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소개합니다]02. VOID - 강지이
재료와 공간, 나무 사이를 걷는 시인
VOID
- 강지이 -
네가 준 편지 안은
항상 이렇다
한해, 한해
어떻게든,
아무쪼록
잘 살자.
잘 살아가보자.
이 안에 들어오면 항상
이렇게 희고
이렇게 어둡고
이렇게 문이 없는 방이 많고
발밑에서 그리고
나의 머리 위에서
복도 끝과 끝
문과 문 사이 사이로
사이
사이로
문과
문
네 잉크가 묻은 여우별들이 물속에 잠겨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있어
내 머리를 쓰다듬는구나
내 속눈썹에 너의 잉크가 살짝 얹혀진다
나는수평으로함께잠겨보려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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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시집 <수평으로 함께 잠겨보려고>에 실린 'VOID'라는 시다. 시집을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정말 마음에 들었던 시들이 많아서 어떤 시를 소개할까 고민되었는데, 시인의 강점을 잘 보여주면서도, 시인이 가장 보여주고 싶었을 시를 고르게 되었다. 한 시에 횟집을 하던 할머니를 회상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네모난 수족관을 담아내듯이 공간을 만들고, 물과 바람의 물성이 느껴지는 시가 많았던 것 같다.
시집에서 유일하게 한번 언급된 지명이 내 고향인데, 아마 시인은 그곳에 살고 있지 않을지. 그래서인가 표현된 내용들이 더 마음에 울림이 있었던 것 같다. 더불어 내 안에서도 공감각이 살아나는 느낌에 읽는 내내 행복했었다.
VOID를 읽고 당신은 무엇을 느꼈는가. 나는 자꾸만 닫히려고 하는 내 세계에 '아무쪼록 잘 살아보자'고 말하는 상대로 인해, 사이 사이로 문이 생기고 '당신의 잉크 묻은 여우별들이/자유롭게 날아다니'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서 '나'는 물속에서 (수직이 아닌) 수평으로 잠기는 것이 위로가 된 것 같다. 열릴 수도 있고 닫힐 수도 있는 문을 그려주고, 낙하하지도 비상해야하지도 않는, 수평으로 여우별과 잠기게 해주는 몇 글자 되지 않는 당신의 편지를, 나는 이 시에서 함께 받았다.
이 시집 만큼은 선물하기보다 그저 곁에 두고 이따금 꺼내 읽고 싶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