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 가사노동자의 불안
그런 날들이 있다. 못돼 쳐 먹게 생긴 사마귀의 뒷다리라도 붙잡고 울고 싶은 날들. 오늘이 어제 같아 힘들고 내일이 오늘 같을까 두려운 시간들. 명확한 실체가 없는 두려움이 이 두려움에 무게를 더해 나는 쇄골께로 겨우 숨을 쉬며 오늘의 해야 할 일을 해 나간다. 밥을 하고 청소기를 돌리고 빨래를 한다. 한낱 주부가 별 하는 일 없이 힘들어하고 있다는 나 자신의 목소리에 주눅 들어 스스로에게 조차도 내가 왜 두려운지 뭘 두려워하고 있는지 묻지 못하고 있다.
스스로도 하는 일 없다 여기는 대부분의 가사 노동은 끊임없이 반복되며 넘어야 하는 파도처럼 밀려든다. 이 밀려드는 파도를 넘고 넘어도 앞으로는 나아가지 못하고 내내 제자리 뛰기인 모양새가 가사노동자들을 더욱 지치게 한다. 나는 왜 물질적 대가도 없고 휴가도 승진도 없는 이 자선사업 같은 노동을 택했는가? 투쟁으로 그 모든 혜택을 정정당당히 받아내는 주부들도 있다. 하지만 새벽 5시에 출근해 저녁 7시가 넘어 들어오고, 휴가도 가족을 위해 시간을 보내며, 날 대신해 꼬박꼬박 승진도 잘하고 있는 남편과 투쟁할 마음이 나는 없다. 남편의 양보와 희생으로 내가 무엇인가를 얻어내어 사라질 두려움이 아니라는 것쯤은 그 두려움의 실체가 보이지 않더라도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 자선사업을 당장 때려치우고 할 수 있는 일이 딱히 있는 것도 아니다.
두려움의 실체를 나는 정말 모르는 걸까? 실체를 알지만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 또한 알고 있어서 혹시 내가 나를 속이고 있는 것일까? 너무 비겁해 보이지만 그런 것 같다. 이 자선사업을 당장 때려치우고 할 수 있는 일이 딱히 없다는 사실은 내가 나 스스로 벌어먹고 살 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우리의 생계를 책임지는 남편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난 어떻게 우리 가족을, 아니 이 몸 하나 만이라도 건사할 수 있을까? 결국 이 두려움은 인간으로 태어나 스스로를 책임지지 못하는 무능인 것이다. 곧 오십인데 무능이니 이 무능을 벗어날 방법은 점점 더 찾기 어려워지고 있다. 차려놓은 회사로 겨우 용돈벌이를 하고 있지만 그 돈으로 생계를 책임지기는 힘들겠다 싶어 지니 해 본 자의 두려움까지 더해지고 있다.
이런 거지 같은 기분을 친구들과의 수다로 풀기에는 지리적 악조건이 있고, 술을 퍼 마시기에는 신체적 약점이 있다. 그저 모두가 잠든 밤, 부신 눈을 비비며 핸드폰으로 영화 한 편 보는 게 그나마 이 두려움을 멀리 둘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다. 미야자키하야오의 영화를 보던 시절의 내가 그리워 어제는 넷플릭스에서 '반딧불이의 묘'를 보았다. 그저 몇 번 들어본 적 있는 제목에 내가 보지 않았던 영화라는 이유로 나는 플레이버튼을 눌렀다. 잘못 눌렀다. 동생을 굶겨 죽인 오빠의 이야기였다. 내 두려움에, 그 무능력했던 오빠의 두려움에, 엄마 없이 배고픔에 지쳐 죽어가던 여동생의 두려움까지 더해져 몸을 덜덜 떨며 영화를 보았다. 진짜 무서웠다.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열네댓 살 남짓의 남자아이는 자신도 자신의 여동생도 지키지 못했다. 무기력과 우울 속에서도 나름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지켜내지 못할지도 모르는 것들이 떠올라 이 지브리 영화가 내게는 공포영화처럼 다가왔다.
아침에 눈을 뜨면 내가 먼지처럼 작아져 어디 벽 틈새로 내려앉아 그대로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되도록이면 웃는 얼굴로 아이를 깨우러 간다. 죽을 생각은 없지만 어떻게 하면 죽을 수 있을지에 대해 상상해 보며 집안을 말끔히 정리해 놓는다. (사 본 적도 없는 로또에 당첨되면 그 돈으로 뭘 할까 라는 상상과 비슷하다.) 요리를 하거나 샤워를 하는 동안에도 갑자기 찾아오는 두려움에 압도되지 않기 위해 무선 이어폰으로 팟캐스트를 항상 듣는다. 이 두려움에 짓눌려 내가 터져버리면 나의 일상뿐만 아니라 남편과 아이의 일상까지 무너져버릴 테고 그럼 나의 마지막 효용마저도 사라져 버리는 사태만은 막아야 한다. 지난달부터 하루에 독일어 두세 문장 정도를 단어장에 적어 주머니에 넣어 둔다. 두려운 마음이 찾아오면 부정적인 생각들이 미친 듯이 튀어나오고 가지에 가지를 뻗어 결국은 스스로 '이거 돌았구만...!'이라고 외치는 지경까지 가게 된다. 그때를 대비해 생각을 차단하기 위해 실내복 바지와 후디 심지어 앞치마 등등 주머니란 주머니마다 단어장카드를 넣어 둔다. 미미한 효과가 있다.
오늘 아이를 데리고 체조를 가는 길에 한 무리의 초등학교 남자아이들이 내 옆을 지나가며 '니하오'를 외쳤다. 종종 있는 일이다. 동양인을 비하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난 이제껏 이런 아이들을 무시로 일관했었다. 하지만 이렇게 불안과 공포가 찰랑찰랑한 삶을 가까스로 버티고 있는 날 비하하는 그 아이들을 오늘은 그냥 보낼 수 없었다. 그래서 뭐 대단한 걸 했냐고? 그 아이들을 계속 째려보다가 난 내 인생 최초로 오른손 중지를 펼쳐 그 아이들에게... 뻑큐를 날렸다. 곧 반백에 뻑큐라니 오늘 참 큰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