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 B급 감성(2)

내 인생의 한 순간(One moment in time)

by 태현

- 비 오는 날 B급 감성(1)에서 계속 -



14시 20분.

늦은 점심을 먹었다. 아침도 대충 먹었는데 점심도 늦어 위장에서 벌써 급전을 보낸 지 오래다. 뭘 먹을까 고민하면서 냉장고를 열어보니 마땅한 게 별로 없다. 냉동 칸에는 함박스테이크, 마라탕, 육개장, 베트남 쌀국수 등이 있었지만 이것들을 먹으려면 얼마간 해동시켜야 하는데 그 시간만큼 참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는 수 없이 달걀 2개를 프라이해서 김치와 먹었다. 어제 먹다 남은 통조림 참치도 있어 대충 끼니는 때울 만했다.


바둑을 수담(手談)이라고도 한다. 내가 놓는 한 수 한 수는 곧 내 뜻이고 말이 된다. 한 판의 바둑엔 수많은 대화가 있고 갈등이 있다. 시비가 생기고 화해와 양보가 있다. 이기기 위해 목청을 높이는 수도 있고, 엄살을 부리는 수도 있다. 이기기 위해서, 승리하기 위해선 상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내 말만 해서는 바둑을 이길 수 없다.

- 윤태호, 앞의 책 6권, 2013, pp.96~97. -


가끔 회사에서 있었던 사건의 잔상(殘像)이 오래 남는 경우가 있다. 분노에 치를 떨다가도 갑자기 부끄러워지기도 한다. 일의 옳고 그름의 여부를 떠나 고작 그런 것 때문에 내 감정을 드러냈다는 사실이 쓰라린 생채기로 돌아온다. 정의를 위한 '진격의 거인'보다는 불의를 보고도 고개를 돌릴 수 있는 '후퇴의 소인'이 되고 싶은데...



17시 30분.

아이가 학원에서 돌아왔다. 요일마다 가야 할 학원이 다르니 끝나는 시간도 제각각이다. 하교 시간까지 계산하면 아이의 동선을 파악하고 대응하기가 쉽지 않다. 오늘은 방문학습도 있어서 저녁을 일찍 먹고 학습지 확인도 해야 한다. 저녁은 또 뭘 먹을까 고민하면서 우선 간식을 준다.


오늘은 기분이 좋은지 학원에서 친구들과 있었던 일을 재잘재잘 얘기해 주는데 천사의 음성이 따로 없다. 아홉 번의 격정이 한 번의 기쁨으로 모두 해소된다. 약간의 여유시간에 아이는 자기만의 공간에서 인터넷 검색을 하거나 유튜브를 볼 것이다. 어쩔 땐 어른들보다 아이들 스케줄이 더 빡빡하다.



19시 00분.

저녁을 먹는다. 별 계획 없이 쉬는 날이라 반찬 준비가 소홀하다. 늘 하던 대로 달걀찜, 순두부, 김, 동치미 그리고 방금 끓은 조그만 밥 한 공기가 아이의 식탁 쪽에 차려진다. 아까 먹은 간식 때문에 배고픔이 달아나버려서인지 밥 양이 너무 많다고 투정이다.


언제나 저 소리를 안 하는 날이 올지. 제아무리 콩나물 콩이라도 물을 안 주는데 쑥쑥 자랄 수 없음을 언젠간 몸으로 체득하겠지만 그땐 이미 많이 늦고 후회만이 남을 것을 잘 알기에 맘이 불편하다. 어느 부모가 자녀 미래에 대해 걱정하지 않겠느냐마는, 딸애의 키만 생각하면 끝도 없는 메타세콰이아의 그늘이 내 키를 훌쩍 넘어 온 세상을 덮을 것 같은 답답함에 명치 한 편이 묵직하다.



19시 40분.

급하게 식탁 정리하고 집안 환기를 시켰다. 우리 집도 사람이 사는 집처럼 보이도록 눈에 띄는 곳 위주로 청소한다. 그 사이에 딸애는 마저 못한 학습지를 광속으로 처리하는데 그저 놀라울 뿐이다. 아이가 양치할 때 나는 마지막으로 아이방 정리를 하고 학습지 선생님의 자리까지 준비가 끝나자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쉰다.



20시 00분.

