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했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표지 그림: 구스타브 카유보트, <오르막길>, 1881.
때론 눈물도 흐르겠지
그리움으로
때론 가슴도 저리겠지
외로움으로
그대를 사랑했지만
그저 이렇게 멀리서 바라볼 뿐
다가설 수 없어
지친 그대 곁에 머물고 싶지만
떠날 수밖에
그대를 사랑했지만
- 김길중 작사, 작곡. 김광석 노래 <사랑했지만> 가사 중에서
가수 '김광석'의 노래는 언제 들어도 낯선 거리감이 없다. 그의 목소리에는 지나간 계절의 향기가 묻어 있고, 그리움은 언제나 현재형으로 되살아난다. 특히 이 노래 <사랑했지만>을 들을 때면 내 마음 한쪽의 오래된 편지가 천천히 펼쳐진다.
얼마 전 유튜브를 통해 '사랑했지만'의 노래를 검색하다가 K방송사 프로그램 "불후의 명곡"에서 가수 '김기태'가 부른 영상을 보게 되었다. 평소 그의 가창력과 노래에 대한 진정성에 감복한 나는 자주 그의 노래모음을 듣곤 했다.
그날 무대에서 김기태는 의자에 걸터앉아, 힘을 빼고 말하듯 노래했다. 간주 중의 하모니카 연주는 김광석에게 바치는 오마주처럼 울렸다. 그러다 후반부, 갑자기 스크린에 김광석의 영상이 떠오르며 두 사람이 한 무대에서 함께 노래하는 듯한 순간—관객의 시간은 멈췄다.
지금 여기의 김기태와, 기억 속의 김광석이 한 무대 위에서 서로를 향해 노래하는 듯했다. 관객 모두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나도 격한 감정이 올라왔다. 단지 음악이 아름다워서만이 아니었다. 이제는 닿을 수 없다고 단정했던 누군가와, 다시 연결되는 그 느낌 때문이었다.
죽음조차 가를 수 없는 한 예술가의 노래처럼, 우리 삶에서도 그렇게 잊을 수 없는 인연들이 있다. 살다 보면 헤어짐은 늘 뜻밖에 찾아온다. 어떤 이별은 예고도 없이 스며들고, 어떤 만남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지나간다.
그때는 그것이 가장 현명한 선택이라고 믿었지만 세월이 흘러 다시 그 순간을 떠올리면 문득 알 수 없는 공허함이 마음을 덮는다. 그 시절 함께 걸었던 사람들, 그들의 웃음과 눈빛, 그때의 온도. 그 모든 것은 흩어진 기억의 파편이 아니라 여전히 내 안에서 작게 숨 쉬는 생명 같다.
어쩌면 우리는 떠나보낸 인연들 속에서 조금씩 자신을 완성해 가는지도 모른다. 이제 50에 접어든 나에게, 그리움은 슬픔이 아니라 하나의 풍경이 되었다. 가끔 그 풍경을 멀리서 바라보며 묻는다.
“그 사람은 지금 어디쯤을 걷고 있을까.”
“그때 내가 했던 말은 너무 차갑지 않았을까.”
“지금의 나는 그때보다 나은 사람이 되었을까.”
그 질문들 속에서 후회와 미련은 서서히 가라앉고, 대신 따뜻한 응원의 마음이 피어난다. 서로 다른 길을 걸어가지만, 그 길 위의 모든 순간이 결국은 서로의 삶을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고 믿고 싶다.
'구스타브 카유보트'의 작품 〈오르막길〉을 처음 보았을 때도 나는 오래된 기억의 한 장면을 보는 듯했다. 햇살이 비스듬히 내리쬐는 언덕길 위, 두 인물이 느리게 걸음을 옮긴다. 그들의 뒷모습은 말없이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함께 걸어가지만, 어쩌면 곧 각자의 길로 나아갈지도 모른다. 그림의 공기는 고요하지만, 그 속엔 미묘한 이별의 기운이 감돈다. 빛은 따뜻하지만, 그 빛이 만들어내는 그림자는 길다.
‘인연이란 결국 이렇게 오르막길을 걷는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서로의 속도를 맞추기도 하고, 때로는 조금 앞서거나 뒤처지기도 하며, 그 모든 차이가 결국 삶의 풍경을 만든다.
이 그림이 내게 주는 감정은 슬픔이 아니라 온기 있는 거리감이다. 우리가 누군가와 멀어졌다고 느낄 때조차 그 거리는 단절이 아니라 여전히 마음속에서 이어지고 있는 보이지 않는 길일지도 모른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오르막길을 걷는다. 그 길 위에는 아쉬움도 있고, 미련도 있고, 가끔은 되돌아보고 싶은 풍경도 있다. 하지만 인생의 아름다움은 그 길이 오르막이라는 사실에 있다.
힘겹게 숨을 고르며 올라갈수록 그만큼 세상은 더 넓게 펼쳐지고, 지나온 길은 더 단단한 흔적으로 남는다. 그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사랑을 배워가고, 용서를 실천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묵묵히 이 길을 걷는다. 그리운 얼굴들을 마음속에 품고, 이따금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때 전하지 못한 말을 마음속으로 되뇐다.
“잘 지내고 있지? 그대가 행복하길 진심으로 바라고 있어.”
이제 사랑은 붙잡는 일이 아니라 조용히 응원하는 일이다. 그리움은 더 이상 눈물의 이름이 아니라, 내 삶을 비추는 조용한 등불이 되었다.
오르막길 끝에는 아직 보이지 않는 풍경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곳에 다다를 때쯤, 나는 비로소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사랑했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