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방암을 극복하는 30대의 어느 여자 이야기
우리 부모님의 가방끈은 그리 길지 않다. 끼는 타고나는 것이 듯 본래 지능도 부모의 지능을 물려받는 타고 난 영역이라고 어디선가 본 적 있다. 애초 난 판사 같은 직업은 될 수 없던 것이다. 게다가 후천적인 노력으로 공부에 미칠만한 열정도 없었거니와.
그렇다고 자신이 배우지 못한 것을 자식에게 투영해서 열과 성을 다해 공부하라 쪼아대는 부모님도 아니었다. 공부를 강요한 적 없기 때문이다. 남자는 돈을 벌어오고 여자는 가사를 도맡는 게 당연했던 시대에 자녀의 교육 또한 엄마들 담당이었다.
그러나 기억 속 우리 엄마는 학업에 있어 잔소리 한번 하지 않았다. 사실 공부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일상에서 잔소리하지 않는 엄마였다. 자식의 의견을 존중했다.
어릴 때 많은 학원을 다니지 않았지만, 초등학교 저학년 때 엄마가 피아노 학원과 영어 교습소를 다녀보지 않겠느냐고 넌지시 했던 말이 어슴푸레 떠오른다. 영어야 그렇다 쳐도 피아노는 의외였다. 아마도 남자애들은 태권도, 여자애들은 피아노를 보내는 게 엄마들 사이에서의 공식 루트였던 것 같다.
엄마는 피아노를 어느 정도 배워두면 음악 시간에 도움이 된다고 했다. 언니가 피아노 학원을 오래 재밌게 다니길래 엄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2-3년 배우다가 피아노 학원 다니기 싫다고 했다. 엄마는 바로 그만두라고 했다.
어느 날 커서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엄마는 왜 우리한테 이래라저래라 하질 않아?'
그럼 엄마는 특유의 웃음소리와 함께 호탕하게 대답했다.
'본인이 알아서 하는 거지. 억지로 시킨다고 그게 된다니?'
나는 어릴 때부터 엄마에게 손 편지를 자주 썼다. 어린아이답게 뻔한데 진심인 말을 늘어뜨렸다.
'엄마, 내가 커서 효도할게, 엄마 정말 많이 사랑해.'
성인이 되어서도 항상 희생만 하고 사는 엄마가 안쓰러워 전할 수 있는 거라고는 편지밖에 없어서 종종 써서 드렸다.
'엄마, 내가 취업만 하면 엄마 여행 많이 보내줄게.
조금만 기다려줘'
아빠로 인해 얽매이며 살기는 했어도 달리 생각해보면 별다른 터치를 크게 하지 않았기에 내가 하고 싶은 일, 하기 싫은 일을 구분하며 일부는 내 뜻대로 하며 살기도 했다.
공부는 완전 하위도, 상위도 아닌 어중간한 순위를 유지했다. 그래서 스스로 공부의 한계를 느꼈지만 티를 내거나 하지 않았다. 엄마의 눈에 나는 학원비를 크게 쓰지 않지만 그럭저럭 성적을 받아오는 자식으로 자랑스러워했다. 직접 내게 자랑스럽다 표현한 것은 아니다. 다만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어떤 순간이든 스스로 헤쳐 나가는 딸을 대견스러워했다.
엄마랑 오늘 있었던 이야기를 조잘조잘 대며 세 명의 자식 중에 나와 가장 친구처럼 지냈다. 엄마를 기쁘게 하는 일이 곧 내게도 행복을 선사하는 것이라 여겼다. 나의 기쁨보다 부모의 기쁨을 우선했다.
그러나 내가 아프고 나서 절대 생기지 않을 것 같던 엄마와 나 사이에도 균열이 생겼다. 암을 진단받고 혼란스럽고 정신없고 모든 말들이 서운하게 들릴 때였다. 병원에 있으며 엄마와 주고받는 메시지가 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지금 무엇을 바라고 걱정하는지 묻지 않고 엄마의 슬픈 감정만 토로하는 것 같았다. 삼십 년 인생 처음으로 엄마가 행했던 교육 방식에 회의를 느꼈다.
피아노 학원 다니기 싫다 말하면,
왜 다니기 싫은지 이유를 물어봐주길 바랬다.
편지 열 통 쓰면 한 번쯤 답장의 편지가 오길 바랬다.
엄마의 적극적인 표현을 기대했다는 것을 시간이 지나서 깨달았다. 우리 엄마의 성향은 묵묵한 그런 성향이니까, 굳이 사랑을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마음으로 알았지만
아프니 별것 아닌 말에도 계속해서 엄마한테 가시가 돋쳤다. 짜증은 짜증을 더하며 늘었다. 결국 항암 2차 중에 엄마에게 서운함을 토했다.
엄마는 미안하다고 말했다.
'너만 생각하면 가슴 한쪽이 미어지는데 너의 맘 다 헤아리지 못해 더더욱 미안하구나.'
엄마의 사과를 들으려고 말한 것은 아니었다. 그 순간 내 마음이 한없이 못나 보였다. 다시 나의 탓으로 돌리는 현실에 마음이 불편했지만 그럼에도 아이러니하게 엄마에게 서운함을 말하고 나서 섭섭한 마음과 짜증은 사라졌다. 항암 치료받던 몇 개월의 시간이 흐른 뒤에서야 엄마가 보이기 시작했다.
남편이랑 병원 왔다 갔다 하느라 아이는 친정에 둔 지 한 달 정도 되어갔을 무렵, 남동생이 동영상 하나를 보냈다. 엄마가 손녀한테 동화책을 읽어준다. 백내장이 있어 눈을 찡그리면서 손녀에게 색깔을 가리킨다.
‘이건 빨강~ 저건 파랑이야’ 하면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직 시집 장가 못 간 자식 두 명이 집에 있기에 삼시 세끼 차리랴, 아빠의 짜증을 받아주랴, 내 아픔 걱정하랴, 손녀 케어하랴.
엄마의 젊음이 저문 지 오래지만 우리를 대하는 방식은 여전히 변함없이 순수하며 깨끗하다. 난 이제 알았다. 엄마도 할머니에게 표현방식을 배우지 못했다는 것을. 그것이 다시 나에게까지 온 것일 뿐. 엄마는 잘못이 없다. 엄마가 묵묵히 우리 곁을 지키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임을 이제는 알겠다.
엄마와 커피 한잔을 음미하던 어느 날 엄마에게 또 물어보았다.
'엄마. 엄마는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무얼 하고 싶어?'
엄마는 잠시 고민하다 말한다.
'공부하고 싶어.'
그 말에 나는 또 묻는다.
'엄마는 결혼하지 말걸 하고 후회해?'
아니라고 고개를 절래 흔들며 말한다.
'그럼 너희들이 없잖아. 내가 못 배웠으니 너네들만큼은 대학 등록금 마련해주는 게 꿈이었어.'
본인의 부족한 배움을 그저 자식 대학교 등록금까지는 무조건 마련하는 게 꿈이었다고 말하는 나의 엄마!
그래서 당신 인생을 자식에게 바친 게 어떤 때는 부담스럽기도 했다. 엄마는 답답할 때 산 공기에 자신의 감정을 푸는 게 유일한 해소였다. 할 수만 있다면! 이번 연도 엄마랑 한라산 등반을 꼭 해보고 싶다.
이곳저곳 어딘가 먹먹하다. 아픈 불효자는 웁니다.
‘이겨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