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진료에서 종양내과 교수는 그동안 내 치료 기록을 살펴보다가 말했다.
'임상 연구 관련해서는 별도로 연락 갈 거예요.'
진료를 마치고 돌아오는 차 안,
휴대폰 볼륨 상태를 진동에서 벨소리로 변경했다.
삼중음성 유방암 임상 연구와 관련해서 유선으로 전달되니 스팸 전화로 오해일랑 말고 받아줄 것을 신신당부한 간호사의 말이 불현듯 생각났다. 전화를 놓칠세라 미리 볼륨을 바꿔놓은 것이다.
연구라... 내게 연구란 통계집에서나 볼법하며 조금 있어 보이는 단어 같은 것이었다. 길고 짧은 막대그래프가 들쭉날쭉하게 나열되고 하단 문구에 조그마한 글씨로
"00년도 연구 통계 참고" 이렇게 써져있는 것만 봐왔다.
그러한 연구가 선행되기 위해서는 임상 단계를 거치는 것은 필수다. 내가 그런 연구 대상 군에 해당한다는 의료 과학적 사실이 생경했다.
아침부터 전화벨이 울렸다. 평소 같았으면 02-xxx으로 시작하는 번호는 종료 빨간 버튼에 먼저 손이 갔을 텐데 그날만큼은 받아야 했다.
‘안녕하세요. 너다움 나다움님이시죠?’
나긋나긋한 톤으로 여성 연구원이 말했다. 임상 연구 관련해 설명을 들으러 병원에 오는 것은 어려우냐는 물음에 거리적으로 부담스럽다고 했다. 우선 유선으로 간단하게 설명해주기로 했다.
요약하자면, 임상 연구에 참여하고 싶다고 해서 모두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대상 조건에 모두 부합해야 한다.
<1차 통과 조건>
수술에서 떼어낸 조직 샘플을 해외로 보내 요건이 충족되어야 하는데, 암의 악성도가 점수로 15점 이상이 나와야 함.
<2차 통과 조건>
CT 검사를 통해 다시 한번 타 장기 전이가 없음을 재차 확인함. 즉, 유방암 4기는 참여 불가.
1,2차가 통과되어 연구 대상으로 선정되면 컴퓨터에서 무작위 시스템에 의해 실험군(연구 약 투약 집단)과 대조군(연구 약 비 투약 집단) 중 하나로 배정된다.
약에 대한 설명도 이어졌다. 임상으로 연구되고 있는 약은 면역을 보강하는 약물 투여다. 쉽게 말해 코로나 백신처럼 나쁜 것을 쳐내는 방어막 같은 맥락이다. 젤로다 항암제와 그 면역 약물을 동시 복용할 경우 어떤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지 추이를 지켜보는 연구다. 아무래도 항암 중에 온갖 부작용에 시달린다. 항암이 끝나도 여전히 신체 기능은 많이 저하되어 있으므로 그 면역 약으로 좋은 시너지를 내기 위한 실험인 듯했다.
연구 중에 호중구(우리 몸의 면역계) 수치가 떨어질 리는 없지만 다른 장기, 예를 들면 췌장 수치를 높이는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했다. 추후 발생할 부작용은 케이스 바이 케이스! 어떤 약이든 내 몸과 맞느냐 하는 것은 해보기 전까지 누구도 알 수 없는 문제다.
또한 실험군으로 선정될 경우 총 21회 주사를 맞으러 병원에 가야 한다. 반면에 대조군에 해당이 된다면 현재 먹고 있는 젤로다 항암제만 복용하되 피검사만 하러 병원을 추가적으로 방문해야 한다. 이래나 저래나 어떤 대상이 되어도 병원을 방문해야 하는 횟수가 증가하는 셈이다.
바로 답을 내릴 수 없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전했다. 보호자와 충분히 상의하고 연락을 달라는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어떤 쪽을 택해야 최대한 덜 후회가 될지, 기회비용을 낳는 선택이란 문제는 항상 어렵기만 하다. 내게 도움이 되느냐 마느냐 하는 개인적인 문제부터 나와 같은 유방암 3기 병기를 가진 미래 환자를 위한 발전적인 상황을 두고 딜레마에 빠지기도 했다.
내가 뭐라고!
기껏해야 참여자일 뿐인데도 엄청 대단한 걸 하는 것처럼 거창한 생각까지 했다. 그래도 단순히 생각하고 넘길 문제는 아니었다. 내가 지금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쓰는 이 항암제도 누군가는 충분한 생각을 거쳐 신중한 결정을 내렸을 테니까. 보이지 않지만 그들의 희생 덕분에 나의 생존율을 높일 수 있게 된 거니까.
한 가지 알아두어야 할 것은 참여 의사를 밝히고 연구 대상까지 확정된다면 되도록 철회는 없어야 한다고 했다.
언제든 자발적인 의사에 의해 참여를 철회할 수는 있다. 그러나 만약에 하지 않겠다고 하면 연구의 방향성이 흐트러져 다른 결괏값을 초래할 수 있기에 '되도록 신중하게'라는 전제가 붙었다. 또한, 다른 대상자의 참여 권리까지 빼앗는 일이 되는 까닭이다.
나는 어느 쪽에 마음이 더 기울어져 있는 것일까? 병원을 오고 가는 수고로움까지 충분히 감내할 수 있을까?
현재 최선의 선택을 하여 차후 최고의 결과를 품에 안고 싶다는 욕심이 일렁여 며칠을 깊이 번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