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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현 Dec 11. 2022

12월의 직장생활

조지 프레드릭 와츠 <희망>

     

  12월이 되자마자 들이닥친 동(冬) 장군은 제법 매서웠으나 서슬 퍼럴 것만 같던 창 끝이 힘없이 녹아내리자 오히려 이번 겨울을 우습게 여기게 만들었다. 잔뜩 껴입은 옷들이 갑갑해졌고. 사무실은 스스로 답답함을 못 참고 창문을 열어젖혔다.


  사무실 책상달력은 마지막 장만 남았다. 다행히 눈 덮인 황량한 풍경이 아니라 ‘꽃 핀 복숭아나무들’이 만발한 어느 농가의 고즈넉한 모습이라 보는 눈을 다정하게 만들어준다.


   ‘25일이 일요일이구나. 그럼 새해 첫 날도 일요일이겠군.’ 빨간 날 이틀이 날아갔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누가 샐러리맨 아니랄까 봐 생각하는 수준이 쩨쩨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이게 인생이다.


  오늘 오전은 그리 바쁘지 않은 데다가 마음도 가라앉아 하릴없이 N포털에서 ‘12월’을 검색해 보았다. 여러 개의 연관 검색어들이 떴다. 12월 달력, 여행지, 날씨, 축제, 영화, 영어로(?), 손 없는 날, 콘서트, 인사말 등이 우선 보였다. 사람들은 12월에 이런 생각들을 주로 하는가 보다.


  이를 조합하면 뭐 이런 건가. ‘달력’을 보며 적절한 휴가 일자를 정해서 여유 있으면 ‘여행’을, 아니면 ‘축제’나 ‘콘서트’, ‘영화관’에서 기분전환을 하려나 보다. 물론 그날 현지 ‘날씨’를 고려함은 매우 중요하며 어떤 사람을 만날지 모르니 간단한 ‘인사말’ 정도는 준비해 두는 것도 좋겠지.


  12월은 한 해의 마지막 달이라서 그런지 여러 가지 이야깃거리가 많다. 이달은 그레고리력 기준으로 31일까지 있다. 율리우스력을 쓰던 시대부터 유구하게 새해 첫날이 춘분으로부터 2~3달 전 즈음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북반구에서 12월, 1월은 동지를 낀 겨울에 배치되어 있다.


  로마인이 최초로 정리한 달력은 10월밖에 없었고 그중에서 10번째 달에 라틴어에서 숫자 10을 나타내는 Decem을 붙인 것이 기원이라고 한다. 하지만 중간에 달력이 12월로 늘어나면서 현재의 January(1월)인 Ianuarius와 현재의 Feburary(2월)인 Februarius가 추가되면서 December를 그대로 12월로 사용하였다.


  12월에는 각계각층에서 진행하는 연말연시 불우이웃 돕기 성금 모금 행사가 시작된다. 구세군의 연말연시 성금 모금 캠페인인 빨간 자선냄비가 이때 등장한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는 물론 대학교도 이달부터 겨울방학에 들어간다. 대학 수학능력시험 성적표가 12월에 나오고 정시 원서 접수가 월말에 시작된다. 이달은 흔히 TOEIC의 ‘대박’ 달로 알려져 있다. 기업 공채 시즌이 아니기 때문인 듯하다. 아울러 공무원 시험도 12월에는 없다.


  12월에 입대하면 크리스마스를 훈련소에서 보낼 가능성이 높다. 또한 군대에서 12월에 전역한 사람은 전역하고 나서 1달도 안 돼서 예비역 1년 차로 올라간다.


  이 달에 태어난 사람들은 본인들보다 1년 더 어린 사람들(다음 연도 12월생은 제외)과 같은 해에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을 수 있다. 그 이유는 (만) 17세가 되는 생일이 있는 달 바로 다음 달부터 1년 간이 발급 기간이기 때문이다.


  매년 12월은 '분만'하는 임산부가 적은 반면, '개명'하려는 학생들이 방학 기간에 신청을 많이 해 기다리는 줄이 더 길다고 한다.




  이번 달 우리 회사 풍경은 어떨까? 회사 업무통신 <공지사항>에는 12월이라는 압박감을 느끼게 하는 각종 지시사항이 올라와 있다. ‘2022 회계연도 출납폐쇄에 따른 계약 등 회계업무 지침’, ‘내년도 예산안 심의 및 주요 사업 추진 만전’, ‘연말 공직기강 확립 철저’, ‘겨울철 제설대책 준비 철저’. 어디 이뿐이겠는가?


  한 해를 마감하고 새 해를 준비하는 손길이 분주하다. 다른 곳도 마찬가지겠지만 특히나 공공기관은 모든 것을 서류로 만들고 증빙하여야 하기 때문에 다들 네모난 모니터를 보며 키보드만 치고 있다.


