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태현 Jul 15. 2022

책들의 꿈꾸는 여행(1)-상

  인생이란? 성장. 지혜

  요즘 참 책을 많이 읽는다. 무슨 걸신들린 사람 인양 책을 본다. 회사에서도 틈틈이(?), 집에서도 아이가 해야 할 숙제(학교, 학원, 학습지 등의 숙제와 다음날 준비해야 할 것들)를 챙겨 주고는 거실이나 침대에서 책을 본다. 나에겐 무척이나 즐거운 시간이다. 신간이나 평이 좋은 책이 보이면 우선 도서관에서 빌려 보고, 좋은 책이다 싶을 때면 그제서야 구매한다. 내 책장 컬렉션에 꽂아두기에 손색이 없는 책들 말이다.


  우리 집은 거실에 소파가 없다. 몇 년 전 이사 오면서 책 보는, 공부하는 분위기를 조성한답시고 책장으로 거실 벽을 돌리고 책상을 붙여놓았는데 결과적으론 별 소득을 얻지 못했다. 고풍스러워야 할 책장엔 아이의 놀잇감이 수북이 쌓여 있고 한 켠에는 TV도 놓여 있다. 이도 저도 아닌 거실이 되어 버렸다. 나도 독서를 할 때 거실보다는 방을 더 선호한다. 거실은 아이의 놀이터가 된 지 오래인지라 조용히 방해받지 않고 책을 읽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아이가 초등학교 3학년이 되면서 조금 변했다. 내가 거실에서 서류 작업이나 독서를 하고 있으면, 은근슬쩍 맞은편 테이블에 않아 자기만의 일(스퀴시 만들기, 귀여운 고양이 캐릭터 그리기, 주말 특별 이벤트 구상하기 등)에 열중한다.

 

  자기도 아빠만큼이나 중요하거나 수준 높은 일을 하고 있다는 걸 보여 주고 싶은가 보다. 나는 모른 척 내 일에만 몰두한다. 그러면 이런저런 질문으로 나의 관심을 유도한다. 내 딸이지만 하는 짓이 귀엽다. 자녀의 커가는 모습은 기쁨이면서도 소중한 무언가가 잊혀 가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난 책에 ‘줄 긋기’를 좋아한다. 오직 나만의 책이라는 인장처럼, 좋은 문구다 싶으면 연필로 그냥 쓱 긋는다. 삐뚤빼뚤하기도 하지만 그것도 그 순간의 영광이다. 그렇게 그어진 줄은 내가 갑자기 그 책을 보고 싶을 때, 혹은 어떤 내용이나 문구가 필요할 때 나의 시간과 에너지를 절약하게 도와준다. 내가 안 본 책은 있어도 한 번만 본 책은 거의 없는 이유이다.




  ‘책’하면 떠오르는 소중한 기억이 있다. 중학교 3학년쯤인 것 같은데, 아무튼 여름방학이었다. 작은형이 친구한테서 <슬램덩크> 전 권(31권, 코믹스판 기준)을 빌려왔다. 그 당시 그 책의 위력은 대단했다. 아마 웬만한 학생들이나 만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슬램덩크’를 보았을 것이고, 그 전율이 우리나라에 농구 붐을 일으켰다.


  운동 좀 한다는 중․고생들은 모두 농구코트에서 시간을 보냈다. 때마침 연세대와 고려대를 주축으로 하는 대학 농구의 황금기가 이어지면서 그 인기로 “마지막 승부”라는 농구 드라마가 나올 정도였으니까.   



  난 그 만화책이 처음 나오면서 학생들의 입소문을 탈 때는 보지 않았다. 만화책의 인기가 절정을 지나 하강곡선에 접어들었을 때 형이 만화책을 빌려 왔고 심심풀이로 ‘발만 잠깐 담가 보겠다’는 것이 그만, 바닥이 어딘지도 모른 채 계속 빠져 들어갔다. 전 권을 완독 하는 데 하룻밤을 꼬빡 새었다. 만화책 본다고 야단맞을까 봐 선풍기도 없는 방구석에서 식음을 전폐하고 책을 보았다.


