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막을 걷어라(2)

안경. 변화. 삶의 의미

by 태현

- 장막을 걷어라(1)에서 계속 -


안경잡이의 생(生)과 결별하고 새로운 삶를 경험하기로 한 엄청난 결심의 계기는 의외로 작은 모임에서 시작되었다.


날씨가 제법 추웠던 어느 날, 회사 몇몇 지인들과 반주를 겸한 저녁을 먹었다. 서로의 인생에 대한 이런저런 얘기들을 주고받고 있던 중 한 지인이 최근 남편에게 ‘스마일 라식’을 시켜줬다고 화제를 바꿨다. 그 남편의 나이는 나와 거의 비슷했다. 수술비용은 제법 비쌌지만 수술 과정이 매우 간단하고 후유증도 별로 없어 다음날부터 일상생활이 가능하다고 말하면서 나에게도 하라고 권했다.


조금은 마음이 동(洞)했지만 이내 체념했다. 내가 안경을 벗었을 때 사람들의 그 반응은 너무 익숙했다. 선글라스는 자주 사용했지만 콘택트렌즈는 사용하지 않는 이유가 그것이었다. 그렇게 눈 수술은 그저 술안주로 올라왔다가 이내 잊혔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가 자기네 회사 남자 직원이 눈 수술을 해서 아주 좋은 반응을 받았다는 얘기를 하면서 나의 궁금증(또는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평소 아내가 무엇을 말하면 투덜대면서도 결국은 따라 하는 이상한 심리가 있었다. 역시나 나는 싫다고 말하면서도 눈 수술에 대한 정보를 뒤지기 시작했다.


‘라식’과 ‘라섹’의 의미 구분부터 요즘 뜬다는 ‘스마일 라식’까지, 추천 병원과 비용을 줄이는 팁 등 각종 정보를 뒤졌다. 무엇보다 걱정되는 건 40대 중반부터 오는 노안(老眼)이었는데, 최근에 나도, 아내도 노안의 징후가 있었다. 또다시 노안 치료법에 대해 찾게 되었다.


대충 알아야 할 건 알았고 이제 남은 건 하느냐 마느냐 그것이 문제였다. 여러 이점이 있었지만 몸에 칼을 대는 건(실은 레이저이지만), 특히나 눈이라 더더욱 조심스러웠다.




강남역에서도 제일 유명한, 그래서 좀 많이 비싼, 노안교정수술 병원에 전화 상담을 받았다. 상담을 받고 나서야 여러 가지 의구심이 풀렸고 수술을 받아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상담직원이 얼마나 노련하고 감미롭게 내 걱정을 덜어주던지, 마음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검사를 해서 노안의 정도와 눈 상태에 따라 수술 가능 여부는 별개의 일이었다.


검사를 받으러 지하철을 이용해 강남역에 갔다. 직장이 서울임에도 난 서울 지리를 잘 모른다. 게다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번화가라는 이 동네에는 올 일도 없었다.그런 내가 필연이 아닌 선택에 의한 고가의 미용을 위해 강남을 오다니, 꽤나 출세했다는 우쭐함이 나를 지배했다.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수많은 대기 줄에 놀랐고, 20여 종이 넘는 각종 첨단 검사장비와 그것들을 운영하는 시술자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순서를 기다려 매우 섬세해 보이는 기계 앞에서 품질 테스트를 받는 제품처럼 이리저리 이끌려 약 2시간이 넘게 검사를 받았다.

눈 검사를 위한 각종 장비들

며칠 후 진단 검사 결과를 받았다. 노안은 이미 어느 정도 진행되었기에 당연히 20, 30대가 하는 저렴한 가격의 일반적인 라식이나 라섹은 허락되지 않지만, 다행히 노안 정도가 약하고 의외로 내 눈 상태가 좋아 노안 교정 수술은 가능하다는 아리송한 내용이었다.


이 얼마나 상반된 감정인가? 문득 스무 살 청춘 시절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병역검사를 마치고 검사장 복도에서 결과를 기다리던 그 짧은 시간에 떠오른 많은 생각들이 기억났다.


허약하기 짝이 없던 내가 신체등급 1등급으로 ‘현역’ 판정을 받는 순간 난 무엇을 떠올렸던가? 대한민국 신체 건강한 사내임을 뿌듯해했을까? 아니면 심심찮게 가십거리로 뜨는 정치인이나 연예인 관련 보도처럼 병역검사가 공정하지 않다고 의구심을 가졌을까? 아마 두 생각 모두를 공유하고 있지 않았을까?


이미 수술에 대한 희망 회로로 내 머리는 채워져 있었기에 당연하다는 듯 수술일자를 결정하고, 수술 전 몇 가지 주의사항을 듣고 통화를 마쳤다.




