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스쳐 지나가게 한 죄, 행복해야 할 의무를 소홀히 한 죄, 핑계와 편법과 체념으로 살아온 죄로 당신이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에게는 사형을 선고해야 마땅하지만, “고독형”을 선고합니다.
- 프랑수아즈 사강,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중에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인문고전’이라고 하는 책들은 그 유명세에 비해 실제로 읽으려 하면 그리 만만치 않다. 너무 두꺼워서 읽기 전에 질려버린다. 큰 마음먹고 책장을 펼쳐도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되고 어려워서 책장을 넘길 수가 없는 것이 바로 인문고전의 벽이다.
어릴 적 TV에서 만화영화로 보았던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나 ‘톨스토이’의 「안나 카르레나」도 흥미 위주로 각색하고 단순화했기에 재미있게 보았을 뿐, 그걸 원작으로 접했다면 아마 읽지 못했으리라.
요즘 중고생들은 시험 준비를 위해 고전을 읽는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안타깝기도 하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겠다. 비록 시험을 잘 보기 위해서라지만 그것이 실제로 책을 읽는 행위로 이어진다면 긍정적인 면이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런 면에서 볼 때, ‘프랑수아즈 사강’이 쓴 소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인문고전으로 분류되어 있지만 그리 어렵지 않은 책이다. 총 150여 페이지밖에 되지 않고 표현이 친숙하기 때문이다.
작정하고 몇 시간만 집중한다면 ‘사랑’, 더 나아가 ‘삶’에 대해 찬찬히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는 좋은 책이다.
소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의 작가 ‘프랑수아즈 사강’은 1935년 프랑스 출생으로 19살에 쓴 <슬픔이여 안녕>이라는 작품으로 큰 반향을 일으키며 데뷔했던 천재 작가였으며 2004년 타계했다.
그녀는 마약 복용 혐의로 기소되는 등 파란만장한 삶을 누리면서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고 말할 정도로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런 그녀의 삶이 작품 곳곳에도 녹아 있다. 글은 작가의 생각과 삶에 대한 자세를 담은 '찻잔'이다.
전혀 다른 두 사랑 앞에서 방황하는 주인공의 심리를 중심으로,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그녀와 연결된 로제와 시몽의 ‘내면’을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 책의 주인공은 39살의 여성 “폴”이다. 그녀는 한 번의 이혼 경험이 있고, 이혼 후에는 오래 사귄 남자친구인 ‘로제’가 있다. 로제는 시간 나는 대로 폴의 아파트로 와서 함께 시간을 보내고, 외출도 하고, 가끔은 함께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폴은 자신이 로제에게 완전히 익숙해져 있음을 느낀다. 로제 이외의 누군가를 사귀는 일 같은 건 결코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지쳤다는 걸, 점점 더 고독해지고 있다는 걸 부정할 수 없다. 그녀는 로제를 많이 사랑하지만 로제는 다른 여자를 만나러 다니느라 그녀를 항상 외롭게 만든다.
어느 날 그녀는 실내 장식인 자신의 사업상의 일로 어느 부인의 집을 방문한다. 그곳에서 그 부인의 아들인 25살의 젊고 유능하고 잘 생긴 변호사 ‘시몽’을 우연히 만나게 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로제”는 폴만을 사랑하지만, 사랑이라는 구속에 얽매이는 것을 매우 싫어하고 자유롭게 살고 싶어 한다. 힘들어하는 폴의 마음을 잘 알고 있지만 무심한 채, 젊고 아름다운 여자들과의 하룻밤의 즐거움을 찾아다닌다. 그는 폴이 자신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에 차 있다. 왜냐하면 폴은 자신의 어항 속 물고기라고생각하기 때문이다.
“시몽”은 그의 집에 온 폴을 우연히 보는 순간 첫눈에 반해 버린다. 시몽은 젊고 잘 생기고 유능한 데다 그녀가 자신보다 14살이나 더 많은데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폴을 보는 순간 사랑에 빠진 시몽은 폴에게 애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인 애정공세를 시작한다. 시몽은 폴이 행복하길 바라고, 해바라기처럼 그녀만을 바라본다.
