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 그림: 폴 세잔, <카드 놀이하는 사람들>, 1895.
사랑할 때는 살기를 바라고
미워할 때는 죽기를 바라거늘,
살기를 바라놓고
또 죽기를 바라는 것.
그 변덕스러운 모순,
그것이 바로 [미혹]이다.
- tvN 토일드라마 <세작, 매혹된 자들> '진한대군(조정석 분)’이 ‘몽우(신세경 분)’에게 하는 말 중에서
사극 <세작, 매혹된 자들>은 2024년 tvN에서 방송된 창작 사극, 총 16부작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력과 정치라는 무거운 주제 속에, 복수와 사랑을 다루는 운명적인 스토리가 펼쳐진다.
높은 자리에 있지만 마음은 비천한 임금 <이인(조정석 분)>과 그를 무너뜨리기 위해 세작이 된 여인(신세경 분) 간의 서로 연모하면서도 가까이하기엔 위험한 운명을 그린 이야기이다.
남장을 한 '신세경'의 모습이 정말 매혹적이라 '조정석'이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특히 신세경의 눈물 연기에 너무 몰입되어 마치 내가 신세경과 마주 보며 가슴아픈 장면에 놓인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견디기 힘든 무거운 마음에 짓눌릴 때는 나도 모르게 화면을 끄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보는 내내 불안했던 내 가슴은 종반으로 갈수록 더욱 조여왔다. 마지막 편만 남았을 때에는 결말을 맞이하기 두려워서 한참을 미루었다. 내 마음은 두 사람이 모든 미혹을 이겨내고 진실을 볼 수 있게 되길 바랐다. 과연 연모하는 두 사람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있을까?
드라마 속에서 내뱉은 저 대사를 들었을 때 먹구름 속에서 떨어지는 번개를 맞은 듯 전율을 느꼈다. 그리고는 오래전부터 마음 한구석에 쌓여 있던 무거운 기억들과 맞닥뜨렸다.
몇 번을 다시 들으면서 그것들이 오랜 시간 동안 나를 괴롭혀 온 치명적인 독과 같은 것이란 걸 깨달았다. 내가 제거하려 할수록 내 영혼을 더욱 고사시키는 암덩어리들.
사실 나도 드라마 속 주인공들처럼 미혹 속에서 많은 것을 잃었다. 사랑에 눈이 멀어 연인을 붙잡으려다 오히려 헤어졌고, 잘못된 욕망에 사로잡혀 친구를 버렸으며, 그 흔들림이 주위 사람들에게 상처가 되기도 했다.
사랑하면 곁에 두고 싶고, 미워하면 멀리하고 싶다. 그러나 그 욕망의 방향은 언제나 한결같지 않다. 어느 순간 사랑은 집착이 되고, 어느 순간 미움은 다시 그리움으로 되돌아온다.
사람의 마음은 그렇게, 단단한 직선이 아니라 끊임없이 구부러지는 곡선이다. 그 곡선의 굴곡마다 드리워지는 그림자를, 우리는 <미혹>이라 부른다.
미혹은 단순히 눈이 가려진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너무 뚜렷하게 본 나머지 사로잡혀 버린 상태다. 욕망이 원하는 것을 눈앞에 두고 놓지 못하는 것, 혹은 그것을 잃은 뒤에도 잊지 못하고 끝없이 붙들고 있는 것. 그것이 미혹의 본질이다.
문제는 미혹이 언제 시작되고 끝나는지조차 쉽게 가늠할 수 없다는 데 있다. 마음의 흐름은 언제나 나보다 앞서가고, 내가 따라잡을 무렵에는 이미 다른 곳을 향해 흘러가 버린다.
‘미혹’이라는 단어는 어딘가 부끄럽다. 그 안에는 의지의 부족, 현혹당한 자의 나약함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인간이란 존재가 애초에 미혹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게 아닐까.
사랑할 때조차 우리는 상대를 온전히 사랑하기보다 나의 욕망을 비추는 거울로 삼곤 한다. 미워할 때조차 상대의 실체보다는 내 상처의 그림자를 투사한다. 그러니 사랑과 미움이 한 사람 안에서 쉽게 뒤섞이고, 바람과 파도처럼 순식간에 방향을 바꾼다.
어쩌면 인간의 삶 전체가 미혹의 연속인지도 모른다. 욕망은 늘 반대편의 결핍을 만들어내며, 그 결핍은 다시 새로운 욕망을 불러온다. 이 모순의 반복이 바로 인간의 일상이다.
나는 종종 나 자신에게 묻는다. “나는 정말 무엇을 원하는가?” 그러나 그 질문은 늘 공허한 메아리로 돌아온다. 내가 사랑했던 것, 미워했던 것, 집착했던 것들 중 얼마나 많은 것이 지금도 유효한가. 대부분은 이미 희미해졌다.
그렇다면 당시의 격렬한 감정은 무엇이었는가. 순간의 열망이 나를 지배했을 뿐, 그것이 나의 전부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들이 무의미했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그 속에서 길어 올릴 수 있는 것은 내 감정의 진실이 아니라, 감정에 휘둘렸던 나 자신의 '흔적'이다.
미혹은 결국 나를 비추는 거울이다. 그 앞에서 나는 한없이 왜소해지기도 하고, 때로는 비루한 모습을 마주하기도 한다.
사랑과 미움, 희망과 절망, 욕망과 좌절이 모두 한 사람 안에서 공존한다는 사실은 불편하다. 하지만 그 불편함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나는 끝내 나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미혹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내 안에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이다. 욕망이 나를 흔들고, 모순이 나를 잠식할 때, 나는 그 모든 움직임을 지켜볼 수 있다.
우리는 살아가며 끊임없이 길을 잃는다. 그러나 길을 잃는 그 과정 속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 있다. 미혹은 나를 흔들고 아프게 하지만, 동시에 그 흔들림 덕분에 나는 내 마음의 가장 깊은 곳을 엿볼 수 있다.
천만다행으로 드라마 <세작, 매혹된 자들>의 마지막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서로에 대한 믿음을 지켜 마침내 두 사람이 재회하면서 마무리되었다. 며칠간 아내 몰래 다른 여인에게 애간장이 달았던 내 마음은 흰구름처럼 붕 하늘로 떠올랐다.
우리는 세잔의 <카드 놀이하는 사람들> 속 인물들처럼 각자 고개를 떨군 채 무언가에 몰두하다가도, 결국은 같은 테이블 위에서 서로의 존재를 의식한다. 미혹도 그렇다. 혼자 빠져든 듯 보이지만, 결국은 삶과 관계의 맥락 속에서 드러나고 확인된다.
그렇게 생각하면, 미혹은 반드시 극복해야 할 존재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것은 나를 사람답게 만드는 조건이자, 내가 나 자신을 이해하게 만드는 기회다.
다만 그 속에서 길을 잃을 때마다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잠시 멈춰 확인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