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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현 Jul 19. 2022

책들의 꿈꾸는 여행(1)-하

빅뱅. 다중우주. 사피엔스. 일원론적 세계관. 지구

 - '책들의 꿈꾸는 여행(1)-상'에서 계속 -


 과학은 중세 이후 근대를 거치면서 기독교 교리의 불합리성을 폭로하며 인간의 이성과 자유를 되찾는 기회를 주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지동설’, 찰스 다윈의 ‘진화론’ 그리고 이어진 아이작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 등은 천년에 걸친 중세의 종교적 허위의 장막을 야심 차게 걷어 버렸다.

 

  계속된 과학적 성취 중 1905년 ‘기적의 해’를 만들어 낸 아인슈타인의 업적(브라운운동, 광양자 가설, 특수상대성이론, 질량-에너지 등가 원리)은 드디어 종교(신)를 대체할 절대 진리를 발견할 거라고 믿게 만들었다.


  그러나 빅뱅과 우주팽창설이 정설로 받아들여지면서 종교는 잠시 안도의 숨을 쉬는 모양새이다. 왜냐하면 불안이 해소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초월적인 신이 현실 세계에서 발견되지 않는다는 치명적인 문제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빅뱅 이론은 이러한 불안을 해소해 주었다. 신은 빅뱅 이전에 존재하며, 빅뱅을 일으킨 최초의 원인자로서 충분히 기능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가 했는데 최근의 과학적 성과는 이러한 종교의 안도감을 더 이상 허용하지는 않을 모양이다. 아무래도 우주는 시간적으로 빅뱅에 앞서 있고, 공간적으로 여러 우주와 중첩해서 존재하는 것 같다. 더구나 엄청난 격론과 반론 속에서 태어난 양자역학은 기존의 근대 과학과 상반된 결론을 도출하며 논란의 중심에 섰다.


  양자역학이 고약한(?) 이유는 우리의 「관찰 행위(‘슈뢰딩거의 고양이 실험’을 확인해 보라)」라는 변수를 핵심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뉴턴과 아인슈타인으로 대표되는 근대 과학의 생각으론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실제 실험의 결과는 양자역학의 손을 들어주었다. 납득이 안 된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어쩔 수 없다. 오늘날 우리는 양자역학 이외의 다른 가능성을 상상할 수가 없다.


  다만, 현재 기술로는 실험적 검증이 불가능에 가깝기에, 철학자가 사고하듯 특수한 상황을 전제로 그 양태를 사변적으로 여러 그림들이 제시되고 있다(스웨덴 출신 물리학자인 ‘맥스 테그마크’는 「다중 우주」에 관해 과학자들이 쓰는 다양한 의미를 종합해서 레벨 1부터 4까지 네 가지 모형으로 정리하였다).


  여전히, 우리의 의식이 어떻게 존재(입자)를 결정하는가? 우리의 의식이 어떻게 우주의 분화에 기여할 수 있다는 말인가? 하는 의문에 마땅한 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우주의 생성 기원과 우주론에 대한 근원적 질문이 생겨났지만 이에 대해서는 무수한 추측만 난무하고 있다.




  오히려 창세기의 말씀이 더 와닿는다는 생각은 나만의 착각일까? 내가 종교인이라 성경 말씀이 더 친숙히 다가온다고 고백해야겠다.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땅은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었는데,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물 위를 감돌고 있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겼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그 빛이 좋았다. 하느님께서는 빛과 어둠을 가르시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날이 지났다.

- 가톨릭성경, 「창세기」 1:1~5. -


  사실 이 문장에 대해서 2000여 년 동안 수많은 문헌학자와 신학자들이 나름대로 번역했고 지금도 다양한 해석과 번역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이제는 그에 더해서 과학자들도 같은 테이블에 앉아 각자의 고민을 털어놓고 서로에게 창의적인 조언을 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난 고대(창조) 신화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여기서도 다시 한번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되었다.


  반고는 거대한 달걀과 같은 암흑과 혼돈의 도가니 속에서 태어났는데, 1만 8천 년 동안 천지가 개벽하였다. 양(陽)의 맑음(淸)은 하늘이 되고, 음(陰)의 혼탁함(濁)은 땅이 되었다. (중략)

  무엇인가가 있어야만 생기가 돌 것 같아 황토를 한 움큼 파서 물과 반죽을 해서 어떤 형체를 만들어 땅에 내려놓았다. 살아서 움직였다.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이것이 곧 '사람'으로 신이 직접 창조했기 때문에 새나 짐승과는 달리 신의 모습을 닮았다. 여와는 계속하여 '남자'와 '여자'를 빚어냈는데 그들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여와를 둘러싸고 춤을 추며 노래하였다.(후략)