왼손은 거들뿐...

 

   슬램덩크 역사에 남을 명승부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최고의 순간에 강백호가 한 말이다. 고교 최강인 산왕고를 이긴 마지막은 슬램덩크도, 농구에 존재하는 화려한 슈퍼 플레이도 아닌 가장 기본적인 중거리 슛이었다.


  왼손은 거들뿐이라는 조언을 계속 상기하면서. 그렇게 강백호는 산왕전의 마지막을 가장 기본적인 슛으로 마무리 짓는다. 그것도 항상 사이가 안 좋아 산왕전 이전까지 서로 패스를 한 번도 안 했던 서태웅의 패스를 받아서 말이다. 서태웅과 강백호는 아무 말 없이 ‘하이파이브’를 한다.



  <슬램덩크>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을 때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 책이, 그것도 만화책이 내 의식을 흔들어 놓았다. 지금 이 순간, 내가 해야 할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조급함이 찾아왔다. 시야는 점점 사라져 가고 생각은 어딘지도 모르는 우주 끝까지 흘러간 기분이었다. 그렇게 난 한창 공부해야 할 중3 여름방학에 몰래몰래 슬램덩크를 7번이나 보았다.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았다.


  읽을수록 오히려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작은 그림과 여백이 눈에 들어왔다. 스쳐 지나갔던 배경 속의 작은 대사들이 새롭게 다가왔다. 당연히 회독 속도는 갈수록 빨라졌다. 마지막으로 볼 때는 내 마음의 느낌을 사진으로 찍어 기록으로 남기듯 마음 가는 곳 위주로 거침없이 달려 나갔다. 그때부터였을까? 난 한번 마음을 연 책은 여러 번 읽고 또 읽는 애정이 솟아났던 것 같다. 언제부터인가 난 이것을 "책들의 꿈꾸는 여행"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러나 고등학생이 되어 수험생활을 하면서, 대학교에서 리포트를 위해 형식적으로 도서관을 드나들면서, 취업을 위한 기나긴 공부를 하면서, 직장을 다니고 가정을 이루면서 그 애정은 점차 사그라져 존재조차 잊혀 갔다.




  바쁜 일상 속에서도 시시때때로 책을 보긴 했다. 책에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부을 수 없었기에 가볍게 읽을 수 있는 단편집 위주로 골랐다. 대부분 도서관 전자책을 통해 보았고 간간히 ‘북 페스티벌’ 같은 행사에서 보여주기 식으로 책을 사곤 했다. 그때 산 책들 중에서 지금까지도 손이 자주 가는 책들도 더러 있다. ‘레프 톨스토이’, ‘오헨리’, ‘셰익스피어’, ‘헤르만 헤세’, ‘생텍쥐페리’ 등의 단편집들이다.


  이 책들의 공통점은 앞서 얘기했듯, 단편들이라 저녁놀이나 시원한 바람이 불 때 스스럼없이 책을 집을 수 있게 해 주었다. 특히나 작가들의 개성에 따라 전해주는 인류애, 삶의 의미, 익살과 반전은 나의 메마른 감성을 촉촉이 적셔 주었다.


  그저 그런 일상이 지나가던 중에, 여느 때처럼 전자도서관 추천 책 목록을 뒤적이다 눈에 띄는 저자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름이 ‘채사장’이란다. 물론 필명이겠지만 웃기기도 하고 뭔가 조롱받는 것 같기도 해서 그 책의 평을 찾아보았다(난 주로 인터넷서점에서 보여주는 ‘도서정보’, ‘이 책을 구입하신 분들이 산 책’ 그리고 ‘독자들의 리뷰’들을 유심히 살핀다). 의외로 좋은 평가 일색이어서 전자책으로 <열한 계단>을 대출하였다.


