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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현 Mar 08. 2023

내년 생일을 기대하며

천원의 행복. 수면안대.

***  몇 주 전 월요일이 내 생일이었다. 그리 대단할 것도 없는 그날을 특별히 적어 두는 이유는 요즘 부쩍  내 기억력에 자신이 없을뿐만 아니라 이 일을 내 기억 속에 더욱 깊게 각인시키고픈 마음 속 열망이 계속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 글은 일종의 '기억보고서'라고 할 수 있겠다. ***



  난 좀 이상하게도 실제 출생일과 주민등록상 생년월일이 다르다. 부모님은 내가 태어나고 1년 후에 출생신고를 하셨고, 덕분에 난 1년이나 어린 인생을 살게 되었다.


  내가 막내라서 별 관심이 없었나? 아마 그게 정답일 수도 있겠다. 왜냐하면 아무도 정확히 그때 정황을 아는 이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 부모님조차도.  하긴 아버지는 3년이나 신고가 늦었다. 그 덕에 원래 동갑었던 어머니는 졸지에 세 살이나 어린 ‘연하남’과 결혼한 능력(?) 있는 여성으로 사셨다.


  그러다 보니 엉뚱한 날에 보험사나 통신사 등에서 생일 축하 문자가 오고 온라인 판매업체로부터 할인 쿠폰을 받기도 한다. 가끔 친구들이나 지인들에게 나이나 생일을 밝힐 때마다 구구절절 설명이 길어진다.


  내 얘기를 순순히 받아들이는 분이 있는가 하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이도 있어 가끔 불필요한 언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내 태도가 문제란다. 내가 그때그때 유리한 편을 취하기 때문이란다. 그런 태도는 누구나 그렇지 않나. 아니면 미안하고.





  어쨌든 그날은 ‘금요일’이었다. 직장인들에게 일주일 중 금요일만큼 들뜨는 날이 있을까? 점심시간이 지나면서부터 의자에 눌러둔 엉덩이가 자꾸만 들썩인다. 비단 직장인뿐이겠는가.


  방학중에도 우리집 따님은 금요일만 되면 ‘불금’이라며 숙제도 안하고 자정까지 온라인 게임이나 너튜브 시청에 여념이 없었다. 내가 뭐라고 한 마디 할 표정만 지어도 먼저 소리친다.


  금요일엔 서로 간섭하지 맙시다!


  거기에 더해 금요일이 반가운 일이 하나 더 생겼다. 지방으로 발령 난 아내가 금요일에 올라오기 때문이다. 아내가 없는 동안 딸애의 서슬 퍼런 호통과 한 서린 격정에 휘둘린 나로서는 여간 든든한 우군이 아닐 수 없다. 내 억울한 사정도 들어주고 나 대신 딸애에게 따끔한 훈육도 해주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금요일 오후 5시 59분.

  퇴근을 하라는 건지, 눈치 있으면 좀 더 일하다 가라는 건지 알아서 판단하라는 아리송한 직장 안내방송을 뒤로하고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상사를 만날까 봐 엘리베이터를 버리고 내부 계단으로 후다닥 내려와 차에 시동을  걸었다.


  제일 일찍 왔다는 뿌듯한 맘으로 집에 들어왔는데 아내는 이미 짐을 풀고 있다. 조퇴하고 일찍 출발했다고 한다. 딸애도 막 학원에서 돌아와 엄마와 재잘재잘 떠드는 바람에 집은 오랜만에 온기가 돈다. 내 맘도 덩달아 들떠 거실 주위를 둥둥 떠다니고 있다. 





  딸애가 뜬금없이 생일파티를 해주겠다면서 계획도 없던 일을 벌였다. 아마 월요일보다는 가족이 다 모인 금요일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나 보다. 생일선물을 사주겠다며 날 밖으로 끌고 나왔다. 그래봤자 갈 곳은 한 군데밖에 없는데 난 도통 그곳이 마뜩지 않다. 그곳에서 과연 내가 원하는 선물을 찾을 수 있을까?


