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태현 Oct 19. 2022

용과 독수리의 제국

진.한제국과 로마제국의 천년사 비교

 


 토요일 아침이었다. 날씨가 좋아서 몸과 마음도 날아갈 듯 가벼웠다. 집 근처에 있는 도서관에 갔다. 몇 주 전에 대출받은 책을 반납하고 겸사겸사 딸애가 빌려달라고 한 책 심부름도 해야 했기 때문이다.


  ‘동화도서관’이라 이름 붙여진 곳인데 1층만 있는 아담한 도서관이다.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아이들과 같이 온 가족들이 제법 있었다. 도서관 문을 지나자마자 검색대에서 딸애가 원하는 책을 찾아봤지만 아뿔싸 벌써 대출 완료였다. 딸애에게 전화해보니 실망한 목소리로 ‘그냥 아빠가 아무거나 빌려 와.’ 하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이를 어쩌나, 이럴 때가 제일 난감하다. 잘못하면 심부름해주고도 욕먹을 상황이다.


  걱정스러운 맘으로 어린이 소설이 몰려있는 곳에 눈길을 돌렸다. 이 많은 책 중에서 뭘 골라야 하나.

마법사나 요정?(이건 좀 철 지난 것 같고.)

탐정소설?(지난번에도 별로 반응이 없었지.) 연애소설?(연애는 아직 보여주고 싶지 않아.)

과학 만화책?(시리즈 책이 너무 많아, 무거워.)

그럼 어떤 책? 그 책이 그 책 같은데, 슬슬 피곤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생각했다. 그냥 고양이 나오는 책이면 되잖아! 제목에 고양이가 들어가고, 책 중간중간에 삽화로 귀여운 고양이 그림이 들어있는 걸 받으면 아마 이렇게 말할 거야. “어머 고양이 정말 귀여워잉~”


  그런 기준으로 엄선한 책이 「지구는 고양이들이 지킨다」와 「고양이달」이었다.



(후일담이지만 딸애의 반응이 내 예상만큼 좋지는 않았다. 역시 쉽지 않은 내 딸이다.)




  이젠 여유 있게 내 책을 고를 수 있겠다. 어린이 동화도서관치고는 성인 책들도 총류별로 많이 구비되어 있다. 내가 즐겨 보는 장르는 ‘환상’이나 ‘공상과학’ 소설이다. 오늘도 처음은 그쪽 서가에서 책을 뽑았다 넣었다 하며 한참을 헤매고 있었다. 서로 자기를 봐달라고 유혹적인 포즈를 취하고 있는데 내 눈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우선 책 표지가 인상적이어야 한다. 책 제목이나 작가, 내용은 그 뒤의 선택 기준이다.


  그렇게 내 것도 아닌 책들을 보면서 혼자 책 부자가 된 듯 도서관 서가들을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며 즐거워하다가 문득 역사류 서가에서 어느 두툼한 책에 마음을 뺏겼다.


「용과 독수리의 제국 : 나라는 어떻게 흥하고 망하는가! 진秦․한漢과 로마, 두 제국의 천년사」

진秦나라 발흥에서부터 서로마 패망에 이르기까지
유라시아 양쪽 대척 지점의 1,200년 역사 비교

유라시아 대륙의 동서 양쪽에 있는 진(秦)·한(漢) 제국과 로마제국의 발전 과정을 비교한 책. 두 제국의 흥망성쇠를 실마리로 삼아, 양대 제국의 정치·경제·군사·민족·사상·관습 등 다방면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총체적으로 탐구했다. 특히 두 제국의 같고도 다른 유산이 제국 멸망 후 지금까지 동·서양 세계에 미친 막대한 영향력을 강조하면서 그간의 역사적 교훈과 대국 통치의 방법을 총괄했다.


  책 소개 글이다. 저자의 이력 또한 흥미로웠다. 저자인 ‘어우양잉즈’는 역사학자가 아닌 MIT 물리학자였으나 전공의 한계에 갇히지 않았다. 자신의 전문 분야에서 배운 분석 능력을 다른 분야에 적용하여 기존의 시각을 뛰어넘는 융복합적인 성과물을 내놓았다.