마침내 수술 하루 전 날. 난 예전에 ‘담낭 제거 수술’과 ‘허리디스크 치료’로 몇 주를 입원한 경험이 있었다. 그에 비하면 입원도 없고 수술 후 바로 퇴원이 가능힌 시술임에도, 가족에겐 태연한 척하면서, 마음속으로는 두려움을 완전히 떨쳐내지 못했다.


과연 옳은 결정을 한 것일까? 지금이라도 취소할까? 별별 생각으로 편히 잠을 못자고 일어난 토요일 아침. 비장한 각오로 집 문을 나섰다.


수술실로 안내된 난 CT 촬영기와 흡사한 기구에 누웠다. 의사 선생님이 긴장하지 말라고 웃어주었지만 엄청나게 번쩍이는 것이 점점 다가와 내 눈에 거의 닿을 듯 쳐들어 오는데 그 위압감은 피할 길이 없었다.


레이저로 내 눈의 각막을 살짝 벗겨내는 시술을 했다. 마취액 덕분에 눈에 별다른 통증은 없었지만 뭔가 타는 듯한 감각을 느끼면서 공포가 내 숨을 막는 듯했다. 다행히 그런 공포는 이내 끝났다.


후련한 마음으로 병원을 나왔다. 아직 안구 보호액 때문에 약간 흐릿했음에도 불구하고 안경 없는 맨 눈에 저 멀리 빌딩들의 간판들이 유혹적으로 들어왔고, 도로 위의 신호등이 사정없이 들이닥쳤다. 파란 하늘과 오렌지색 햇볕, 달콤한 맑은 공기가 두 눈에 만져지듯 느껴지자 오랜만에 생의 환희가 가득 차올랐다.




안경을 벗었을 때 식구들이나 지인들의 첫 반응은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 내 눈은 30여 년간 안경이라는 동료와 공존하였기에 그 헤어짐이 쉽지는 않았다. 눈은 안경 없이 민낯으로 세상에 바로 노출되는 것이 부끄러운 듯 한동안 자신의 존재를 최대한 드러내지 않으려 했는데, 그런 어정쩡한 표정은 보는 이들에게 어색하다는 분위기를 사정없이 뿜어냈다.


특히, 딸애가 그 특유의 솔직함(?)으로 ‘안경 벗으니 더 멍청해 보여’라고 놀려댔는데 촌철살인과 같이 내 마음을 후벼 팠다.


그러나 ‘시간이 약’이라는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점차 나의 맨눈은 원래 그랬던 것처럼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졌고 생활 속에서 편의성이 입증되면서 어느덧 찬사의 목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그렇게 얻은 내 눈의 자유는 조금씩 내 삶의 방향을 변화시켰다.


당연히 안경의 불편함이 없어졌다. 겨울철 추위나 한증막에 들어설 때에도 내 눈은 한 점의 흐릿함 없이 가벼워진 일상생활을 즐겼다. 코로나19 예방 차원으로 쓰는 마스크와 안경의 불협화음으로 인한 불편도 사라졌다. 오히려 안경이 뿌옇게 변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괜스레 안쓰럽기도 해서 뭐라도 도와줘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결혼 10주년을 기념하여 호캉스를 즐겼는데, 호캉스의 백미는 뭐니 뭐니 해도 고급 실내수영장에서의 '게으름'이다.


격조 높은 성인 풀(Pool)이 따로 있어, 연인들이 밀애를 즐기거나 혹은 혼자 썬 베드(Sun bed)에서 블루투스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책도 읽을 수 있는 안락한 시간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우리 부부는 딸애와 함께 성인 풀에서 수영도 하고 썬베드에서 영화도 보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무엇보다 수영할 때, 수경 없이 물속과 공기 속을 아무런 불편 없이 들어갔다 나왔다 하면서 안경을 벗으면서 누릴 수 있는 자유로움을 만끽했다.


자연스러운 수순이겠지만 나는 멋져진 내 눈에 걸맞은 더 멋진 선글라스를 선물했다. 매장 진열대에서 그 녀석을 처음 본 순간, 헉! 숨이 막혔다. 마치 날 위해 만들어진 선글라스 인양(자뻑의 극치!) 강렬하게 존재감을 뿜어내는데, 얘는 내 눈 그 자체였다.


선글라스를 쓴 내 모습을 거울로 보고는 탄성을 자아냈고,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결제한 영수증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있었다.




사람은 평소 안 하던 것을 해야 될 때, 그 어색함과 낯섦을 처음 넘기가 어렵지, 익숙해지자 거칠 것이 없었다.


마침 아내가 눈썹 문신을 새로 하려 하는데 배우자를 반값으로 해주는 이벤트가 있으니 나보고 같이 하자면서 자꾸 꼬드겼다. 이제 눈에서 광채가 나는데 눈썹이 이를 가려서는 안 되지 싶어 아내의 권유를 못 이기는 척 눈썹에 붓 칠을 했다. 역시나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곧 익숙해지고 잘했다는 평을 듣는 패턴이 이어졌다.


