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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현 Aug 18. 2022

책들의 꿈꾸는 여행(2)-상

인류의 미래는?  과학은 해방인가, 구속인가?


  예전(대략 30년 전쯤)엔 「첫사랑」이나 「모래시계」 같은 드라마를 보기 위해 국민의 절반 이상이 TV 앞에 앉아서 본방을 사수했다. 덕분에 인기 있는 드라마 시청률은 50%를 넘었다(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수치이다. 과거에는 30% 이상의 시청률이 나와야 성공했다고 생각했지만, 현재는 TV 시청 비중이 줄면서 10%만 넘더라도 성공했다고 판단한다).


  그 대단한 드라마 중에서도 특별히 생각나는 건 「모래시계」이다.


  나 지금 떨고 있니?


  ‘최민수(태수 역)’가 마지막 사형집행을 앞두고 ‘박상원(우석 역)’에게 했던 대사로, 그 당시 최고의 인기여서 친구들과 서로 누가 더 멋있게 흉내 내는지 따라 해보곤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때 신인이었던 ‘이정재(재희 역)’는 한 마디 대사 없이도 ‘고현정(혜린 역)’을 묵묵히 지키는 호위무사 역할로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당시 나는 대학생으로 겨울방학 기간이었는데, 어느 날인가 노량진에 볼 일이 있어 갔었다. 노량진에 무슨 이유로 갔는지는 전혀 알 수 없지만 뇌리에 강렬하게 남아있는 기억은 ‘돌아오는 길’이었다. 무척 긴장하고 시계를 자꾸 쳐다보며 조급했던 것 같다. 좀 더 일찍 돌아올 걸 후회하면서 ‘귀가시계(모래시계 드라마를 보러 그 시간에 귀가한다고 붙은 단어였다)’를 못 맞춘 나에 대한 질책이 계속 내 가슴을 후려쳤다.


  시간에 쫓겨 조바심을 내면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어느 순간 나는 깨닫게 되었다. 버스정류장에, 그 앞 도로에, 저 건너 골목에, 그 어디에  아무것도 없었다. 사람도 자동차도 무엇도 없었다. 나만 덩그러니 어느 행성에 내팽개쳐진 기분이었다. 버스도 안 오는 게 아닐까 걱정하는 찰나 다행히 저쪽에서 빈 버스가 도착했다.


  버스 기사는 나를 마치 외계인처럼 쳐다보면서 “너 왜 이 시간에 여기 있니?”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기사님과 나만 탄 빈 버스가 한참을 달렸다. 타고 내리는 승객도 없고, 도로에 차도 없으니 버스는 정말 시원스럽게 달렸다. 신호등은 있으나마나였다. 아마 기사님도 빨리 차고지에 들어가서 모래시계를 보려고 하지 않았을까?




  전 세계적으로 지상파와 케이블 방송을 끊는 이른바 ‘코드 커팅(Cord cutting) 추세가 가속되고 있다. 자체 제작 콘텐츠로 인터넷 동영상(영화, 드라마)을 제공하는 스트리밍 서비스(OTT, Over The Top)가 블루오션으로 등장하며 너도나도 이 시장에 뛰어들었다.


  현재 전 세계시장은 ‘넷플릭스(Netflix)’, ‘디즈니 플러스(Disney+)’, ‘아마존 프라임(Amazon prime)’ 등이 거의 선점하고 있다. 다만 여기에 ‘애플 TV 플러스(Apple TV+)’가 애플 기기를 사용해야 손쉽게 시청할 수 있게 장치들을 구축하였을 뿐만 아니라 애플 스튜디오에서 만든 오리지널 드라마 시리즈의 독점력으로 그들을 추격하고 있는 형국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일부 유통․통신회사들이 국내 시장이라도 수성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역부족이다. 다만 틈새시장이라고 할까? K팝, K드라마의 인기를 자양분 삼아, 세계적 거대 자본(주로 넷플릭스)을 바탕으로 국내에서 제작된 드라마들이 선전하고 있다(「킹덤」, 「오징어 게임」, 「지옥」, 「지금 우리 학교는」등).


  나는 OTT 서비스를 거의 이용하지 않는다. 너무 재미있으니까 한 번 보기 시작하면 헤어 나오지 못할 것 같아서이다. 내 귀중한 여가시간은 독서와 글쓰기 활동하기에도 너무 부족하니까. 


  그래도 한때는 열심히 본 미드가 있었다. HBO Max의 오리지널 드라마인 「왕좌의 게임」이 그것이다.



  2011년부터 2019년까지 8 시즌으로 종료되었는데 나같이 무관심했던 사람도 보았을 정도니 웬만한 성인 남성들은 모두 봤다고 해야 할 것이다. 아마 우리나라에 스트리밍 서비스가 정착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미드라고 할 수 있겠다.


