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자의 변명

부고. 장모님. 어머니

by 태현

올해도 며칠 남지 않았다. 절기에 맞게 추위도 매섭다. 아침도 꽤 많이 지난 시간이지만 토요일 오전이라 따뜻한 침대 속에서 나오기는 대단한 결심이 필요했다.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으로 누워있는데 아내의 휴대폰 소리가 울렸다. 오늘따라 먼저 일어난 아내가 거실로 나가 통화를 하는 것 같은데 별 얘기는 아닌 듯했다.


나는 여유로운 아침을 좀 더 즐기려 곁에 자고 있는 아이의 볼을 만지작거리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 잠시 후 아내가 방에 와서 뭐라고 속삭였다. 이 잔잔하고 평안한 내 마음에 첨벙 돌멩이가 하나 떨어져 파문을 일으켰다. ‘아! 이렇게 갑자기...’




나에게 형님뻘인 고인(故人)은 나이가 50대 중반밖에 안 되었고 얼마 전까지 별 이상도 없었다고 한다. 올 7월에 그토록 바라던 사무관 승진을 하고 관리자로 발령이 났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어깨가 욱신욱신 아프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래서 한의원에 가서 침도 맞고 동네 병원에서 물리치료와 진통제를 먹으면서 치료를 받았는데 점점 더 아파지기만 했다는 것이다.


결국 상급 대학병원에 가보니 중한 병에 걸려 있었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너무도 황당하고 기가 막혀 내로라하는 다른 병원에도 가 봤는데 이미 시기를 놓쳤다는 말만 들었다.


때에 맞춰 회사에서 건강검진도 하고 별 이상도 없이 잘 지내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시한부 인생이 되는 이 절박한 상황을 누가 선뜻 받아들이겠는가.

그때부터 주변 친지들은 고인이 큰 병원에서 각종 검사를 받는다는 소리만 전해 들었을 뿐, 여러 차례 연락을 해 보았지만 일체 대응이 없어 답답해하고 있던 터였다.




그런저런 생각으로 늦은 아침을 먹고 울적함을 달래고자 거실에 있는 ‘구피’ 수조를 오랜만에 청소했다. 아침, 저녁으로 먹이를 주는 나를 알아보는지 반갑다고 서로서로 밀치며 인사를 해왔다. 그렇게 수조 바닥을 닦고 있었는데 직장 단톡방에 부고가 올라왔다. 동료 직원의 부친상이었다.


부친의 건강상태가 워낙 안 좋아 이미 간병휴직 중이었기에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하루에 두 건의 부고를 접하고 나니 ‘인생무상’이니 ‘공수래공수거’ 같은 말도 다 부질없게 느껴졌다.

그때 불현듯 어느 시구 한 문장이 떠올랐다. 학교 다닐 때 많이 외웠던 유명한 그 글귀. 월명사의 <제망매가(祭亡妹歌)>.


생사로난 예 이샤매 저히고 나난 가나단 말도 못다 닏고 가나닛고

학교 다닐 때는 배웠던 향찰 자체로 외웠었다. 그래야 가끔씩 나오는 한자 빈칸 넣기 문제도 커버되니까. 그때 그 알량한 성적을 위해 머리로만 외웠던 시구가 30여 년이 지난 이제야 숭고한 정신으로 전해지다니... 배움이란 하나도 버릴 게 없나 보다.




몇 주가 지난 어느 토요일 아침, 인근의 어느 사찰에 갔다. 처형이 고인을 절에 모셨다고 했다. 그 전례에 따라 지내는 사십구재(四十九齋)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절에 꽤 오랜만에 왔다. 특히, 법당까지 들어온 적은 언제인지 미루어 짐작도 안 간다. 아마 결혼 전 아내와 갔던 영주 부석사가 아니었을까 싶다.


스님의 목탁소리가 법당 밖까지 물결치듯 퍼지는데 독경소리는 오히려 내 안으로 스며든다.



흐느끼듯 흘러가는가 싶다가도 사라져 버리는 구슬픈 그 소리들에 맞춰 우리는 여러 번 삼배(三拜)를 올렸다. 그 후엔 고인에 대해 제사를 지냈는데 난 제일 마지막으로 잔을 올렸다.


