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계속 한 부분만 연습했더니 멀미가 나는 거 같아요.”
“쉬었다 해! 그래서 개인 악기 하는 사람들이 힘든 거야. 악보 마디마디를 쪼개서 음표 하나하나에 색을 입히고 숨을 넣어야 하니까.”
이런 과정들이 반복되면서 지치고 멍해진다.
“쉬었다 하자!”
말이 끝나기 무섭게 플릇을 내려놓고 다시는 일어날 가망 없는 고인에게 머리까지 흰 천을 씌우듯 악기 위에 보호 융을 공손히 덮어둔다.
지원이는 오늘 새로운 곡을 받아 연습 중이다.
다른 학생들 세 명이 레슨을 받고 돌아갈 때까지 반나절이 지나도록 악보를 익히고 있다.
“선생님! 이럴 때 너무 쓸쓸해요. 혼자 연습실에서 하루 종일…”
“하고 싶어도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나는 안 하니만 못한 소리를 했고, 바로 측은한 마음이 들어 미안했다.
“지원아! 나와봐.” 김치냉장고에 있는 맥주는 정말 기절할 정도로 시원했다. 안주는 프링글스. 아이는 깜짝 놀란 듯했지만 이미 신난 얼굴이었다. “선생님! 음주연습 해도 괜찮아요?” “음주운전도 아닌데 뭘!”
“그 대신 비밀이야!” 새침데기 악기와의 사랑이 얼마나 쓸쓸하고 맥 빠지는 일인지 너무나 잘 아는 나는 지원이를 위로할 다른 방법을 찾지 못했다. 나에겐 익숙한 일이 아니었다.
외롭고 쓸쓸한 마음이 깊어져야 사람을 움직일 수 있는 음악이 나오는 거라고 어느 백발의 교수님은 제자들을 모아놓고 ‘그것도 방법이라고!’ 강의하셨다. 그 강의를 듣는 순간 나는 ‘할 말이 저렇게 없는데 강의를 왜 하는 거지? 하나마나한 소리!’ 그땐 그렇게 생각했지만 나 역시 특별한 방법이 없는, 이제 습관이 된 쓸쓸하고 고독한 이 외사랑을 멈출 재간이 없다.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과의 불타는 마음도 6개월 이상 지나면 호르몬의 작용이 멈춘다는데 홀로 작은 연습실에서 비슷비슷한 음들과 몇 시간씩 씨름을 하다 보면 길은 두 가지로 나뉜다.
모든 걸 깨닫고 공중 부양을 하던가, 점점 편협해져서 얇고 납작한 카페의 빨대가 되던가.
매일 단단하고 맑은 소리를 내라고 가르쳤다. 발레 선생님이 “표정, 표정!”하며 웃으라고 다그치고, 힘든 티 내지 말라고 소리치는 것처럼 나 역시 비슷했다.
아이들에게 섣부른 위안을 주기보다는 좋은 시험 성적을 내주고 싶었던 나는 처음으로 지원이에게 위로의 캔맥주를 내밀었다.
“소리가 흐트러지면 어쩌죠?”
“매일 최상의 소리를 낼 필요는 없어. 좀 흐릿해도 돼!”
지원이의 얼굴에 의심반 즐거움 반의 미소가 스민다.
학생들에게는 그렇게 릴렉스를 외치면서 그들의 쓸쓸한 마음에 맥주 한 잔 타 주는 걸 못했던 옹졸한 선생이 바로 나다. 날도 흐린데 오늘은 지원이와 음악 이야기가 아닌 다른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남자친구랑은 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