  그 이후로는 이 바닥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최근에 나의 관심을 끄는 일들이 생겼다.


  작년에 영화 <듄>이 개봉되었다. 



얼마나 기뻤는지 난 영화를 또 보고 또 보았다. 원작의 심리 위주 난해한 묘사를 영상 이미지로  표현하는데 이건 뭐, 어떻게 말해야 할지. 그냥 뿅 갔다. 원작을 보고도 잘 이해되지 않은 부분을 세련된 영상으로 보여주었다. ‘드니 뵐뇌브’ 감독이 최소한 원작 제2권까지 영화 3부작으로 메가폰을 쥔다고 하니 기대가 더 된다.  


  올해 초에는 애플 TV+에서 오리지널 드라마로 <파운데이션>을 제작하여 시즌 1이 방영되었고 시즌 3까지도 예정되어 있다고 한다.




  그리고 또 하나, 올 하반기에는 아마존 프라임에서 역시 오리지널 드라마로 제작한 <반지의 제왕 : ‘힘의 반지’ 편>이 방영될 예정이다.


* 기존 "영화"는 태양의 제3시대를 시간적 배경으로 하는데 비해 "드라마"는 그 이전인 태양의 제2시대를 배경으로 ‘사우론–요정 전쟁’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참고로 톨킨 세계관에서 시간은 ‘등불의 시대’–‘나무의 시대’–‘태양의 시대’로 나뉜다.



  이런 걸 우연이라고 해야 할까? 위의 세 원작은 얼마 전에 내가 심혈을 기울여 연달아 읽었던 책들이다. 그 대단한 원작들이 갑자기 거의 동시에 이 세상에 ‘영상 언어’로 다시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일원론적 세계관에 입각하여 생각해 보면 내(우리)가 너무나 간청하고 소원했기에 내가 속한 이 우주에서 다수 사람들의 의지에 의해 미디어로 제작되었다고 하면 미친 소리일까?


  그 책들을 읽었던 때를 떠올려보면 그 당시 내가 얼마나 기쁘면서도 고통스러웠는지 다시금 찡한 울림의 전율이 솟는다.




  나는 ‘테드 창’의 작품 이후에도 SF소설을 계속 찾아 읽고 있었는데, 그간의 작은 성취로 자만에 빠진 나는 그만 감당치 못할 큰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주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이렇게 명령하셨다. “너는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어도 된다.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따 먹으면 안 된다. 그 열매를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 가톨릭 굿뉴스 성경, 창세기 제2장 제16~17절


  어느 날, 나는 「SF의 고전 중의 고전」이라고 일컬어지는 ‘아이작 아시모프’의 <파운데이션>을 접하게 되었다. 그는 세계 3대 SF 작가(아서 클라크, 로버트 하인라인, 아이작 아시모프)로 ‘윌 스미스’가 주연한 영화의 원작 <아이 로봇>과 <파운데이션 시리즈> 등을 썼다.


  <파운데이션>의 큰 줄기는 이렇다. 주인공 ‘해리 던’은 「심리 역사학」이라는 예지력(?)을 통해 12,000년 동안 지속된 은하 제국이 500년 안에 멸망하고 30,000년간의 암흑기(계속된 전쟁과 문명의 몰락)가 오리라는 예측을 내놓는다.


  그러나 만약 은하계의 지식을 집대성할 단체이자 국가인 「파운데이션」을 설립하면 암흑기를 1,000년으로 단축하고 새로운 은하 제국을 세울 수 있다는 믿기 어려운 대안도 내놓는다.  우여곡절 끝에 그의 제안은 받아들여졌다.


  은하 제국이라는 구심점을 잃었을 때 벌어지는 전쟁과 혼란을 그렸지만, 결국 수많은 위기와 그 위기의 극복을 통해 ‘해리 셀던’의 예측처럼 은하 제국이 새롭게 재탄생된다는 과학적 낙관론(계몽주의)을 보여준다.  


  그런데 신도 아닌 일개 인간이 ‘어떻게 미래를 볼 수 있단 말인가?’라는 의문이 나뿐만 아니라 소설 속 대부분 사람에게도 생겨났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주인공 ‘해리 셀던’은 일반적인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는 인류의 문명에 이득이 되는 길을 보여주는 “메시아”였던 것이다.


  인간의 집단적인 행동 패턴을 수학적으로 함수화하여 미래 역사를 시뮬레이션하는 예측모델인 심리 역사학을 통해 인류 문명의 기초(파운데이션)를 놓을 수 있다고 설명한다.


