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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현 Nov 16. 2022

이그노라무스(Ignoramus)

모든 가능성은 열려 있다.


가고 오지 못한다는 말을
철없던 시절에 들었노라
만수산을 떠나간 그 내님을
오늘날 만날 수 있다면

고락(苦樂)에 겨운 내 입술로
모든 얘기 할 수도 있지만
나는 세상모르고 살았노라
나는 세상모르고 살았노라

돌아 서면 무심타는 말이
그 무슨 뜻인 줄 알았으랴
제석산 붙는 불이 그 내님의
무덤의 풀이라도 태웠으면


-   지덕엽 작사, 작곡. 활주로 노래 '세상모르고 살았노라',  -



  두 달 전쯤 K방송사 예능프로인 「불후의 명곡」  “송골매 특집 편”에서 가수 ‘신승태’가 락 밴드의 노래를 국악과 퓨전(Fusion)하여 멋지게 소화해냈다. 가사의 의미와 국악기의 울림이 내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래서 난 그 한 곡만 몇 시간 계속해서 연속 듣기를 했었다.




  며칠 전 일이었다. 그날도 퇴근해서 거실에 들어오니 딸애의 흔적이 함박눈 맞은 겨울 외투에서 떨어진 흐리멍덩한 물처럼 한쪽 길을 내고 있었다.


  중문에서 신을 벗자마자 땅바닥에 내던졌을 코로나 마스크와 양말, 조금 걸어가면서 벗어젖힌 겉옷이 보였다. 미처 자기 방에 도착하기도 전에 성질 급하게 내동댕이친 가방이 중심을 잃고 거실 구석에 볼썽사납게 넘어져 있었다.


  자기 방에서 돌아 나와 짬나는 시간에 간식으로 먹고 남겼을 과자 봉지가 거실 반대편에 덩그러니 놓였고, 그 옆엔 낙서 종이, 자르다 만 색종이와 가위, 풀 등이 흩어져 있었다. 벌써 수천 번은 더 얘기했을 텐데 별 진전이 없다. 이제는 같은 말을 계속하기가 민망스러울 정도이다.



  “거실이 또 이 모양이니? 아빠가 늘 얘기하잖아. 집에 들어오면 겉옷을 갈아입고 양말이랑 옷은 빨래통에 넣으라고. 외투는 옷장에 걸어둬야지. 가방은 문 옆 제자리에 두라고. 과자를 먹었으면 봉지는 버려야지, 누구보고 치우라고 저렇게 거실에 놔두는 건데?”  

  

  “내가 치울 건데, 나 아직 과자 다 안 먹었어. 아빠가 얘기하지 않아도 하려고 했었어.”


  “그게 언젠데? 어지럽히는 사람 따로 있고 치우는 사람 따로 있냐?


  “할머니도 아빠한테 그렇게 얘기했겠지. 아빠는 안 그랬어?”


  할 말을 잃게 만드는 우문현답이다. 자녀를 키운다고 하지만 가끔은 내가 배운다.


그림같이 깨끗한 《남의 집》 거실

  얼마 전에는 회사 지인으로부터 한소리를 들었다. 평소 나를 아끼신다고 알려져 있는 분이라 더 열정적으로 참 교육(?)을 하셨다. 어디서 나에 대한 얘기를 듣고 와서는 그게 나의 전부인양 판단해 버렸다.


  원래 그런 분인 줄이야 경험상 알고 있었지만 듣는 기분이 그리 유쾌하지는 않았다. 볼멘소리로 그게 아니라고 한 마디 대꾸했지만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그럴수록 또 다른 감정의 골만 더 깊어질 뿐이다.


  사람들과의 불편한 관계는 대부분 상대에 대해 잘 안다고 느끼는 '자만'에서 시작한다. 아이의 생각을, 배우자의 마음을, 부모의 걱정을, 동료의 판단을 잘 알고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잘 모른다고 생각했다면 좀 더 상대방을 고려하고 주의했을 것이다.




  기원전 5세기경,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에서 누구든지 자기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을 정말로 아는 사람은 없다는 걸 깨닫게 되고, “나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걸 안다”는 말을 남겼다.


