울고 나서야 내 마음의 찌끼를 조금씩 제거할 수 있었다.
"나도 사무실에서 다른 사람들이 나 빼고 이야기할 때 불안해. 나만 빼고 사람들이 무슨 프로젝트를 진행하나 싶어서. 다른 사람들이 다가오길 기다리기보다 네가 먼저 가서 인사하고 안부를 물어봐."
하지만 내 다친 마음을 알아주지 않고 오히려 내가 잘못하고 있다며 해결책을 제시해 주는 남편이 너무 미웠다. 엉엉 울며 남편에게 화를 냈다. 내 마음을 알아주고 받아 달라는 것이지 내가 지금 해결책을 원하는 거냐고. 내 잘못을 따지는 게 지금 중요한 거냐고. (물론 남편은 남편대로 답답하다. 내 마음을 받아줬고, 해결책을 제시하거나 내가 한 잘못을 따진 게 아니라고 자기 입장을 대변한다.) 결국 남편에게 위로를 받지는 못했지만, 오랜만에 한껏 흘린 눈물이 내 마음의 응어리를 조금이나마 풀어줬다.
남편 앞에서 눈물 한 바가지를 흘린 후 사람들과 대화에 끼지 못해 불안해하기보다는 내 업무를 빠르고 정확하게 배워야 하겠다는 굳은 의지가 생겼다. 아무도 나에게 일거리를 던져 주지 않기에 난 혼자서 일을 만들어야 했다. 내 주요 업무는 '읽기'다. 업무 관련 문서를 읽고 분석하고 해석하는 것이다. 박사를 하면서 읽기는 끝이 없는 숙제였다. 지금은 읽기를 하며 동시에 돈을 벌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기분이 좋아졌다. 몇 주 전만 해도 하는 일 없이 돈만 받아가는 공무원이라는 생각이 들어 매우 불안했다. 나보다 한 달 늦게 일을 시작한 마이크와 점심시간에 우연히 만나 이런 불안을 털어놓았더니 "문화 차이 아닐까?" 한다. (한국에서 지난 10년 동안 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쳤던 사람이라서 마이크는 한국 문화를 잘 안다.) 문화 차이로 기인한 문제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한 달 후 마이크는 나에게 내가 했던 똑같은 불안을 털어놓았다.
박사를 하면서 받았던 읽기 훈련, 자기 주도적 연구 습관, 그리고 이해 안 될 때 던지는 거침없는 질문 습관이 결국 나의 미국 공무원 생활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박사라고 해서 무조건 많은 돈을 벌어야 하는 법은 없다. 연봉의 금액에 따라 박사의 자질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지난 4년간 박사생활을 하면서 내가 갈고닦았던 기술이 천한 직장을 얻는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 훈련 덕에 현재 내 직장 업무가 누워서 떡 먹기가 됐다.
중학교 1학년 때 학교에서 영어를 처음 배우며 영어와 사랑에 빠졌다. 그래서 난 영어 교사가 되는 것이 내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난 십여 년간 영어 교사로 지내며 난 항상 우울했다. 교사를 그만두고 미국 공무원이 되면서 처음으로 출근 아침이 두렵지 않았다. 여전히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은 피곤하고 힘들지만 출근하는 마음은 언제나 가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