오늘도 정확히 선생님이 오신다. 가끔은 혹시 인공 로봇이 아닐까 의심해 본다. 하나의 군더더기도 없이 똑같은 패턴으로, 경쾌한 하이톤 음성으로 인사하고 위생상 화장실에 들러 손을 씻은 다음, 딸애를 불러 지난 학습지를 점검하고 수업을 이어간다.


거의 같은 시간대에 거의 같은 아이의 즐거운 비명 소리, 데자뷔처럼 느껴진다. 그런 생각 속에서 내 손은 여느 때처럼 선생님 간식을 준비한다. 선생님과 내가 다른 건 나는 거의 같은 간식을 내놓기 싫다는 것. 난 인공 로봇이 아니다.


20시 25분.

오늘 수업에 대한 선생님의 간단한 브리핑이 끝나고 또 익숙한 그림의 배웅이 끝나면 대충 오늘의 큰 줄기는 마무리되는 분위기다. 아이도 같은 마음인지 나에게 눈짓으로 신호를 보낸다. ‘각자 잠시 쉬죠.’ 무언의 동의하에 나도 침대에 누워서 매트리스에 등을 댄다.


얼마 전에 구입한 침대 ‘토퍼’의 안락함과 지지력이 오늘 하루도 훌륭히 버텨 온 내 몸의 각종 도가니들을 마사지해 준다. 잠시 상상의 강에 떠서 이런저런 생각 속을 부유(浮遊)한다.




가끔 회사 책상 모니터에서 잠시 눈을 떼고 사무실을 살펴볼 때가 있다. 다들 맡은 업무나 민원에 관해 고민하고 기획서나 각종 결재서류를 작성하고 있다. 그런 팀원들의 모습을 보면 생각이 많아진다. 얼마 전까지의 내 모습이 그랬으니까.


사무실 속 풍경은 회색 선글라스를 쓴 듯 온 세상이 무채색의 단조로움 속에서 활기란 전혀 없어 보일 때가 있다. 마치 영화 <매트릭스>에서 진짜 현실이지만 가상의 세계보다 못한 세계처럼 말이다.


그렇다고 그들을 동정해서도, 어쭙잖은 위로를 해서도 안 된다. 그들은 지금 반드시 익혀야 할 과정을 거치고 있을 뿐이다.


기초 없이 이룬 성취는 단계를 오르는 게 아니다. 성취 후 다시 바닥으로 돌아오게 된다

- 윤태호, 앞의 책 7권, 2013, p.57. -


마치 알에서 깨어나 애벌레를 거쳐 번데기가 되어 어둡고 춥고 좁은 공간에서 힘들게 자신의 몫을 해내야 한다. 드디어 자신의 무게를 감당할 때가 되면 껍질을 스스로 찢고 세상으로 나와 멋진 나비가 될 것이다. 따스한 온기가 있는 밝은 세상에서 마음껏 훨훨 날개 짓을 할 수 있으리라 확신하며 이곳저곳을 들여다보겠지.


그러나 항상 조심해야 한다. 세상은 그리 낭만적인 곳이 아니다. 이 아름다운 꽃밭에는 달콤한 향기가 나지만, 덫을 만들어 아가리를 벌리고 기다리는 거미가 있고, 어린 새끼의 배고픔을 해결하고자 부지런히 먹이를 찾고 있는 새들도 있으며, 별 의미 없이 장난 삼아 예쁜 것을 잡아보고자 하는 어린 인간들도 많기 때문이다.


완전한 안식과 편안함을 주는 시공간은 없다. 만약 그걸 느끼고 있다면 당신은 환각에 빠졌거나 스스로를 기만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그걸 추구한다면 당신은 너무 오만하거나 자신이 호모 사피엔스라는 것을 망각하고 있음을 명심하라.


조물주는 어떤 피조물에게도 자신과 같은 권능과 지위를 허락하지 않으셨다. 당신은 한 류(類)의 피조물일 뿐이다.




21시 30분.

집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오늘은 아내의 귀가가 좀 더 늦다. 피곤한 얼굴 속에서도 가족을 볼 수 있다는 안도의 표정이 엿보인다. 아이가 달려 나가 반갑게 안아주면 좋으련만, 우리 아이는 이럴 때 더 시큰둥하다. 일부러 아는 체를 하지 않는다. 부모가 먼저 알아봐 주고 안아주고 물어봐 주길 바라는 배배 꼬인 꼬마요정이지만 그 속마음이 무엇인지 알기에 맞춰준다.