  미처 마치지 못한 사업 준공 처리를 위해 업체 관계자와 아침부터 실랑이 끝에 만들어 낸 서류가 재무과에서 반려되기 일쑤다. 한 번에 매끄럽게 넘어가기엔 아직 업무 숙지가 안 된 부분이 너무 많다.

  

  그런가 하면 내년도 대규모 투자사업에 대한 보고 일정도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 사업 구상 초기 단계에서야 번쩍이는 아이디어로 잠시 눈 강을 시켜줄지 모르지만 실제 착수 단계에서는 고려사항이 너무 많다. 얼마 되지 않은 기간 동안 변해버린 상황과 예산 현황도 반영하다 보면 자칫 축소되거나 최악의 경우 후순위로 밀려날 수도 있다.

 

  그런 와중에 민원 전화에 응대해야 하고 의회 일정에 맞춰 각종 자료를 들고 질의응답하여야 한다. 업무 관련 각종 송년 모임도 주최해야 하고 사업 마감과 함께 예산 정리도 마쳐야 한다. 연일 직원용 메일함으로 쏟아지는 각종 자료 요청은 제목만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린다. 내가 이럴진대 직접 자료를 만드는 팀원들의 마음이야 어찌 표현하리오.


  그러나 정작 직원들의 관심사는 다른 데 있다. 삼삼오오 모이거나 수시로 메신저로 물어보고 대답하는 것은 바로 회사 정치이다. 매년 이맘때쯤이면 회사는 조직개편과 인사이동 소문으로 시끄럽다. 얼마 전 승진인사로 공석이 된 보직들에 대한 하마평도 심심찮게 나온다.


  자유게시판에는 어디까지 신뢰해야 할지 가늠이 안 되는 추측성 글로 도배되어 이미 그 기능을 잃은 지 오래다. 예년과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전과 다름을 본다. 나는 그저 회사의 일개 팀장에 불과하지만 이런 일련의 모습에서 점점 위화감을 느낀다. 많은 직원들이 더 이상 회사에서 열심히 일해야 하는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


  회사를 위한 기여도와 업무 실적 평가를 통해 그에 상응하는 승진이나 성과 보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불만이 회사 내에 팽배해 있다. 누구의 책임일까. 게다가 이를 선동하려는 듯한 일부 직원의 일탈적 언행이 전체 직원들 마음에 '회색 의구심'을 불어넣었다.


  이에 더해 MZ세대 신규 직원들의 슬기로운 회사 생활은 보는 이는 물론 직접 행하는 본인도 어리둥절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게 만들었다. 3~4년 전만 해도 이 정도 분위기는 아니었는데 부동산 폭등과 코로나로 인한 재택근무는 직장 생활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더 이상 회사에서 답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 동료애는 점점 사라져 가고 오히려 민폐만 끼치지 않으면 다행이다. 일에서 문제만 생기지 않으면 내 일만 알아서 하면 된다는 생각이 확산되고 있다.  ‘솔선수범’, ‘으싸으싸’, ‘다 같이’ 이런 단어는 이미 폐어(廢語)가 된 지 오래다.




  글을 쓰는 동안 이런저런 생각으로 밤이 깊었다. 스마트폰에서 나오는 캐럴에 맞춰 춤추듯 거실의 트리는 반짝반짝 영롱한 따뜻함을 보내고 있다. 12월에만 볼 수 있는 저 크리스마스트리처럼 내가 심란하게 생각하는 이 여러 가지 망상들도 그저 이번 달 이벤트일지 모른다.

우리 집 크리스마스트리. 벌써 산타할아버지에게 받을 선물함이 곳곳에 놓여 있다.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그의 책에서 "직접 보거나 만지거나 냄새 맡지 못한 것에 대해 허구를 말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사피엔스(인간)만의 가장 독특한 측면이다. (중략) 그리고 그 허구 덕분에 우리는 단순한 상상을 넘어서 집단적으로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라고 말한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들과 똑같이 시간의 흐름을 맞이할 텐데 인간만이 시간의 단위를 만들고 의미를 부여하고 그에 맞춰 정보를 공유한다. 그래서일까. 올해도 12월 30일에 종무식을, 내년 1월 2일에는 시무식을 할 것이다.  며칠 사이에 무엇이 변했지?


  지리산에서 겨울잠을 자던 반달곰이 한겨울에 인간들의 시끄러운 소리에 깨어나 이 광경을 본다면 아마 비웃을 것이다. '그럴 시간 있으면 잠이나 더 자라.' 하면서 귀를 막고 다시 잠을 청하리라.


  너무 일찍 저물어 버리는 12월 저녁의 답답함과 가늠할 수 없는 기다림도 해가 뜨면 물러가는 물안개처럼 제 갈 길을 갈 것이다. 내년 1월이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또 다른 새로운 허구를 위해 앞으로 박차고 나갈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난 12월의 혼란스러움과 어수선함을 오히려 즐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지금 만끽하지 않으면 내년 12월까지 또 1년을 기다려야 하지 않겠나.


  이 또한 지나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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