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멋. 한. 글.

좀 더 멋진 인생을 꿈꾸며 쓰는 한 편의 글

by 태현
다만 생존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산다는 것.

그것은 무엇일까? 표류하는 삶이 아니라 항해하는 삶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깊은 고독 속에서 내면으로 침잠해가는 시간과 마주할 때에야 우리는 비로소 깊이 이해하게 된다. 인생을 산다는 것은 내적으로 성장해가는 것임을 말이다.

성장. 이것은 일생이라는 제한된 시간 속에서 내가 성취해야만 하는 숙명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어떻게 성장에 이를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우선 표류하는 자신을 깨뜨리는 것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을 깨뜨리기 위해서는 외부의 힘이 필요하다. 그 외부의 힘이란 나를 불편하게 하는 오래된 지혜이다.

지혜. 정보와 지식이 넘치는 사회가 되었지만, 모든 지식이 지혜일 수는 없다. 일상에서 표류하는 자신을 멈춰 세우고 깨달음으로 밀어 올리는 불편한 지식들을 만나야 한다. 그 지식들은 지혜가 되어 우리를 성장하게 할 것이다.

- 작가 '채사장'이 쓴 책 <열한 계단>의 '저자의 말'에서 인용 -




참 좋은 문장이다. 보면 볼수록 그 깊이를 더해 나에게 울림을 준다. 내가 채사장의 <열한 계단>을 만난 지가 벌써 육 년 전인데 아직도 가끔씩 이 문장을 읽는다. 어떻게 사는 것이 표류하지 않고 항해하는 인생인가? 내적으로 성장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나 스스로 이런 의문이 들 때마다 이 책을 슬쩍 들여다 본다. 군데군데 책에 줄 그은 것도 나오고 그 옆에 깨알같이 써 내려간 내 메모도 보인다. 지금 보면 좀 창피하기도 하지만 그 또한 그 순간의 나이다.


난 단편소설을 좋아한다. 단편이 주는 가볍다는 매력과 짧기에 군더더기 없이 경쾌하게 진행하는 속도감이 좋다. 그러면서도 그 속에서 깨알 같은 반전으로 마무리되는 책들은 정말 나의 존경심을 한없이 받는다.

'오 헨리', '어니스트 헤밍웨이', '조지 오웰', '앙투안 드 생텍쥐베리', '톨스토이', '애드가 앨런 포우', '김훈', '박완서', '나쓰메 소세키', 그리고 '테드 창'. 지면상 다 적을 수 없을 뿐 나에게 적지 않은 영향력을 준 많은 작가와 그들의 단편들이 있다.


물론 단편만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장편임에도 좋은 책들이 얼마나 많은가. 얼마 전에는 어떤 관계성(독자 여러분들이 상상해보라)으로 인해 대작들을 연속으로 읽어나가느라 꽤 고생했지만 정말 기쁘고 감동적인 노역이었다.


'아이작 아시모프'의 <파운데이션(전 7권, 3560페이지)>, '프랭크 허버트'의 <듄(전 6권, 4304페이지)>,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전 6권, 4150페이지)>, 'J.R.R. 톨킨'의 <반지의 제왕, 호빗, 실마릴리온, 끝나지 않은 이야기 세트(전 6권, 3560페이지)>를 다 읽고 그 상관성에 대한 내 생각을 글로 정리하기까지 약 두 달 이상이 걸린 것 같다.





글을 쓴다는 것은 무엇일까?


갑자기 근원적으로 접근하니 무한한 바닷속에서 한 알의 진주를 찾는 것처럼 그저 막막하고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럼 가장 원초적으로 접근해 볼까? 음... 쉽게 생각하면 지금 이 순간 내 뇌에 전기적 자극으로 생기는 갖가지 환영과 부유물들 중 내가 의미를 부여하는 일련의 것들을 적어내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고 떠오르는 대로 아무것이나 적어서는 좋은 글이 될 수 없다. 내 경우는 쓰고 싶은 내용을 생각하며 떠오르는 이런저런 것들을 잘 곁들어 준다. 쓰고자 하는 글에 어울리는 추억담이나 생각나는 책, 떠오르는 노래, 강렬한 인상을 주었던 영화 등을 골고루 잘 섞어준다. 마치 세계적인 음식이 된 우리의 '비빔밥'처럼 말이다.

안타깝게도 내 글 쓰는 호흡이 brunch 대다수 작가들보다 많이 길기에, 기존에 썼던 글에서 기름기(각종 에피소드, 상세한 각주들)를 꽤나 많이 빼야 했다. 어찌 보면 한결 가벼워지고 명료해진 느낌도 있어 꼭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닌 듯싶다. 그래도 여전히 긴 건 어쩔 수 없다.


단편소설 쓰기가 내 버킷리스트 중 하나이다. 아직 소설을 쓸 만큼의 실력이 안 되기에 우선 시작한 것이 에세이, 내 일상의 습작물이다. 점점 쌓여 필력이 생기면 언젠가는 단편소설을 쓸 수 있지 않을까? 혹 내 생에 이루지 못하는 꿈으로 남을지라도 한 발 한 발 전진해 가련다.


