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가 바라보는 인간 세상
나는 고양이, 이름은 아직 없다.
어디서 태어났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어디선가 어두컴컴하고 축축한 곳에서 야옹야옹 울던 기억만 남아있다. 나는 그곳에서 처음으로 사람이라는 동물을 보았다.(중략) 그때 참 묘하게 생겼다고 느꼈는데, 그 느낌이 지금도 남아 있다. 우선 털로 장식되어야 할 얼굴이 반들반들하여 마치 주전자처럼 생겼다. 그뿐만 아니라 얼굴 한가운데가 너무 돌출되었다.
차부(인력거) 집 검둥이라면 이 동네에서 모르는 자가 없는 깡패 고양이다. 그러나 차부라서 힘만 셌지 전혀 고양이 없으므로 교제하려는 이가 거의 없다. 교양 있는 고양이끼리 동맹하여 멀리 따돌리는 놈이다. 나는 그 이름을 듣고 좀 꼬리가 간지러운 느낌이 일어남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다소 경멸감도 생겼다.
선생이란 정말 편한 직업이구나. 인간으로 태어난다면 선생이 되는 것이 좋겠다. 저렇게 매일 빈둥거리며 지내면서도 선생을 할 수 있는 걸 보면 고양이라고 하지 못하란 법도 없다.
인간은 무엇보다 다리가 네 개 있는데도 두 개밖에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부터가 사치다. 네 다리로 걸어 다니면 그만큼 더 잘 갈 텐데, 언제나 두 개만 사용하고 남은 두 개는 머리와 꼬리를 뗀 포장용 대구처럼 어깨에 쓸데없이 늘어뜨리고 있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이것으로 보면 인간은 고양이보다 훨씬 한심한 자들로, 지루한 나머지 그 같은 장난을 고안해 즐기고 있는 것이라고 짐작된다.
지금 사람은 어떻게 하면 내 이익이 되는지 손해가 되는지 자나 깨나 생각하니까 자연히 탐정이나 도둑처럼 자각심이 강해지지. 종일 두리번두리번, 살금살금,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잠시도 안심하지 못하는 것이 지금 사람들의 마음이야. 문명의 저주야. 궁지에 빠진 꼴이지.
옛사람들은 자기를 잊으라고 가르쳤었지. 지금 사람들은 자기를 잊지 말라고 가르치니까 정말 달라. 한시도 자기라는 의식을 내려놓지 못하고 늘 충만해 있지. 그러니 항시 태평할 때가 없잖은가. 언제나 초조하고 뜨거운 지옥이라네. 천하에 무엇이 약이라고 해도 자기를 잊는 것보다 좋은 약은 없는 걸. 초승달 아래 무아지경에 들어간다는 말은 이 지경을 읊은 것이네. 지금의 사람들은 친절을 베풀어도 자연스러움을 숨기고 있어.
세상에는 이렇게 앞뒤가 안 맞는 일이 종종 있다. 끝까지 고집을 부리고 있으면 이겼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 사이, 당사자의 인물로서의 가치는 훨씬 하락해버린다. 이상하게도 완고한 본인은 죽을 때까지 스스로는 면목을 세웠다는 참일 테지만, 그때 이후 남들이 경멸해 상대해주지 않을 거라고는 꿈에도 깨닫지 못한다. 당사자는 행복할 것이다. 이런 행복을 돼지의 행복이라고 부른다고도 한다.
대화혼! 하고 외치며 일본인이 폐병 환자 같은 기침을 했다.
대화혼! 하고 신문기자가 말한다.
대화혼! 하고 소매치기가 말한다.(중략)
입에 담지 않는 이 아무도 없으나 누구도 본 것은 아니다. 모두가 들은 적은 있으나 아무도 만난 자가 없다. 대화혼 그것은 도깨비 같은 것인가?
죽는 것은 괴롭다. 그러나 죽을 수 없다면 더욱 괴롭다. 신경쇠약 국민에게는 살아 있는 것이 죽음보다 더 큰 고통이야. 따라서 죽음을 걱정하지. 죽는 것이 싫어서 고통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죽는 것이 가장 좋을지 걱정하는 거야.
나는 죽는다. 죽어 태평을 얻는다. 태평은 죽어야 얻을 수 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모든 것이 고맙고 기쁘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