“폴”은 몽상가 같은 신비로운 분위기의 시몽의 태도에 불안감과 신선한 호기심을 느낀다. 젊고 순수한 청년인 시몽으로 인해 폴은 행복을 맛보면서도 로제에게 익숙하고 로제만을 사랑한다고 생각한다. 폴의 감정이 혼란을 겪으면서 점점 혼돈 속으로 빠져든다.
소설속에서 시몽은 흠잡을 데가 없는 완벽한 연인이다. 25살의 젊은 나이에 잘 생겼고, 부자이고, 직업도 변호사이다. 무엇보다 폴을 미친 듯이 사랑해 주고 그녀가 집에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자신과의 관계 속에서 그녀의 행복을 진심으로 바라는 사람이다.
그에 비해 로제는 폴이 심리적으르 흔들리는 것을 알면서도 모른체로 일관한다. 폴을 사랑하면서도 눈 앞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는 우유부단한 인물이다.
그럼에도 폴은 자신이 시몽이 아닌 로제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고는 시몽과의 관계를 정리한다. 결국 또 다시 로제와의 관계에서 반복되는 외로움을 선택한다.
‘왜 폴은 다시 로제에게로 돌아가는가?’
순수한 사랑꾼을 버리고 바람둥이 로제와 함께하기로 한 폴의 선택은 보통의 마음으로는 참 이해하기 힘들다. 안타까운 심정에 폴의 심리를 한번 추측해 보자. 일단 폴은 시몽을 부러워하면서도 시몽으로부터 큰 이질감을 느꼈을지도모른다.
시몽은 모든 것을 가진 완벽한 남자이고 무엇보다 자신보다 훨씬 젊다. 그녀는 젊음으로부터 느껴지는 큰 사랑과 열정의 뜨거움에 부담을 느끼는 걸까. 그녀 스스로가 자신을 ‘늙은 여자’로 인식하고 있기에 그와 자신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시몽 앞에서 그녀 스스로가 더 늙은 사람으로 여겨지고, 그녀를 그러한 존재로 인식하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도 부담스럽다.
그래서 어쩌면 지나치게 뜨겁고 큰 사랑이 변해버릴지도, 자신을 향한 시몽의 감정도 로제의 그것처럼 권태로워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그녀가 먼저 떠나는 것을 선택하게 만들지 않았을까.
폴은 사랑에, 인생의 무게에 짓눌린 인물의 전형이다. 스스로 그렇게 큰 사랑을 받을 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으로 여기며,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사람인지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알지 못한다.
반대로 시몽은 자신의 현재 감정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있으며 좋고 싫음이 분명해서 사랑에 있어서도 망설임이 없어 보인다.
작가는 ‘성격이 곧 팔자’라는 셰익스피어식 경구를 상반되는 기질의 등장인물들을 통해 효과적으로 환기시키는 것 외에도, 뻔한 전개나 통속적인 결말 대신 삶의 의표를 찌르는 통찰을 보여준다.
작가가 강조하는 것은 사랑의 영원성이 아니라 ‘덧없음’이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뻔한 결말로 독자의 의식을 마비시키는 멜로드라마에 머무는 대신, 갑자기 머릿속에 빨간 불이 켜지는 각성의 엔딩을 선사한다.
비단 남녀 간의 사랑 문제뿐만 아니라 삶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가짐을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한다. 삶을 살아가면서 스쳐가는 외로움에 혼자서 맞설 수 있어야한다.
나 자신이 가장 소중한 존재임을 인식하고 스스로를 사랑해야 한다. 그래야 나도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누군가로부터 사랑받을 수 있다.
무엇보다 ‘진정한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한다. 자신의 마음속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왜 나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지, 왜 그런 행동이 나에게 가치 있는 것인지, 진정으로 내가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 인식해야 한다.
그런 자세가 우리가 인생에서 한 번씩 휘청이며 넘어질 때마다 다시 일어설 힘과 나아갈 방향을 가르쳐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