  무엇보다 이 책을 선택하게 된 진짜 이유는 얼마 전 우연히 보게 된 어느 "온라인 댓글"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아니지만 대략 이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로마제국의 영역이나 경제규모, 사회․법 제도 등이 발달하기는 했지만 그건 지중해에 국한된 평가이다. 같은 시기 중국의 진․한제국에 비하면 대단하지 않다. 서구 중심의 과장된 평가가 짙다.


  그 당시 난 공상과학의 ‘은하 제국’과 관련된 책(「듄」, 「파운데이션」)과 함께 「로마제국 쇠망사」에 빠져 있었고, 로마제국에 대해 어떤 경외감 같은 걸 가지고 있었다. 로마제국에 대한 궁금한 자료를 찾다가 이런 댓글을 보면서 처음에는 ‘이 무슨 허무맹랑한 소리냐’ 하고 비웃었지만, 이내 내가 모르는 내용들이 아직 많다는 생각을 했다. 기회가 닿으면 로마제국과 역사적으로 비슷한 시기였던 중국의 진․한제국에 대해서도 알아봐야겠다는 호기심이 생겼다.  


  기가 막히게도 그 궁금증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책을 발견한 것이다. 그렇게 난 이 책을 대출하여 읽게 되었다. 중국 진나라와 한나라 그리고 로마를 비교한 두 제국의 천년사라니. 게다가 장장 920쪽의 두께에서 벌써 압도된, 그래서 살짝 후회되기도 했지만 알고 싶은 지식의 향연에 당당히 초대된 느낌에 한껏 고무되었다.




  총 2부, 제8장의 목차로 구성된 이 책은 제1~2장에서 서막처럼 서서히 들어가, 제3~4장에서 누구나 좋아하는 전쟁 이야기로 흥미진진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제5~8장에서 드디어 서방 '독수리 제국’의 "팍스 로마나(Pax Romana)"와 동방 ‘용의 제국’의 "사해안정(四海安定)"을 비교해가며 정치, 외교, 국력 그리고 멸망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 설명해 준다.



  저자는 진·한과 로마 제국의 1,200년의 흥망성쇠를 과학적으로 비교 분석하며 공통의 법칙을 찾아낸다. 두 제국 모두 포용과 창의성을 바탕으로 변방 민족에서 천하의 중심이 됐다는 점이다. 


  두 나라는 본래 학문이나 기술에서 늘 적국보다 수준이 떨어지는 변방 민족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약점이 오히려 새로운 사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창조성'으로 연결됐고, 국가 조직에서도 효율적인 정치기관을 발전시켜 경제·군사적으로 더 유리했던 주변국을 흡수할 수 있었다고 저자는 분석한다.


  포용의 대상은 사물에만 그치지 않았다. 이들 제국에서는 군사 정벌-이주민 공동 거주-혈연의 뒤섞임이라는 습속이 발견된다. 이들은 패전국의 민중을 흡수·동화시킴으로써 다양한 민중을 정체성 있는 하나의 민족으로 빚어냈다. 외부 민족과의 결혼에는 불이익이 크지 않았고, 정복한 국가의 사람들에게도 호적과 권익을 부여했다.



  반대로 강한 '배타성' 탓에 확장·합병·통일을 이루기 어려웠던 그리스 도시국가들을 언급하며 “드넓은 포용이 제국의 확장과 유지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라고 강조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변방에서 중심이 된 두 제국은 마지막에 다시 변방에 무릎을 꿇었다. 진한제국(한나라)과 로마제국(서로마)은 각각 이민족인 흉노와 게르만족에 의해 멸망했다. 흥미로운 점은 흉노와 게르만 모두 인구나 물자 면에서 한나라와 서로마에 비해 매우 빈약한 상태였다는 점이다.


  여기서 또 다른 공통의 법칙이 발견된다. 제국은 밖이 아닌 안으로부터 무너졌다는 것이다. 저자는 두 제국이 외적을 물리칠 힘이 없어 쓰러졌다기보다는 내부의 압제와 부패로 국력을 소진한 끝에 자멸했다고 평가한다. 제국을 무너뜨린 것은 이민족이 아닌 오랜 기간 누적된 내부의 분열과 사리사욕, 정치 부패라는 것이다.