아내는 먼저 아이의 기분을 살피고 집안 분위기를 보며 안도의 숨을 쉰다. 도레미파 ‘솔’ 톤으로 본인의 하루 일을 내게 요약해 준다. 내가 잘 받아주면 좋겠지만 그런 날은 별로 없는 것이 인생인가 보다. 어쩌다 그런 날이 오면 이번엔 아이가 훼방을 놓는다. 엄마와 아빠가 자신이 모르는 세상을 두고 다정하게 얘기하는 게 부러운 걸까?


재무팀장 : 자, 그럼 투덜거림은 이 정도로 하고 업무 이야기할까요?
오 차장 : 아닙니다. 듣고 보니 저희 역시 이해와 설득에서 좀 서툴렀던 것 같습니다. 다시 준비해서 찾아뵙겠습니다.
(중략)
김 대리 : 재무팀에서 부장님 거 계속 깠잖아요. 어떻게 통과된 거예요?
오 차장 : 그냥 가만히 들어주기만 했지. 재무팀이 어디 하소연할 데가 있는 팀인가. 스스로 고민 토로하고 질문하고 답하더니 서류 다시 검토하고선 진행하자고 하더라니까

- 윤태호, 앞의 책 8권, 2013, pp.79~83. -


22시 00분.

키 작은 딸애를 일찍 재우기 위해서는 이제 정리하고 잠 잘 준비를 해야 하는데 엄마 아빠가 다 모인 이 시간이 아이에게는 놀 시간의 시작일 뿐이다. 몸도 마음도 지쳐가는 시간인데 아이의 맘을 어디까지 만족시켜줘야 할지 생각하는 시도조차 불쾌지수를 높인다. 딸애는 이런 내 표정을 애써 모른척하면서 계속 일을 키운다. 놀이를 위한 스토리를 구성하고 장난감을 배치하고 배역을 결정한다. 나는 항상 악역이나 행인 1, 행인 2이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짜증이 놀이 진행을 매끄럽지 못하게 방해했고, 생각했던 그림대로 놀이가 안 되자 아이가 폭발한다. 하루 종일 참았던 감정의 충돌은 항시 작용․반작용이다. 이 밤에 한이 서린 울음소리가 집 안에 울려 퍼지면 나란 존재에 대한 회의가 밀려온다. ‘가족이 소중하다면서 너는 고작 무엇을 하였단 말인가? 아이가 사랑스럽다면서 넌 그녀에게 네 사랑을 준 적이 있는가?’

자고 있는 아이들을 보며 퇴근하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아이들을 보며 출근하고... 그러다 잠깐이나마 함께 있을 땐 과장이다 싶게 호들갑스러운 친근감을 나눴는데, 막상 말을 나눠보니 서로 너무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던 것 같았다고.

서로를 위해 사는 것처럼 스스로를 위로하며, 떨어져 있던 그날들 동안 서로의 상상 안에 어떤 아빠와 어떤 자식을 만들고 있었는지...

- 윤태호, 앞의 책 9권, 2013, p.194. -


22시 30분.

사람의 감정은 영원하지 않다. 기쁨도, 슬픔도, 분노도, 외로움까지도 일시적이다. 감정이란 그저 우리 뇌에서 일어나는 잠깐의 전기적 자극일 뿐이다. 아이에게 내일을 위한 가방을 싸라고 말한다. 학교 가방과 학원 가방. 전혀 이질적인 두 가지 물체를 매일 창조한다. 다시 이성의 끈을 잡은 아이는 중요한 의식을 치른다.


우선 연필을 깎는다. 여전히 뾰족한 것 같은데 필통 안에 든 일곱 자루의 연필을 다시 깎는다. 각 연필은 용도가 정해져 있다. 잘 짜인 연출처럼 정확하게 그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아이는 대본을 숙지한다. 그 필통엔 연필만 있는 건 아니다. 영화에 주연만 있는 게 아니니까. 사인펜, 색 볼펜, 지우개, 자, 테이프 등이 맡은 자리에서 궂은일을 해낸다. 가방이 두 개이니 필통도 당연히 두 개다.