신탁(The Oracle), '까밀로 미올라' 작품, 1980년


  전해져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당시 델포이 신전에 어떤 사람이 ‘아테네에서 소크라테스보다 더 현명한 자가 있습니까?’라고 물었다고 한다. 델포이 여사제인 피티아(Pythia)는 평소와는 달리 늘 쓰던 은유나 수사들을 생략하고 단 한 마디로 ‘아니다’라는 신탁(The oracle)을 주었다고 한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여, 똑똑해 보이는 사람(정치인, 작가, 장인 등)들을 닥치는 대로 만나고 다니며 그들의 지혜를 시험해 봤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똑똑해 보였던’ 사람들은 자신의 무지(혹은 편견)조차 몰랐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고, 그제야 소크라테스는 ‘자기가 무지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자신이 아테네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이었다고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블로그 '커리어 코치가 된  둘리 PD'에서 캡처


  비슷한 시기에 중국에서는 공자가 '아는 것을 안다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 하는 것이 진정한 앎이다'라는 말을 남겼는데 의미상으로 소크라테스의 말과 통한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럼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수많은 지식과 과학기술, 이를 통해 이룩한 현대 문명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역설적이게도 현대 과학은 라틴어 ‘이그노라무스(Ignoramus)’ 라는 과학적 정신을 토대로 하고 있다. 그 의미는 ‘우리는 모른다.’이다.


  모르는 것을 알려고 노력하는 것이 과학이다. 모르는 것을 알기 위해서 세밀하게 관찰하고 정리해 규칙을 찾아내고 자연의 현상을 우리가 알 수 있는 글이나 숫자로 표현한 것이다. 법칙은 자연현상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으로 옮겨놓은 것이다. 그리고 잘 모르는 것은 학설이다.


  오늘 주제와 관련한 과학 일화 하나를 소개한다. ‘멘델레예프’가 만든 표를 <주기율표>라고 한다. 주기율표는 고등학생이 가장 싫어하는 표이기는 하지만 인류가 만든 가장 위대한 표라는 데에 거의 모든 과학자들이 동의한다고 한다.


주기율표

  주기율표가 없었다면 각 원소들의 특성을 일일이 암기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주기율표만 머리에 넣어두면 원소들의 수많은 특성들이 자동적으로 드러난다.


  이런 표를 멘델레예프만 만들고 싶었을 리가 없다. 수많은 화학자들이 주기율표를 만드는 데 실패한 이유가 있다. 당시 화학자들은 그때까지 알려져 있던 62가지 원소를 배열하면서 꽉 찬 주기율표를 만들었다.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것이 우주에 있는 전부라고 여긴 것이다. 보기에는 완벽했다. 그런데 가로 줄로 보든 세로 열로 보든 화학적 특성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이런 주기율표는 의미가 없다.


  그런데 멘델레예프는 달랐다. 그는 주기율표에 듬성듬성 빈칸을 남겼다. 누가 보기에도 완벽하기는커녕 구멍이 많은 주기율표다. ‘우리는 모른다’라는 걸 인정한 것이다. 그리고 빈자리는 언젠가 채워질 것이라고 기대했다.


  헬륨, 아르곤, 갈륨, 우라늄, 토륨 같은 것이 금세 채워졌다. 주기율표에 빈칸이 있으니 그걸 찾게 된 것이다. 원소 번호 97번인 프랑슘(Fr)은 지구에 기껏해야 20그램 정도밖에 없다. 이걸 찾을 수 있었던 것은 주기율표에 빈칸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끔은 내가 세상의 기존 이치에 맞지 않는 생각과 독불장군 같은 행동으로 주위와 조화로운 관계를 깨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자격지심에 휩싸이기도 한다.


  ‘갱년기’에 접어든 아내의 심리 변화에 혼란스러울 때가 많고, 사춘기가 아니라 ‘쩜오춘기’쯤인 딸애의 신세대 사고방식과 말을 따라가지 못해 쩔쩔매고 있다.


  그렇게 살면 안 된다는 '인생 선배'들의 따끔한 호통이 겁나기도 하고, 세상 혼자 잘난 줄 안다고 뒷담화하는 '인생 후배'들의 눈총이 따갑다.


  나는 정말 세상모르고 살고 있는 걸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다행히 그 기준은 정해진 것이 아니다.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고 내일 다를 것이다. ‘무슨 기준이 그러냐?’ 하고 반문하는 이가 있겠지만 내 생각은 좀 다르다.


  이 세상에 대해 우리가 아는 건 아주 미약하다. 과거는 물론이고 지금 이 순간에 내가 느끼고 생각하는 것들도 매우 한정적이거나 굴절된 파편들일뿐이다. 미래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어제의 '과오'가 오늘의 '안도'에서 미래의 '영광'으로 바뀔지 누가 알겠는가? 모든 가능성은 열려 있다.


무한히 펼쳐진 평행 우주

 황당한 소리라고 비웃겠지만 난 가끔 이런 공상을 한다. 언젠가 다른 차원(시간)에서 온 ‘다른 나’와 만나서 대화하는 것이다. 그때 난 ‘다른 나’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렇게 만날 줄 알았냐고? 그저 믿었을 뿐이야. 길을 아는 것과 직접 길을 걷는 것은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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