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를 할 때 퇴근은 퇴근이 아니었다. 다음 날 수업 준비를 하느라 밤늦게까지 머리 쥐어짜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래서 학교를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하면 상황이 달라질 줄 알았다. 퇴근하면 다음 날 출근할 때까지 출근 걱정 없이 오롯이 나만의 시간을 보내며 스트레스 없는 시간을 보낼 줄 알았다.
엄청난 착각이었다.
무슨 직장을 다니든지 퇴근 후 시간은 전적으로 내 의지에 따른다는 것을 난 전혀 몰랐다. 일이 끝남과 동시에 일 생각은 우주 밖으로 날려버리고 퇴근 후에는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며 시간을 보내기로 다짐하고 또 다짐하고 행동으로 실천해야 한다. 이런 다짐과 행동 없이는 하루 24시간 계속 일에 시달린다.
무엇보다도 집에 오면 사무실에서 있었던 모든 일들이 한꺼번에 내 마음속에서 요동친다.
'제이슨은 왜 내가 질문하면 짜증부터 내는 거지?'
'질문하지 말고 그냥 내가 다 알아서 해야 하나 보다.'
'아까 모임에서 그 사람이 했던 말, 나한테 한 말 같아. '
'사람들이 나한테는 관심이 없어. 벨라랑 리암한테는 얘기도 잘하면서 왜 나한테는 말이 없어?'
이것저것 사소하고 큰 일로 회사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사무실을 나오며 사무실에 버려두지 못하고 꾸역꾸역 챙겨서 집에까지 질질 끌고 온다. 그러면 난 집에서 남편 말 하나하나에 꼬투리를 잡고 격노한다.
"나 상사한테 질문했는데 막 짜증부터 내는 거 있지."
"아마 상사가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이어서 그랬을 거야. 너한테 찌증 낸 게 아닐 수 있어."
"그래. 그래서 병가를 낸 거니 그건 이해돼."
"너 뭐라고 물어봤는데?"
"지금 내가 한 질문이 잘못됐다는 거야??"
"아니, 네가 질문할 때 뭔가 네가 도와줄 것이 없냐는 식으로 물어봤냐는 거지."
짜증부터 낸 상사한테 받은 나의 상처를 감싸주고 같이 아파해 주기보다 내 인간관계 기술을 문제시하며 해결책을 제시해 주려는 남편이 너무 미웠다.
결국 난 저녁을 굶고 남편은 혼자 저녁을 해 먹었다. 저녁 식사를 끝내고 방으로 들어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가슴에서 열불을 토하고 있는 나에게 남편은 말없이 다가와 내 다리를 마사지한다. 나도 말없이 다리를 남편 손아귀에서 화살처럼 빼낸다. 하지만 힘은 남편이 더 세기에 결국 남편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마사지를 계속한다.
남편 마사지에 돌처럼 굳었던 내 마음도 어느새 떡처럼 부드러워진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며 사무실에서 좌불안석했던 내 마음을 털어놓는다.
"사무실 사람들이 나한테는 무관심해. 벨라하고 리암한테는 말도 잘 걸지만 나한테는 말도 안 걸어. 그리고 항상 나한테 인사를 하고 퇴근했던 벨라도 오늘은 인사도 안 하고 퇴근해 버렸어. 그리고 벨라 말이랑 행동이 평소 하고는 너무 달라. 나하고 말하고 싶지 않은 기색이 너무 확연했어."
"다른 사람 마음을 읽는 건 참 어려워. 벨라가 그렇게 행동한 건 너 때문이 아닐 수도 있어. 나도 회사에서 사람들이 나만 빼고 이야기할 때 걱정돼. 너만 그런 거 아니야. 나 전번에 출장 갔을 때 있었던 일인데, 한 여직원이 내가 가까이 가면 나를 멀리 피해서 도망가는 거야. 그래서 난 내가 문제인 줄 알았지. 그런데 알고 보니 임신 초기라서 다른 사람에게 입덧을 하고 싶지 않아 그랬던 거란 걸 며칠 후에야 알게 됐어."
나에게 말을 안 했지만 남편도 나와 똑같은 문제로 회사에서 고민을 하고 마음이 상했던 것이다. 하지만 밴댕이 소갈덱이처럼 좁은 내 마음과 달리 태평양 같은 마음을 가진 남편은 회사 사람들의 행동 때문에 울 필요는 없었다.
내 인생 40년 처음으로 시작한 사무직이라 사무직 문화에 적응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것도 한국이 아닌 미국에서 말이다.
"나랑 같이 입사했다가 그만둔 잭이라는 남자 기억해? 잭은 바로 내 옆자리에 앉았는데, 난 잭이 나만 싫어하는 줄 알았어. 그런데 알고 보니까 잭이 사무실 사람들 전부 다 싫어했더라고."
아직은 일 스트레스를 받기보다는 관계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가 더 크다. 굴러온 돌이 낯선 땅에 박혀 제자리를 잡을 때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빨리 이끼도 끼고 죽은 나뭇잎과 가지가 수북이 쌓여 주변 환경에 묻혀 튀지 않는 존재가 되고 싶지만 그러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나도 모르게 사무실 사람 모두에게 좋은 인상을 주고 싶다는 생각을 너무 깊게 했나 보다. 때로는 발로 치이기도 하고 때로는 따스한 손길도 받아야 나한테 딱 좋은 위치를 찾을 수 있는 것인데 말이다.
어릴 때부터 쓴맛을 무척 싫어했다. 내 인생의 고통을 견딜 수 없어 태어나지 않는 아기를 부러워했다. 그래서 The Giver (기억 전달자: 로이스 로이)라는 책을 처음 읽었을 때 이야기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고통 없는 세상이 불행한 세상이라는 주제가 말이 안 됐다. 고통과 슬픔은 피해야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기쁨과 함께 누려야 한다는 규칙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희. 로. 애. 락
기쁠 땐 슬플 때를 기억하고, 슬플 때는 기쁠 때를 기억하는 게 인생을 살아가는 법칙이다. 영원한 삶이 천당과 지옥 두 길로 갈라지기 전까지 이 지구상에서의 삶은 천당과 지옥 짬뽕이 될 수밖에 없다. 짬뽕은 골라 먹지 말고 마구 다 먹어야 맛있다. 인생도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