  처음엔 조금 어색했다. 알고 보니 자신의 성장기를 바탕으로 이런저런 주제를 쓰고 있었다. 없는 시간 쪼개서 봐야 하는데 과연 좋은 책일까 하는 의구심이 생겨 읽기를 포기하려다 좀 더 기회를 주기로 했다.


  그렇게 성의 없이 읽기 시작한 나에게 이 책은 큰 깨달음으로 답해왔다. 뒤통수를 한 대 제대로 맞은 느낌처럼 내 머리는 멍멍해졌다. 내가 생각했던 이 세상은 허구였든지, 아니면 빙산의 일각일 뿐이었다. 살면서 알아야 할 최소한의 것조차 모른 채 아무 의미 없이 그냥 인생을 소비하고 있었다는 자책이 밀려들었다. 이 책은 한 인간이 직면하게 될, 태어나서 살아가고 죽음을 겪은 후 가야 할 곳에 대한 시간까지 총합한, 무한의 시간을 하나의 스펙트럼처럼 보여주었다.


  일단 바로 구매해서 다시 꼼꼼히 읽었다. 그러면서 이 책에 나오는 많은 지식을 마주하고 거기서 인생에 필요한 지혜를 얻어야 했다. 내가 이렇게 인류의 지혜에 무지했다는 생각에 부끄러움이 들었다. 다행히 이 책은 그런 나를 응원하면서 계속 정진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이 책은 문학(죄와 벌), 종교(기독교, 불교, 힌두교), 철학(니체), 과학(뉴턴 역학, 상대성이론, 양자역학), 이상과 현실(자본주의, 공산주의, 제3세계), 삶과 죽음(티베트 사자의 서) 그리고 초월(우파니샤드)의 주제들을 ‘헤겔’의 「변증법적 방식」을 통해 한 계단씩 올라간다.


  이 책으로 부족한 부분은 따로 과외수업을 받았다. 특히 ‘철학’과 ‘과학’ 분야에서 많은 배움이 이루어졌다. 고등학교 시절 윤리 과목에서 수박 겉핥기로 배웠던 많은 종교와 철학들을 심도 있게 파고들었다. 우선 집에 있던 철학 책을 보았고 부족한 부분은 도서관에서 찾아 빌려 보았다.


  특별히 ‘프리드리히 니체(영원회귀 현상)’와 ‘칼 융(페르소나, 각종 상징)’의 이론들은 나의 도전심을 자극했고 능력이 되는 만큼 더 깊이 알고자 노력하였다. 난해한 이론들이 많았으나, 다정다감한 저자들이 나같이 무지한 독자들을 위해 이해하기 쉽게 써주신 책들이 많이 있었다.


  그분들의 노고 덕분에 전체적인 철학 사상사가 한 줄에 꿰어졌다(전체적인 얼개를 알기 쉽게 파악하고자 하는 분들에게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0>을 추천드린다).


  고등학교에서 ‘과학’은 물리, 화학, 생물, 지구과학의 네 과목으로 나누어진다. 나는 문과생이었다. 즉 수학을 잘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화학과 생물은 그런대로 암기로 어느 정도 되었지만 물리와 지구과학은 수학적 사고와 연관되기에 나에겐 어려운 과목들이었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로, 원리의 핵심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기에 응용을 하거나 고차원적으로 발전하는 이론(수식)은 따라가기 힘들었다.


  그런 내가 마흔이 넘어서 천체물리학으로 엮은 내용을 공부하기는 많이도 어려웠다. 처음엔 정말 알아듣기 힘들어서 도서관에서 대출했다가 반납하고 또 대출했다가 반납하면서 나에게 맞는 책을 찾아다녔다. 유튜브 동영상에서 도움을 받기도 했다. 여기도 다행히 많은 학자의 고민을 통해 복잡한 수식을 간단한 이야기로 설명해 주는 책들이 있었기에 점차 눈이 밝아졌다.