- 네이버 지식백과 참조 -


  흥미롭게도 중국의 반고(盤古)와 여와(女媧)의 신화는 「구약」의 창세기와 「길가메시 서사시」 혹은「그리스 신화」를 생각나게 한다. 성경의 ‘노아의 방주’ 같은 대홍수 신화도 전 세계 여러 민족에서 수십 개 버전으로 전해진다는 것이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고대 신화(기원전 18세기로 추정), 즉 고대 수메르 신화에서 나오는 ‘우트나피쉬팀’(‘대단히 똑똑한 사람’을 의미. 내용 중에서 ‘길가메시’를 만나 죽음에 대한 얘기를 나눈다)은 성경의 ‘노아’의 행적과 매우 비슷하다.


  다른 문명에서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쉽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4대 문명 중 황화 문명은 나머지 세 문명과 교류가 거의 없었다고 보는 게 일반적이다. 그것은 그들 사이에 위치한 히말라야 산맥과 타클라마칸 사막 때문이다.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신화가 실제 있었던 사실을 기록했다고 봐야 할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인간 자체가 세상의 탄생, 인류의 탄생, 자연재해(홍수), 농업의 시작 등 그 기원을 사유하는 방식이 구조적으로 유사하다고 생각하는 편이 적절하지 않을까?

  서구는 19세기 이후 경제적인 식민지 개척을 위해 정복하려는 문화와 사회 연구에 몰두한다. 학자들은 성서의 땅을 발굴하면서 이전까지는 그림으로만 알았던 메소포타미아 쐐기문자와 이집트의 성각 문자를 판독한다. 성서가 가장 오래된 책이며 신의 계시라고 신봉했던 서양은 고대 오리엔트 문명이, 고대 이스라엘보다 수천 년 앞선 선진 문명이라는 사실과 조우하게 되자 당황한다. 특히 고고학과 지질학의 등장으로 이스라엘 역사는 유일한 역사가 아닌 여러 역사의 하나로 전락한다.

- 배철현, 「신의 위대한 질문」, 21세기북스, 2017, pp. 422~423. -



  


  나는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듯 뭔가를, 내가 알지 못했던 뭔가를 더! 더! 더! 하며 찾았다. 어렸을 때 영화 ‘죠스(6미터 크기의 백상아리)’를 보고 경악했던 나는, 지금은 영화 ‘메가로돈(200만 년 전 멸종된 것으로 알려져 있음. 화석을 토대로 약 20여 미터 크기로 추정됨)’ 정도는 되어야 놀라는 시늉이라도 하려나. 그러다 정말 어마어마한 놈을 만났다.


  그 책은 나를 전율케 했고 <슬램덩크>보다 더 여러 번 보았다. 내용이 워낙 독창적이어서 볼 때마다 저자에 대해 존경심이 느껴지는 책이다. 그 책은 바로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였다.


  왜 사피엔스 종만이 지구 상에 살아남았나? 인간은 왜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동물이 되었는가? 과학은 모든 종교의 미래인가? 인간의 문명은 왜 발전하였고, 이런 발전은 우리에게 행복을 주었는가? 인간의 유효기간은 언제까지인가? 역사, 사회, 생물, 종교 등 학문의 경계를 넘나들며 인류 역사의 시간을 종횡무진 써 내려간 문명 항해기. 이제 우리는 무엇을 인간이라고 할 것인가.


  책 뒷장 커버 페이지에 적혀 있는 내용이다. 무척 도전적이지 않은가? 그렇지만 책을 읽다 보면 과연 명불허전이라는 말이 절로 나오게 된다.


  “아프리카에서 살던 별 볼일 없던 영장류 호모 사피엔스가 어떻게 이 행성을 지배하게 되었나?”라는 의문을 품고 여행은 시작된다. 인류의 수레바퀴를 추적하다 보니 다른 종과는 달리 ‘인지혁명’, ‘농업혁명’, ‘과학혁명’이라는 세 가지 혁명을 거치면서 지구의 지배자가 되었다고 말한다.


  먼저, 인지혁명은 한 마디로 오직 호모 사피엔스만이 허구를 믿고 그것을 공유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서로 모르는 수많은 인간이 공통의 신화를 믿게 되면서 대규모 무리가 같은 곳에 살게 되었다. 가상의 실재가 현실세계에서 실제적 힘을 발휘하게 되었다.


  둘째는 농업혁명이다. 250만 년 간 사피엔스는 스스로 자라고 번식한 동물을 사냥하고 식물을 채집하며 살았다. 그러다가 대략 1만 년 전에 인간은 몇몇 동물과 식물 종의 삶을 조작하는 데 모든 시간과 노력을 바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하라리’는 아주 냉소적인 지적을 한다.