얼굴이 빛나는데 다른 데라고 그냥 놔둘 수는 없었다. 헤어스타일도 급속히 변했다. 그 전에는 안경테가 삐져나오는 게 보기 싫어서 옆 머리카락으로 덮는 스타일을 고집했다. 그러다 보니 옆머리가 뭉툭해지고 답답해 보였다. 안경을 벗은 후에는 그런 제한 없이 가볍고 산뜻하게 옆머리를 변화시켰고, 이는 보는 이로 하여금 캐주얼한 젊은 분위기를 느끼게 해 주었다.


얼굴이 젊어졌는데 몸통과 팔, 다리가 따로 놀아서야... 언제부턴가 나는 옷도 사고, 시계도 사고, 신발도 샀다. 점점 색채가 화려해지고 젊은 취향이 나와 잘 어울렸다. 평소 멋진 자동차를 좋아했지만 차마 자동차를 바꾸지는 못했고 그 내부의 각종 액세서리(개인적으로 난 ‘유니언 잭’ 무늬를 좋아했다)를 채우는 것으로 대리 만족해야 했다.


이러한 외부의 변화에 동조되어 내면의 자의식도 기존의 격자 틀에서 조금씩 엇갈려 비껴갈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예전 같으면 내겐 허락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아직은 아니고 좀 더 시간이 지난 후라며 미뤘을, 부러우면 지는 것이니 아예 체념하였던, 남들에게 보이기 창피해서 숨겼던 것들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태어나면서 물려받은 DNA(키, 비만도, 건강 수준, 성격의 일부분 등을 결정하지 않을까), 흙수저인 가정환경(우스갯소리로 흙수저도 ‘등급’이 있다고 한다), 그 흙탕물 속에서 가까스로 마련한 작은 나만의 공간(가정, 직장, 경제력, 미래에 대한 전망 등)을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누구의 치기 어린 허튼짓 인양 코웃음 쳤던 ‘버킷리스트’를 만들어서 하나씩 실행하기로 결심했다. 오롯이 나만을 위해 많은 투자(시간)를 하였다.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멀리 했던 책들을 읽었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연관 책이나 지식(영화, 리뷰)에 대한 목마름을 게걸스럽게 채워나갔다. 그렇게 쌓인 지식(호기심)과 소소한 일상을 토대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글을 쓰면서 나에 대해 다시금 돌아보게 되었다. 어둡다고 생각했던 내 삶은 그렇게 불행하지만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지난날 비참했던 패배도, 영광의 왕관도 모두 품고 보듬고 가야 할 내 소중한 추억임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를 현실세계에 접목하는 건 그리 쉽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전문가의 상담도 받으면서, ‘내 안의 아이’가 이제라도 잘 자라도록 심적, 물적으로 필요한 영양분을 채워주고 있다.




언제였던가, 누가 자기 인생영화라고 <가타카(Gattaca)> 추천해 주었다.

영화는 유전자가 스펙이 되는 시대에 인공수정이 아닌 유전자 조작 없이 태어나, 유전자적 열성인자인 주인공이 그 시스템에 반기를 들며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않는 ‘빈센트’(에단 호크 분)에 대한 이야기이다.


영화를 보다 보면 가슴 뭉클하게 만드는 대사가 나온다. 세상의 편견에 끝까지 저항하며 노력한 끝에 성인이 된 어느 순간부터 빈센트는 동생과의 수영 경주에서 이기고, 더 나아가 힘이 빠져 물속에 가라앉은 동생까지 구해주었다. 그때 빈센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무슨 수로 이겼는지 알고 싶어? 난 돌아갈 힘을 남겨두지 않아, 안톤. 그래서 널 이길 수 있었던 거야.”



나는 지난 과거를 그런 결의로 살아왔던가? 그렇다고 긍정할 수 없기에 가슴 저 아래가 늘 묵직하게 짓누른다. 너무나 유약해서 유혹(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나를 스쳐갔던 모든 자극)에 쉽게 빠졌고 목표는 세웠지만 그것을 삶의 의미로 승화시키지 못했기에 인생의 중요한 기점에서 번번이 실패하였다.

지금 내 무의식 속에서 겪고 있는 수치심과 나에 대한 분노, 자괴감은 대부분 빈센트의 물음에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하는 나의 과거 때문이다.


내 눈과 내 의식, 그 너머의 무의식까지를 은폐하고 있던 장막을 걷어내자 난 무척 가벼워지고 자유로워졌다. 불교의 ‘제법무아’(諸法無我)까지 논할 의도는 없지만, 내 인식의 한계가 옅어졌음은 확실하다. 이제는 좀 더 의지적인 내 모습을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앞으로의 내 행보에 대해 기대 반 우려 반이라는 표현이 솔직한 심정이지만, 지금 움직이고 있는 관성에 재갈을 물릴 생각은 없다. 어디로, 얼마나 더 파격적으로 갈 것인가? 가만히 눈을 감고 호흡을 가다듬으며 조용히 그 패턴을 기다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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