  천 년 제국은 결국 내부로부터 무너졌지만, 이들의 유산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진한은 유가 사상과 통치 철학을 유산으로 남겼고, 로마가 개발한 법치와 기독교는 서구 문명을 떠받치는 양대 기둥이 되었다.


  그러나 평행이론처럼 같은 길을 걷던 두 제국의 끝은 달랐다. 중국은 여러 제국의 흥망성쇠를 거듭하면서도 대제국의 형태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지만, 서로마 멸망 후 유럽은 다시는 통일 제국을 이루지 못했다. 비슷한 국력의 두 제국이 쇠망한 후 왜 유독 로마제국만 영원히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을까.


  에 대한 명확한 언급을 책에서는 찾을 수 없었다. 과거를 통해 현재를 인식하고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 학자의 책무 아닌가. 저자의 불친절에 답답해하던 나는 운좋게도 일간지에서 진행한 책 관련 이메일 인터뷰 중에서 그 대답을 엿볼 수 있었다.


Q  로마제국은 패망 후 복원되지 못했다. 진·한나라는 계속 승계됐다. 차이가 뭘까. 지리적으로 중국은 거대한 단일 땅덩어리인데 반해 유럽은 파편적인 땅이기 때문인가?
한제국 영토
로마제국 영토


A   내부적’ 지리보다 ‘외부적’ 지리가 중요하다. 유럽과 지중해는 모든 방면에서 침략과 문화적 영향에 노출됐다. 반면 중국의 적은 북방에 국한됐다. 이러한 지리적 특성 때문에 중국의 시야는 폐쇄적이었으며 내부로 향했다.

  로마는 ‘지중해 제국’이었다. ‘유럽적 제국’이 아니었다. 큰 차이가 있다. 로마인들에게 로마에 속하지 않은 유럽인들은 야만인들이었다. 그들은 수적으로 다대했다. 유럽의 땅들은 대체로 농업에 적합했다. 유럽의 ‘야만’ 부족들은 각기 정착해 고유의 정체성을 발전시켰다.

  반면 중국 북방 유목민들의 경제적 토대는 아주 작은 인구만 유지할 수 있었다. 중국을 침공한 유목민들은 농업에 적응하고 사라졌다. 중국에 새로운 피와 활력을 추가했다.
그리스 로마 문화는 지중해에서 많은 경쟁자를 직면했으며, 여러 지역에서 깊이 뿌리내리지 못했다. 반면 중국의 왕조들은 지역에 뿌리내리는 공동의 문화를 발전시켰다.




  21세기 패권 다툼의 ‘메인 선수’가 중국과 미국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세계정세는 ‘대국굴기(大國堀起·대국으로 우뚝 일어섬)’와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미국 주도의 세계 질서)’가 맞붙는 각축장이 된 지 오래다. 두 대국의 정치체제를 비교 연구하는 서적이 끊임없이 출간돼 온 이유이기도 하다.


  G2 시대. 두 주역의 뿌리를 간접적으로 비교한 이 책은 두 제국의 지리 환경·역사 조건·사회구조·관리를 속속들이 해부한다. 책 내용이 ‘미국보다는 중국 편향적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중국 편향적 정보, 그 자체가 우리에게 큰 의미가 있다. 지금까지 우리의 시각 자체가 미국에 치중된 것은 아니었는지, 균형 있는 인식의 저울추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미국과 중국은 세계가 주시하는 가운데 건곤일척(乾坤一擲) 혈투를 벌이고 있다. 미국은 우리의 군사, 안보의 혈맹이요, 중국은 우리의 가장 가까운 이웃이자 생활에 가장 밀접한 영향을 미친다. 양쪽을 모두 중시해야 한다. 양쪽의 여러 측면을 두루두루 살펴야 한다.


  누군가의 진면목을 알려고 한다면 그의 출생과 성장과정, 가족과의 관계 등 그 뿌리를 먼저 살펴야 한다. 미국과 중국의 뿌리를 캐다 보면 로마제국과 진·한제국이 나온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이 책을 읽어봐야 할 이유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