  딸애는 ‘다소(daiso)’에 거의 이틀에 한 번 정도 출근 도장을 찍는다. 어느 날은 친구 선물을 사야 해서, 어떤 날은 축 쳐진 자신의 기분전환을 위해서, 아니면 친구들과 오랜만에 만났는데 마땅히 갈 데가 없을 때도 그곳을 애용한다. 초4학년이 즐길 수 있는 근사한 쇼핑몰인 셈이다.

 

  “아빠, 내가 왜 다소에 자주 오는지 알아? 여기 물건 품질은 ‘중급’ 정도인데 대신 가격이 싸서 가성비가 엄청 좋거든. 내 친구들도 선물은 모두 다 여기에서 사. 여긴 천 원에 지우개를 열 개 주는 것도 있어.”


  딸애와 달리 난 그 매장에 별 흥미가 없다. 예전엔 몇 번 이용했지만 막상 싸다고 충동적으로 산 물건들은 다들 구석에 처박혀 있다. 딸애가 산 학용품이나 갖가지 물건들은 며칠 지나지 않아 거실 바닥에 나 뒹굴다가 잊히곤 했다. 싼 게 비지떡이다. 유일하게 내가 곳에서 꾸준히 사는 것이 있다면 ‘면봉’뿐이다.


  그런 내게 다소에서 선물을 사주겠다고 하니 내 실망이 얼마나 크겠는가.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과연 거기에서 내가 쓸 만한 물건이 있을까? 뭘 사주겠다고 저리 야단법석을 떨까?’ 그런 맘에 생일 선물 안 받아도 괜찮다고 말했다가 자기 마음도 몰라준다고 호되게 봉변만 당했다.


 

  “너, 아빠 선물로 얼마 쓰려고 생각하고 있는데?”


  “천 원 정도.”


  “너 정말 지독하다. 네 생일이나 무슨 날만 되면 몇 만 원씩 사달라고 하면서 정작 아빠한테는 천 원밖에 안 쓰니? 너무 한 거 아니야?”


  “무슨 소리야. 아빠랑 나랑 똑같이 생각하면 안 되지. 아빠는 회사 나가서 돈을 많이 벌고 나는 용돈 중에서 아껴서 사주는 건데. 아빠는 꼭 이렇게 분위기를 망쳐야겠어?”


  나는 다소에서 건전지를 샀다. 그리고 약속대로 딸애가 내 선물을 비밀리에 맘껏 고르도록 매장 밖으로 나왔다. 수많은 사람들이 바삐 지나가는 거리에서 나는 오도 가도 못하고 하염없이 딸애의 전화만 처량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왜 하필 생일은 돌아와서......




  생일(生日)!


  어렸을 때는 선물 받을 생각에 새 달력을 보면 제일 먼저 찾아보고 그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어린 마음에 식구들이 미리 알아주기를 바랐고 모르는 것 같으면 은근슬쩍 지나가는 말을 하곤 했다. 자기밖에 모르고 욕심이 많은 나를 보면서 식구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안타깝게도 난 내가 원하는 생일 선물을 받은 기억이 거의 없다. 번번이 실망만 안겨주는 슬픈 날이었다. 당시 우리 집은 그리 넉넉한 생활 살림도 아니었고, 혹 그랬더라도 철없는 아이가 원하는 터무니없는(터무니없다고 느꼈을) 선물을 사주었다가는 버릇만 나빠진다고 여겼을 그런 우리 집이었다.   


  그래서일까? 어른이 되어서, 받고 싶은 선물을 다른 이가 안 사주어도 가질 수 있을 나이가 되자 난 생일을 무심히 넘기기 시작했다. 오히려 누가 아는 체할까 봐 숨겼다. 구태여 그리 달갑지 않은 기억을 소환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처 준비하지 못한 케이크는 딸애가 즉석으로 집에 있는 과자와 요플레, 딸기잼, 과일을 이용해 뚝딱 만들었다. 완전 똥손은 아닌가 보다. 제법 이쁘게 생긴 수제 케이크가 만들어졌다.