  르네상스 후 과학적 성과들을 읽어가는 것은 마치 영화 ‘인디아나 존스’에서 숨겨진 성배를 찾는 것처럼 설렜다. 이제는 고전이 되어 버린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읽는데, 느낌은 오히려 「그리스 로마 신화」를 보는 것처럼 신비롭고 흥미로웠다.





  <열한 계단>은 마지막으로 ‘죽음’과 ‘초월’을 얘기하면서 고대의 지혜를 알려준다. 죽은 자를 위한 안내서인 「티베트 사자의 서」와 범아일여(梵我一如)로 표현되는 「베다의 우파니샤드」를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준다(이집트 ‘사자의 서’도 있는데 삽화까지 볼 수 있어 찾아보기를 권한다).


  죽음 이후의 세계는 단지 내 마음의 환영이다. 그리고 죽음과 삶은 동일하니, 삶의 세계도 사실은 내 마음의 환영일 뿐이다. 이것을 깨달아야 한다.

  네 마음이 전부다. 그것을 이해해야 한다. 세계가 있고 너의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너의 마음이 세계를 그려낸다. 너의 바깥에 너의 존재와 독립된 외부 세계가 있을 거라는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삶과 죽음을 관통하는 존재가 있다면 그는 어떤 존재인가? 그는 보는 존재입니다. 유일한 관조자. 그는 내면을 보는 존재입니다. (중략) 물질세계도, 사후세계도, 꿈속에서의 세계도 보는 존재로서의 내가, 나의 외부에 있다고 믿는 내 내면의 세계인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걸 알아서 뭐하나? 왜 내가 이런 걸 알아야 하는 거지? 우파니샤드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범아일여의 깨달음이 영원한 자유에 이르게 할 것이다. (중략) 바로 당신이 이 세상의 유일한 주인공이었음을 깨닫게 합니다. 당신이 바로 그것입니다.

- 채사장, 「열한 계단」, 웨일 북, 2017, pp.338~391 중 발췌 인용. -


  책을 덮고서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이런 막막함이라니. 이제까지 내가 편안하게 받아들였던 가정, 직장, 사회라는 세계는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던 걸까?


  내(우리)가 지금껏 배워서 알고 있는 세계관은 고정된 세계(우주, 은하, 태양계, 지구, 국가, 사회 등)가 이미 실재하고, 나(자아)라는 존재는 그곳 어딘가에서 살고 있다. 내가 태어나고 죽어도 세계는 그대로 존재한다. 세계가 나의 존재와는 무관하게 외부에 있다고 믿는 관점(‘실재론’이라고 한다. 이원론적 세계관)이다. 서양의 관점인데도 너무 익숙하지 않은가?


  그런 나(우리)에게 저자는 다른 반쪽의 세계를 보여준다. 인도(베다, 범아일여/ 불교, 일체유심조)와 중국(도가, 도덕 일치)을 아우르는 고대 동양의 근원적인 사유 방식은 자아와 세계를 분리하지 않고 이를 통합적으로 고려한다. 눈앞에 펼쳐진 세계는 자아의 마음이 그려내는 것이고, 세계란 그저 자아의 마음 안에 담긴 것(‘관념론’이라고 한다. 일원론적 세계관) 일뿐이라고 말한다. 의미심장한 멋있는 표현 같은데 전혀 공감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서양은 18세기 칸트의 관념론을 시작으로 기존 철학사에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이루어졌고 최근의 과학적 연구(다중우주론, 평행우주론)도 비슷한 주장을 하면서 일원론으로 변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고대 동양의 지혜(세계와 자아를 하나로 보는 관념론적 일원론)를 잃어버리고 서양식 교육 덕분에 선량한 이원론자로 자라왔다. 왠지 속았다는 억울함은 나만의 느낌일까?


- '책들의 꿈꾸는 여행(1)-하'에서 계속 -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