  또 다른 질문. 감정의 동물인 개인의 행동 패턴을 어떻게 확실히 알 수 있을까? 인간 전체의 행동 패턴을 어떻게 예측할까? 소설 속 ‘트랜터’라는 은하 제국은 2,500만 개 이상의 행성에, 수십 경(京)의 인구가 살고 있다고 설정되어 있다.


  이 정도 규모가 되면 예측 불가능한 변수들은 서로 상쇄가 되고 결국 평균치에 수렴할 수 있기에 미래 역사의 평균적인 흐름을 수학적으로 예측할 수 있다고 말한다.


  <파운데이션>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거대한 은하 제국이라는 설정을 거의 최초로 한 책이자 당시(1940년대)의 과학적 낙관론에 기인한 책으로 그 후 수많은 책과 영화에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은하 제국은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를 읽고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로마제국의 건립 후 쇠락해가는 과정을 보면서 인류의 역사에 대한 연민을 느꼈을까? 그랬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아무튼 그때까지는 <로마제국 쇠망사>를 읽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렇게 ‘나는 파운데이션을 읽고 행복하게 되었다.’라고 끝났으면 좋았으련만, 무시무시하게 큰 어떤 인력(引力)에 이끌려 즐겁지만 고된 시련을 맞이하게 되었다.




  같은 출판사에서 펴낸 SF소설 중에서 <듄>이라는 책을 소개받았다. 그 내용은 이렇다(뒷장 커버지에도 적혀 있다).



  전 세계 수십 개 언어로 번역되어 2,000만 부 이상의 판매고를 올린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SF이자, 조지 루카스의 ‘스타워즈’,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 HBO ‘왕좌의 게임’ 등 영화, 애니메이션, 게임, 만화, 음악에 이르기까지 반세기 동안 서브컬처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친 고전.


 “<듄>은 SF 소설 중에 매우 독창적인 작품이며, 이에 견줄 수 있는 것은 <반지의 제왕> 외에는 없다.”- 아서 C. 클라크


  <듄(DUNE)>에 대한 찬사를 보고 모른 척 하기는 어려웠다. 더욱이 SF 소설 중 가장 많이 팔린 책이라니, 그런 책을 내가 안 읽어서야 말이 되나. 그런데 알고 보니 저자인 ‘프랭크 허버트’ 역시 <로마제국 쇠망사>를 읽고 책 구성을 짰다고 하니 그 책도 그냥 넘길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듄>에 견줄 수 있는 책은 <반지의 제왕>밖에 없다는 문장이 계속 눈앞에 아른거려 혼란 속에 빠졌다. 난감했다.


   세 가지 책을 모두 읽어야 하겠지만 어느 것부터 보아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파운데이션 7부작도 쉽지 않은 노작이었지만 SF의 ‘바이블’ 같은 책이라고 해서 사명감으로 내 등을 밀며 나갔는데 이제 읽어야 할 책들은 그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처음엔  각각의 책들이 서로 연관되어 있기에 마음 같아서는 조금씩 함께 읽어가고 싶었다. 그러나 <듄> 1권을 읽기 시작하면서 그런 코미디 같은 생각을 바로 버렸다. 내 능력으로는 도저히 불가했다. 정말 오만방자함이 그 끝을 모르고 까불다가 겨울 한파 한 바람에 바로 꼬리를 내렸다.




  <듄>은 매우 독특한 책이었다. 시기적으로는 서기 26,000여 년 경에 해당하는 은하 제국이고, 주요 무대는 모래사막으로 이루어진 삭막한 ‘듄’이라는 행성이다. 항성계 사이에 실시간 성간 통신이 가능하고 초공간 여행이 안정화되어 있는 미래의 엄청난 과학기술 수준을 설정하고 하는데 역설적이게도 정치형태(생활방식)는 중세의 신성로마제국과도 같은 봉건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


  이런 의아스러운 설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듀니버스(듄 세계관)’에 대한 최소한의 배경지식이 필요하다.


  과학기술이 획기적으로 발전하고 인공지능이 대부분의 일을 수행하게 되면서 인류는 스스로를 자유롭게 하려는 의도로 기계에게 생각을 위임하게 된다. 하지만 인공지능에 지나치게 의존하게 되면서 나태해져 갔고, 인간 대다수는 인간으로서 봐주기 힘들 정도로 지능이 퇴화되는 지경에 이른다. 그리고 컴퓨터에 대한 통제권을 지닌 이들이 컴퓨터를 통제하지 못하는 나머지 인간을 노예로 삼아 지배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이런 억압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하고자 ‘휴머니스트 퍼스트’라는 단체를 필두로 서기 15,800년 경 ‘버틀레리안 지하드(Butlerian Jihad, 모든 종류의 생각하는 기계의 파괴를 가져온 인류 해방전쟁)’라는 전쟁(성전)을 일으켰고, 그 씨앗이 제국 전체로 퍼져 100여 년간의 투쟁 끝에 인간은 인공지능과 연산능력이 있는 컴퓨터를 모조리 파괴하는 데에 성공한다.