  거실등을 끄고 촛불을 켜고 생일축하 노래를 불렀다. 언제나 그렇듯 촛불은 딸애가 후우~ 불어 껐다. 늘 자기가 주인공이고 싶은  모양이다. 난 떨떠름한 기분으로 빨리 예식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빨리 끝내고 아내랑 맥주나 한 잔 해야지.


  곧 딸애가 선물을 꺼낼 것이었다. 기대치는 제로였지만 내색하면 안 되기에 조용히 마음을 다스리고 있었다. 과연 뭘까? 설마 설거지용 고무장갑? 설거지 열심히 하라고? 딸애와 아내의 눈이 마주치는 그 짧은 순간에 뭔가 반짝였다. 이럴땐 보통 뭐가 있다는 뜻이다.


  아이의 그 조그만 손으로 배시시 꺼낸 그 무엇에 나는 흠칫 물러섰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그것에 놀란 난 딸애를 쳐다보았다. 아내는 미리 알고 있었는지 슬쩍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걸 어떻게......


  생일 선물은 ‘수면안대’였다. 가격은 정말 천 ! 잠자리에 들 때마다 생각하면서도 정작 살 생각은 한 번도 하지 못했었는데. 그리고 내가 잘 때 늘 사용하는 '소음방지 귀마개'.  

  


 “아빠한테 필요한 것을 찾느라고 다소에 몇 번 갔었어. 지난번에 아빠가 먼저 잔다고 에 수건을 덮는 걸 보고 안대를 생각했지. 엄마랑도 얘기해보고. 소음방지 귀마개는 아빠 쓰던 것들이 낡아서 덤으로 사 준 거고.”


  어린아이가 얼마나 2층 건물을 오르내렸을까? 돈은 없고 그러면서도 아빠에게 좋은 선물이라는 칭찬은 듣고 싶고...... 무얼 살까 고민하다가 불면증에 시달리는 아빠를 떠올렸나 보다. 가끔 느끼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한 방씩 터뜨려주는 우리 집 따님 되시겠다.





  지금은 밤 11시쯤.


  하루 중 가장 평온한 시간이다. 좀 전까지도 도떼기시장처럼 분주하던 우리 방은 이제야 수면등만 켜 놓은 채 모두 잠자리에 누웠다. 잠이 오지 않는다고 투덜대는 딸애를 위해 난 지금 책을 읽어주고 있다. 


  읽고 있는 책이야 이미 몇 번이나 읽어 나도 잘 아는 내용이지만 우리에게 그건 그리 중요치 않다. 마치 어느 절간의 독경처럼 책 읽는 소리가 조그만 수면등 아래에서 나직이 퍼져 나간다. 책을 읽어주고 있는 나도, 듣고 있는 아내나 딸애도 조용히 하루를 정리한다.


  그 사이에 때론 두 모녀가 귓속말로 소곤소곤 뭐라고 중얼거리다가 웃기도 하고 다툼을 벌이기도 하지만 곧 진정되면서 차분한 숨소리가 들려온다. 숨소리만 들어도 지금 잠들었는지 아닌지 느낄 수 있다.


  그렇게 고른 숨소리가 들리면 가만히 읽던 책을 내려놓고 나도 내일을 기대하며 잠을 청한다. 머리맡에 놓아둔, 딸애가 사준 수면안대를 눈에 쓰고 조용히 눕는다. 누군가 두 손으로 눈을 감싸주는 듯 금세 따뜻한 온기가 느껴진다.     


  올해 생일선물은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그 좋은 기억이 내년 생일을 기다리게 만들 것 같다. 그리고 내 인생에 또 하나의 의미를 새겨준 내 혈육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내년 생일엔 따뜻한 남쪽 나라에서 아침을 맞아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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