필통이 끝나면 숙제를 확인하고 미처 안 했으면 그때서야 하기 시작한다. 준비물도 챙기고, 그러다가도 무엇인가 생각나면 또 잠깐 딴 세상에 들렀다 오기도 하고... 결국 오늘도 아이의 성장판 촉진에 도움이 되는 골든타임을 놓쳤다. 허탈과 체념이 교차되면서 하루가 저물어 간다.



23시 00분.

아이 양치를 시키고 방에서 재우려고 한다. 아직 무섭다고 제 방에서 자지 않고 엄마 아빠랑 안방에서 잔다. 아침 일어날 때만큼이나 잠 잘 때도 쉽지 않다. 잠이 안 온다며 책을 읽어달라고 한다. 도깨비방망이를 가졌다고 생각하는 건가? 뭐든지 요구하면 들어줄 수 있다고 확신하는 것일까? 아니면 어디까지 가능한지 끈질기게 한계를 확인하는 중인가!


대부분 마지못해 책을 읽어주지만 너무 피곤하면 그냥 자기도 한다. 잠이 안 온다고 한지 십 분도 안 지났는데 금세 아이의 숨소리가 달라졌다. 아내도 피곤했던지 곧 잠에 빠져들었다. 그러면 난 말없이 거실로 나온다. 자기 전에 먹어야 할 약도 있고 여러 가지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날에는 더더욱 거실을 헤맨다.




그래... 이런 게 회사였지. 감정적 얽힘을 최소화하려는 사내 에티켓, 업무 프로세스... 그것을 인지하고 맞추는 사람들. 업무만 아니라면 크게 부딪힐 일도 사적으로 시간을 나눠야 할 필요도 없는 관계. 이런 게 회사였지. 일 하나 하면서 무슨 일씩이나 하는 사람이 되려고 했을까.
(중략)
이런 거에 충족감 느껴봐야... 우리만 힘들어진다고요. 그런데 왜... 외롭냐...

- 윤태호, 앞의 책 9권, 2013, pp.232~234. -


10년 간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새로 시작해야 했던 그 초심을 끝까지 잃지 않는다면, 그래서 조직의 사내정치로부터 초연할 수 있다면 진정 자유인(?)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너무 늦어 헤어 나오지 못할 늪에 빠지기 전에 그 마음과 자세를 내 뼈속에 심는다.


‘손들고 무릎 꿇고 서 있어’가 난무하는 조직. 어깨에 힘을 빼고 부드럽게 움직이는 것은 모든 운동의 원리이자 조직생활의 원리이기도 한다. 후회하고 자괴감에 빠져 또 다른 후회를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다. ‘승진이나 개인의 안전을 도모하지 않고 일 자체의 맛과 멋에 취한 직원’ 난 이런 평을 들을 수 있을까?


가끔 내 몸의 배터리가 다 방전되어서 모든 것이 지겹고 포기하고 싶을 때면 듣는 노래가 있다. 휘트니 휴스턴의 ‘One Moment In Time’. 전 세계 팬들에게 사랑과 희망, 삶의 희열을 전해주었건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삶 자체는 사랑과 희망을 잃고 슬프게 마감되었다.


One Moment In Time

I want one moment in time
When I'm more than I thought I could be
When all of my dreams are a heart beat away
And the answers are all up to me

Give me one moment in time
When I'm racing with destiny
Then in that one moment of time
I will feel, I will feel eternity


인생이라는 건 어떻게 보면 삶의 매 한 순간 한 순간들의 총합이다. 삶의 방향은 중요한 순간의 전환점에서 결정되고 바뀐다. 그런 결정적 순간이 나에게도 왔었는지, 아직 오지 않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쩌면 조만간 오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딸애와 보내는 이 시간도 그 전환점의 하나일 것이다. 내 삶 가운데 보석같이 빛나는 소중한 순간. 그렇기에 그 한순간을 감사히 맞이할 수 있도록 늘 깨어있는 마음으로 등불을 준비하리라.


“모르페우스여, 얼마 남지 않은 이 밤을 풍요롭게 만들어 주소서. 한없이!"


*모르페우스 Morpheus.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꿈의 신이다. 아편의 주성분인 모르핀(morphine)의 어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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