  인류는 기계로부터 해방을 기뻐했지만 컴퓨터와 인공지능이 해왔던 기능을 수행할 수 없게 되자 성간 우주여행 기술이 퇴보하게 되어 성간 무역은 크게 위축된다.


  기계와 인공지능으로부터의 인류의 해방은 오히려 특수집단의 독점구조를 만들어 냈다. 버틀레리안 지하드 이후 ‘재통합 전쟁(약 16,000년 경)’에서 승리한 “코리노 가문”은 「우주항행 길드(성간여행 독점 조직, 길드 항해사들)」와 「초암 공사(길드 무역에 따른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관리 배분하는 경제연합체)」를 조정하면서 ‘파티샤 황제’로 등극한다.


  황제는 여러 막강한 힘을 소유한 귀족 가문을 초암 공사에 소속시켜 막대한 독점이익을 일부 나눠주면서 또한 강력한 무력을 앞세워 파디샤 황제의 봉신으로 봉속 시킨다. 이로써 중세의 신성로마제국 같은 봉건적인 「통일 은하 제국」이 탄생하게 된다(서기 16,200년 경).


  소설은 그 이후 약 10,000년이 지난 시점이다.


  <듄> '메시아 성장' 서사이지만, 기존의 다른 작품과는 결을 달리한다. 듄의 스토리는 매우 특이한 점이 있는데, 책 제1, 2권에서 주인공 ‘폴’이 메시아가 되면 은하계에 평화와 희망이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전 우주적인 종교전쟁이 일어나서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맞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예지력으로 미리 알게 된 폴은 그러한 운명을 거부하고자 하나 이 때문에 또 다른 갈등이 생겨난다.


  폴은 종교전쟁이라는 미래가 오늘의 여러 가능성 중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끔찍한 목적에 저항하면서 지하드의 도래를 막기 위해 다른 길을 찾으면 찾을수록 그의 미래 전체가 지하드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흘러가는 강물 같은 것으로 변해 버렸다.


  퀴사츠 해더락(Kwisatz Haderach, 여러 공간에 동시에 있는 자)이라는 초인도 제국의 거대한 수레바퀴는 바꿀 수 없었다. ‘우리가 미래에 대해 할 수 있는 것이 과연 있을까?’ 하는 자조 섞인 한숨만 흘러나왔다.


  프랭크 허버트는 왜 은하 제국이라는 아주 먼 미래, 그것도 초 과학기술이 전제된 시점을 설정하면서도 중세를 연상하는 광신적인 종교 공학과 예지력이라는 신비주의를 책의 주된 동력으로 삼았을까? 책을 읽으면서 생겨나는 갖가지 의문점들에 대한 답을 찾다가 유튜브의 좋은 채널을 통해 그 실마리를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듄>이 과학적 낙관주의로 대표되는 <파운데이션>을 반박하기 위해 쓰였다는 사실이다.


  저자는 <파운데이션>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파운데이션에서 역사란 엘리트 과학자들이 더 커다란 목적과 공동선을 위해 통제하고 조작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밑바탕에는 과학자 ‘샤먼’들이 인류에게 가장 좋은 길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는 가정이 있다. 예측하지 못한 변수가 발생하기는 하지만 과학이 대응하지 못할 만큼 심각하지는 않다. 파운데이션은 과학을 이용하면 미래의 돌발변수에 충분히 대응할 수 있다는 가정에 기초해 있다

  - 유튜브 채널 「요런시점 movie」, ‘듄 vs 파운데이션(듄이 반박하고 싶었던 SF의 초고전)’ 참조 _


  허버트는 아시모프의 과학적 낙관주의에 동의하지 않았던 게 틀림없다. 인간의 미신적이고 야수 같은 본성을 정말 통제할 수 있을까? 과학과 이성의 도구를 손에 넣었다고 인간의 능력을 너무 과신하는 게 아닌가? 이런 생각에 천착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파운데이션의 여러 설정을 그대로 가져오되 그 결과는 비판적으로 뒤집어 보는 소설을 쓴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파운데이션> 과학과 이성을 중시하는 합리적 낙관주의

                          vs

  <> 인간의 본성과 내면을 탐구하는데 관심이 많은 인문주의적 비관주의
        


  미래의 역사는 어디로 흘러가는가? 인류는 과연 진보하는 것이 맞는가? 과학은 인류에게 해방인가, 구속인가? 이런 질문에 대한 서로 정반대 되는 관점이 두 스페이스 오페라 속에 녹아들어가 있었다.



'책들의 꿈꾸는 여행(2)-하'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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