내가 쓴 에세이들은 비록 소설은 아니지만, 각각 기승전결로 이루어진 한 편의 완결물이다. 만약 누가 내 brunch book을 읽게 된다면 순서와 상관없이 색깔 별로, 맛 별로, 스타일 별로 각자의 취향에 맞춰 골라 읽어도 좋으리라 생각한다.




우리 가족은 나, 아내 그리고 딸애 세 명이다. 딸애도 제법 책을 많이 읽는다. 특히, ‘히로시마 레이코’의 광팬이다. 그녀의 작품들(<이상한 과자가게 전천당>, <십 년 가게>, <요괴의 아이를 돌봐드립니다>. <비밀의 보석가게 마석관>)은 다 읽었고 우리 집에도 적지 않은 책을 소장하고 있다.

‘히로시마 레이코’는 판타지 동화작가치고는 꽤 여러 권의 장편 소설을 줄기차게 쓰고 있는데 쓰는 책마다 베스트셀러로 올라있다. 책마다 글의 전개가 비슷하게 진행되는 것 같아, 내 속으로 ‘우리 딸애도 저런 책을 많이 봤으니 비슷한 책을 써 보는 것도 좋겠다.’라는 생각을 자주 했었다.


어느 날인가 나는 딸애에게 물어보았다.


“<전천당> 같은 책을 써 보는 건 어때? 아빠가 보기엔 너도 잘 쓸 것 같은데?”

“난 책 읽는 건 좋은데 쓰는 건 별로. 난 나중에 유명한 유튜버가 될 거야. 아빠도 글 쓰는 거 그만둬. 별로 못 쓰잖아.”


아이는 내 작품에 대해 아주 매몰차게 평가했다. 내가 처음 단편을 썼을 때 스스로 뿌듯해서 아내와 아이에게 보여준 적이 있었다. 아내의 따스한 격려와는 달리 아이(당시 9살)는 근심 걱정 어린 표정으로 글을 읽더니 그 종이를 내게 던지며 이렇게 말했다.


“아빠의 이런 재미없는 이야기들을 누가 읽겠어? 사람들은 아빠의 어렸을 적 일에 아무 관심도 없을 걸? 차라리 아이들이 읽는 동화책을 쓰는 게 낫겠어. 고양이를 주인공으로 해서. 그렇게 한다면 내가 이야깃거리도 많이 주고 학교에서 홍보도 해줄게, 물론 내가 홍보한다는 건 모르게.”


지애비를 닮아서일까? 사람 마음속 후벼 파는 얘기를 어쩜 저리도 능청스럽게 잘하는지. 그날 이후 아이에겐 내 작품을 보여주지 않았다. 어쩌다 몰래 보려고 해도 내가 깜짝 놀라 숨겼다.


곰곰히 생각해 보면 딸애의 말이 영 틀린 말도 아니다. 아이에게서 작은 격려의 말이라도 나올 정도의 글이 써진 다음에나 보여주려고 미루고 있다. 하지만 그때가 언제나 오려는지, 아마 영영 안 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차라리 속 편하게 해 준다.




사실 내가 글을 영 못 쓰는 건 아닌데, 그렇다고 탁월한 필력이 있는 것도 아님을 스스로 잘 알고 있다(개인적인 판단으로 필력은 ‘김훈’ 작가가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그러함에도 글쓰기를 계속하는 이유는 즐거워서다. 그리고 대견스럽다. 무언가 내 인생을 위해 추가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사실이 날 기분 좋게 한다.


책을 읽다 보면 많은 가상의 인물과 만나고 그들의 고민과 고통을 느낄 수 있다. 그런 것 중에서 나에게도 비슷한 감정이나 연민이 생기면, 내가 겪었던 경험과 유사한 줄거리가 떠오르면 나도 몇 자 적어 보던 것이 이제는 ‘단편’이라는 거창한 수식어가 붙어서 포장되고 있다.


타인에게는 허섭스레기 같더라도 내게는 ‘금쪽같은 내 새끼’이다. 어느 날엔가 이 단편들이 한 권의 책으로 묶여서 출간된다면 내 책장 중 가장 고귀한 곳에 꽂힐 것이고, 나는 한참이나 ‘금쪽이’들을 품에서 떼어내지 못할 것이다.


책을 읽고(내 책장에 개인 컬렉션을 마련하고), 영화를 보고, 노래를 들으면서 이렇게 글을 쓰는 나에게 스스로 큰 축하와 격려를 주고 싶다. 이런 좋은 기회를 나에게도 허락해 주신 신께 감사드린다.


좀 더 멋진 인생을 꿈꾸며 쓰는 한 편의 (좀. 멋. 한. 글.)! 내 인생이 더욱 다양하고 활기차게 될 거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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