잔에 제주(祭酒)를 채우는데 그 속에 언뜻 내 얼굴이 비쳤다. 고인에게 보여주는 내 마지막 모습일까? 고인의 영정사진이 오늘따라 더 밝게 웃고 있었다. 극락왕생하시길 빌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속에서 갑자기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각났다. ‘그립고 보고 싶다’는 심정을 말하기에 앞서 ‘나는 나쁜 놈이야’라는 죄의식이 날 억눌렀다.


나에게 있어 어머니는 어떤 존재였을까? 지금은 어느 납골당에서 수천 명의 다른 고인들과 같이 모셔져 있지만 얼마나 외로울까? 일 년에 몇 번 찾아가 뵙는 것도 큰 결심을 해야만 가능한 막내아들을 보며 어머니는 슬퍼하셨겠지? 옛말이 틀린 게 없다.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

내게 세 번이나 기회가 찾아왔었다네...... 세 번씩이나! 난 맹세했었지. 만약 녹색의 문이 다시 나를 받아 준다면, 이 너절하고 갑갑한 세상으로부터 벗어나 안으로 들어갈 거라고, 이 메마른 공허의 빛들로부터, 이 지독한 무의미들로부터 벗어날 거라고, 문을 열고 들어가서는 절대로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그곳에서 살리라고...... 그토록 맹세를 했건만, 정작 때가 왔을 때...... 난 그렇게 하질 못했다네. 한 해 동안 세 번이나 기회가 있었지만 난 그 문을 그냥 지나쳐 버렸다네. 들어가질 못했던 거야. 지난해의 일이었지.

- 허버트 조지 웰스, 마술가게 중 단편 '벽안의 문’, 바다출판사, 2014, p.46.-

최근에 읽은 책의 일부이다. 작중 주인공은 어렸을 적 우연히 들어가게 된 그 환상의 ‘녹색의 문’에 사로잡힌다. 평생을 그리워하며 일상의 근심과 괴로움으로 삶이 회색으로 변할 때마다 그리로 도피하고 싶어 했다. 실제로 녹색의 문은 꽤 여러 번 그에게 나타났지만 그때마다 그에게는 현실의 중요한 순간과 겹쳤고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매번 자신을 탓하면서도 현실을 선택했고 곧 후회하는 똑같은 패턴이 반복되었다. 마지막 그의 죽음은 너무나 이상한 점이 많았는데 오히려 그게 녹색의 문과의 조우가 아니었을까 하는 열린 결말로 이야기는 끝이 난다. 이 작품을 읽고 받은 충격이 너무 커, 한동안 먹먹한 가슴을 움켜쥐고 있어야 했다.


후회는 언제나 먼저 오지 않는다고 한다. 어머니 돌아가시던 날을 떠오르면 후회가 된다고 말하면서도 아마 그때로 다시 돌아갈 수 있어도 난 똑같이 했을 것이다.


내가 인생에서 더 소중한 것을 분별할 만큼의 지혜가 있었다면 어머니 임종을 볼 수 있었을 텐데. 아니 그보다 내 인격적 소양의 문제를 고치지 않았기에 그 오랜 투병기간 내내 거의 어머니를 찾아뵙지 않았다. 그저 부족할 뿐이다.



몇 주의 시간이 참담한 겨울 앓이와 함께 지나갔다. 마음은 침울해서 뻣뻣한데 몸은 도리어 더 바쁘게 움직였다. 연말 종무식과 연초 시무식이 있었고 생각지도 못했던 소소한 업무들이, 행사들이 종양처럼 커져나가면서 때 아니게 바쁘고 머리 아픈 시간들이 이어졌다. 그렇게 우울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중에 또 다른 부고 소식이 들렸다. 이번에는 아내 막내 작은아버님이 돌아가셨다.


거의 자식처럼 키운 시동생이라 막내 작은아버님도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형수’를 찾았고 장모님도 시동생의 일에 발 벗고 나서서 도왔다고 한다. 여러 가지로 그가 성공하셨을 때도 장모님은 본인 일 마냥 자랑스러워하셨다.


그런 시동생이 심한 병으로 병원에 누워 계시다고 하시니 얼마나 보고 싶으셨을까마는 마침 발병한 코로나로 인해 면회도 어려워졌다.


돌아가시기 전에 통화라도 한 번 하고 싶어 그렇게 여러 번 시도하셨지만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의 더 가까운 가족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연결을 이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가 누구를 탓할까마는 안타깝고 서러운 마음을 감출 기회는 영원히 사라진 것이다.