  한때 학자들은 농업혁명이 인간성을 향한 위대한 도약이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두뇌의 힘을 연료로 하는 진보의 이야기를 지어냈다.     (중략)     이 이야기는 환상이다. (중략)     농부들은 대체로 수렵채집인들보다 더욱 힘들고 질병에 취약했으며 불만스럽게 살았다.      (중략)     그것은 누구의 책임이었을까? 왕이나 사제, 상인은 아니었다. 범인은 한 줌의 식물 종, 밀과 쌀과 감자였다. 이들 식물이 호모 사피엔스를 길들였지, 호모 사피엔스가 이들을 길들인 게 아니었다.      (중략)     그런 거래에 동의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농업혁명은 덫이었다.

-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 김영사, 2019, pp. 123-129. -


  수렵채집인들은 이동 생활에 적합하게 출산도 조절하면서 살아왔다. 그러다 약 18,000년 전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고 온난해지자 중동의 밀을 비롯한 곡물들이 증식하고 퍼져나갔다. 인간들은 밀을 점점 더 많이 먹기 시작했고 조금씩 농경을 시작하면서 정착 생활이 시작되었다. 식량이 증가하고 농경에 적응하기 위해 출산도 증가하면서 자연적으로 경작지 확대가 이루어졌다. 이는 정착 생활의 고착화와 삶의 패턴 변화(자유인에서 노예로)를 의미했다. 이런 식으로 계속된 악순환의 결과가 농업혁명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마지막으로 과학혁명. 서기 약 1,500여 년 까지 전 세계 인류는 자신에게 새로운 의학적, 군사적, 경제적 능력을 키울 수 있는지 고민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이미 주어진 기존의 가치(종교, 사상)들을 충실히 따르는 것이 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난 500여 년 동안, 인류는 과학연구에 투자하면 스스로의 능력을 증가시킬 수 있다는 것을 점차 믿게 되었다. 이것은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었다. 경험적으로 반복해서 증명된 사실이었다.


  과학은 근대 이전 전통 지식이었던 가치(종교)들에 대해 관찰과 수학을 중심으로 한 실증적 이론을 만들어냈다. 이런 과학지식은 이론을 창조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그것을 사용해서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고자 노력하였다. 특히 과학과 산업과 군사기술은 자본주의 체제와 산업혁명이 등장하면서 서로 얽히기 시작했고, 일단 그 관계가 정립되자 세상은 급속히 변했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실로 매우 도발적이고 비범한 논거라 아닐 수 없다.




  후편 <호모 데우스(Homo deus, 인간 신)>를 안 볼 수가 없었다.

 두 번째 책은 “우리의 오랜 신화들이 21세기 신기술(생명공학, IT기술)과 만날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저자에 따르면 인간은 근대 과학(과학혁명)을 통해 모든 의미와 권위의 원천이던 신(종교)의 죽음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대신 과학 발전과 경제성장을 통해 스스로 힘을 키웠다. 신이 빠져 버린 사회질서는 ‘인본주의’라는 혁명적인 새 종교가 나타나 인간의 힘을 무한히 추구하면서도 자신의 의미를 잃지 않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인간은 자기 종의 욕망(인본주의)에 따라 건강, 번영, 평화를 이전에 비해 현격히 발전하였고 이제 자연스럽게 인류의 궁극의 목표로 넘어가고 있다. 그건 바로 불멸, 행복, 신성(神性)이다.


  그 수단으로는 첫째로 게놈 변경을 통해 초인을 만드는 프로젝트인 ‘생명공학(유기체적 발전)’, 둘째로 인조인간을 만드는 ‘사이보그 공학(유기체와 비유기체의 조합)’, 끝으로 높은 지능의 비의식적 알고리즘의 인공지능인 ‘비유기체 합성(완전한 비유기체로 전환)이다.


  그러나 그렇게 태어난 호모 데우스는 역설적으로 인본주의가 숭배하는 인간의 자유의지 따위는 없음을 폭로할 것이고, 인간을 업그레이드하는 과정에서 인본주의 자체를 붕괴시킬 것이라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당신이 이 책을 덮은 뒤에도 이 질문들이 오랫동안 당신의 마음속에 남아 있었으면 좋겠다.
1. 유기체는 단지 알고리즘이고, 생명은 실제로 데이터 처리과정에 불과할까?
2. 지능과 의식 중에 무엇이 더 가치 있을까?
3. 의식은 없지만 지능이 매우 높은 알고리즘이 우리보다 우리 자신을 더 잘 알게 되면 사회, 정치, 일상에 어떤 일이 일어날까?

- 유발 하라리, 「호모 데우스」 , 김영사, 2019, p. 544. -


  이미 인간 자유의지의 존재를 의심케 하는 과학적 증거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기술적 인본주의’ 또는 ‘데이터 신’이라는 공상과학이 보여줄 인간의 미래에 대해 궁금하지 않은가? 더군다나 자신이 더 이상 인간이 아닌 하나의 데이터 칩으로 존재하게 될 수 있다는 가정에 그저 웃고만 있을 수 있을까? 그가 던진 질문에 우리는 깊이 성찰해야 할 것이다.

 



  내 관심사는 점점 현실 세계에서 벗어나 가상현실이나 공상과학 쪽으로 기울어져 갔다. 우리나라에서 유난히 폭발적으로 인기를 끈 영화 <인터스텔라>나 <그래비티>는 우리가 직면하게 될 미래가 무겁고 숨 막히는 서스펜스임을 은연중에 보여주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앤디 위어’의 작품들(<마션>, <아르테미스>)처럼, 진지하고 심각한 상황(만약 여러분들이 어두운 우주 속에서 헬멧 하나 쓰고 떨어져 있다고 생각해 보라)에서도 ‘크크’하고 터져 나오는 B급 유머를 던져 주는 가벼움을 더 선호했다. 우주에 대한 우리의 불안감을 유쾌한 반전으로 날려 버리는 그의 흐름에 나는 완전히 반해 버렸다(그만큼 우리의 미래가 두렵고 암울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테드 창’을 만나게 되었다. 그 사람은 신비했고 그의 책은 오묘했다. 뭐랄까, 심오한 이해를 요구하는 소설인 것 같은데 한 번 빠져들면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 훅하고 타임라인이 지나간다.


  ‘현존하는 최고의 SF소설가’로 추앙받는 테드 창은 29년 동안 겨우 중․단편 소설 17개를 썼지만(2권의 단편집으로 엮었다) , 각종 유명 SF상(4번의 휴고상, 4번의 네뷸러상, 4번의 로커스상)은 다 휩쓸었다. 각각의 단편들은 시대와 여건이 모두 다른 상황임에도 하나같이 놀라운 상상력과 마주하게 하면서 철학적 의문을 자아낸다.

  특히 그의 단편 <당신 인생 이야기>는 ‘드니 빌뇌브’ 감독의 미친 천재성을 만나 영화 「컨택트(Arrival)」로 재탄생되기도 했다(물론 원작을 모두 표현하지는 않았다).

  이야기는 외계인〔(헵타포드, heptapod(hepta+pod), ‘7개 다리’란 의미로 주인공 ‘뱅크스’가 지어 주었다〕과 인간의 조우로 시작되는데, 주인공은 헵타포드와 지루한 줄다리기와 같은 힘든 연구 끝에 ‘언어 인식의 방식’ 차이가 ‘피할 수 없는 운명에 대처하는 방법’의 차이로 이어진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모든 물리적 사건은 완전히 상이한 두 방식으로 분석될 수 있는 하나의 언술(言術)에 해당한다. 한 가지 방식은 인과적이고, 다른 방식은 목적론적이다. 두 가지 모두 타당하고, 한쪽에서 아무리 많은 문맥을 동원하더라도 다른 한쪽이 부적격 판정을 받는 일은 없다.(중략)
  
우리(인간)는 사건들을 순서대로 경험하고, 원인과 결과로 그것들 사이의 관계를 지각한다. 헵타포드는 모든 사건을 한꺼번에 경험하고, 그 근원에 깔린 하나의 목적을 지각한다. 최소화, 최대화라는 목적을.
 “벌써 무슨 얘긴지 알고 있는데 왜 나더러 읽어달라는 거야?”
 “얘기를 듣고 싶으니까!”

- 테드 창, 「당신 인생 이야기」, 엘리, 2019, pp. 212-220(발췌인용). -


  헵타포드의 우주(시간)에 대한 인식은 우리와 다르다. 그들은 시작과 동시에 종결을 알게 되는 피할 수 없는 운명에 대해 정해진 결과를 순수하게 받아들인다. 대신 그 결과를 수행하기 위해 가장 최적화된 길을 스스로 선택하여 걷는다. 정해진 운명 내에서도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있다니! 너무나 충격적이면서도 매혹적으로 느껴졌다.


  고대의 신비로부터 미지의 우주까지 총망라한 상상의 세계, 과학이라는 실증적 문제 위에 얹어진 영적인 성찰까지. 전 세계 SF 독자들이 그의 신작을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는 이유는 그의 독보적 상상력과 예언적 통찰로 이어진 또 다른 천재성을 보고 싶어서일 것이다.


  나 또한 그의 세 번째 책이 내 책장 컬렉션에 꽂히는 날이 빨리 오길 간절히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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