부산을 향해 떠나는 KTX를 타러 서울역 계단을 오르내리는데 매서운 1월의 찬바람이 코트 속으로 들어와 마음은 더욱 황폐하고 삭막했다.


급작스런 생이별에 미처 준비를 할 새가 없어서였는지 당장 장례식장을 못 구했단다. 여기저기 한참을 수소문한 끝에 어느 작은 장례식장 3층에 빈소를 겨우 차리다 보니 우리가 도착했을 땐 벌써 근조화환이 계단 밖에까지 나와 있어서 마치 근위병처럼 우리를 맞았다.


엘리베이터를 타실 때부터 새어 나오기 시작한 장모님의 울음은 상주(喪主)를 만나자 끝내 터져 급기야는 바닥에 엎어져서 땅을 치며 대성통곡을 하셨다.


별 감정의 동요가 없을 것 같은 나였는데 눈앞의 울음바다에 괜스레 북받쳐 올라 고개를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상주만큼은 절절하지 않을지라도 장모님에게는 그들이 모르는 고인과의 인연과 추억이 있었다.


그러기에 그들의 부족한 배려가 나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고, 장례식장에 있는 내내 난 내 것이 아닌 상실감과 배신감에 시달려야 했다.



서울로 돌아올 때는 비행기를 타고 왔다. 조금 일찍 도착한 나는 어스름이 조금씩 내려오는 공항 대합실에서 창밖을 내다보며 시간을 보냈다. 순간순간은 잘 모르겠는데 잠시만 딴생각을 하다 보면 방금 전보다 더욱 짙어진 어둠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날 태울 비행기가 나타나고 그 옆으로 승객들의 캐리어를 옮기는 화물차들이 나타나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리고 곧이어 비행기 동체를 끌어줄 터그 카들이 하나 둘 보이는가 싶더니 탑승수속을 한다는 소리가 들렸다.


겨울이라 오후 여섯 시 삼십 분의 공기나 분위기는 동남아 야간 비행보다 더 어둡고 무거웠다. 비행기 속에서도 나는 왠지 모를 심연에 잠겨 창밖만 내려다보았다.


국내선이라 고도가 높지 않아서인지 밝은 불빛의 건물들 형체를 알아볼 수 있었고 환하게 빛나는 도로를 지나가는 자동차까지도 어렴풋하게 보였다.


군데군데 있는 건물은 별처럼, 도로의 가로등과 퇴근길 차량들은 은하수처럼 보였다. 마치 비행기 속 내가 있는 곳이 지상이고 창밖 저곳이 하늘 위 우주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생각하니 우리가 매일 디디고 생활하는 이 땅덩어리가 오히려 인류가 그 오랜 시간 동안 하늘과 그 너머 우주를 올려다보며 온갖 상상과 그 이야기를 만들어냈던 근원이 아니었을까 하는 혼란을 느꼈다(사실일 수 있다. 인류의 모든 신화와 전설들은 대부분 지상에서의 일상 사람들의 모습과 생각을 반영했다. 과학적으로 설명하자면, 우리 몸속의 모든 원소 중에서 우주에서 오지 않은 것은 없다).


왜 나는 가까운, 손쉽게 접할 수 있는, 따뜻하고 친절한 상대방의 애정과 호의를 그토록 무심히 저버리고 살아왔던 걸까? 그렇지 못했던 나의 부족함을 마치 방패처럼 변명만 하지 말고 지금이라도 납골당에 계시는 어머니를 자주 찾아뵈어야겠다. 아버지가 건강하실 때 여행도 가고 기쁜 추억을 만들어야겠다. 사람이면, 자식이면 응당 그럴 것이다.


이번 주말엔 꼭 어머니를 만나러 가야겠다. 작은 꽃다발 하나 품고 옛날 철없던 막내로 돌아가 인자하게 웃고 있는 어머니 손을 잡고 한참을 걸어야겠다. 그리고 지금 얼마나 죄송한지를, 예전에 미처 말씀드리지 못했던 그 많은 것들을, 그리고 철없지만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어머니의 손녀에 대해 재잘재잘 떠들어야겠다. 그럼 분명 어머니는 무척이나 해맑은 웃음으로 날 용서해 주실 것이다.


왜냐하면 내 어머니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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