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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현 May 08. 2023

장미 전쟁

두 여인의 침대 전쟁


 “칼레! 안데스! 에바 로타! 거기 있니?”

  식스텐은 흰 장미군 가운데 누군가가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대답해 주지 않을까 싶어서 빵 공장 다락방을 올려다보았다.
  흰 장미군 사령부에서 도통 인기척이 없자 융테가 중얼거렸다.

  “대체 다들 어디 간 거지?”

  (중략)

  2년 전 조용한 여름밤, 흰 장미군과 붉은 장미군의 전쟁이 시작된 뒤로 전쟁은 벌써 3년째로 접어들었지만 양쪽 군대 중 어느 쪽도 지겨워하는 낌새가 없었다. 오히려 안데스는 ‘30년 전쟁’이라는 좋은 본보기도 있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옛날에도 그렇게 긴 전쟁을 치렀는데 우리라고 못 할 건 없어.”


  

  요즘 침대 맡에서 딸애에게 읽어주는 책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소년탐정 칼레」 시리즈 중 마지막(제3권)인 “라스무손 박사의 비밀문서”이다.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은 우리나라에서도 잘 알려진 스웨덴의 유명한 동화 작가라고 하는데 이름만 들어서는 어쩌면 나처럼 누군지 모를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이러면 아시려나? 말괄량이 삐삐!


  그렇다. 린드그렌은 「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 의 작가이다. 내가 삐삐를 알게 된 것은 책이 아니라 어렸을 적 즐겨 보던 흑백 TV를 통해서였다.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는 삐삐에 대한 이미지도 그때 본 화면들이다.


  홍당무처럼 빨간 머리카락은 두 갈래로 야무지게 땋아져 옆으로 쫙 뻗어 있고, 감자같이 생긴 조그만 코에 주근깨투성인 삐쩍 마른 여자아이. 거기에다 삐삐의 옷은 정말 특이했다. 삐삐가 직접 만든 옷이었다.



  아무튼 다시 소년 탐정 칼레로 돌아와서, 1권의 ‘보석 도둑 사건’과 2권의 ‘살인 사건’에 이어 3권에서 외국 스파이의 ‘유괴 사건’은 소년 탐정 칼레 3부작의 마지막 작품답게 짜릿하고 가슴 뭉클한 결말로 끝이 난다.


  명탐정을 꿈꾸는 칼레, 흰 장미군 대장 안데스, 용감한 에바 로타. 흰 장미군 삼총사가 펼치는 아슬아슬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모험이 무척 재미있다.


  특히, 본 줄거리와 더불어 책 속의 흰 장미군과 붉은 장미군 사이에서 벌어지는 유치하지만 치열한 결투와 천진난만하지만 끈기 있는 우정은 독자들에게 역사 속 ‘장미전쟁'을 떠올리게 할 정도의 강렬한 인상을 다.




  장미전쟁은 1455년부터 1485년까지 약 30년간 잉글랜드의 요크 가문과 랭커스터 가문 간의 싸움이다. 요크 가문은 흰 장미를, 랭커스터 가문은 붉은 장미의 문양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장미전쟁이라 부른다.


  

  잉글랜드는 프랑스와의 백년전쟁 이후 영토 문제로 귀족들이 많은 갈등을 일으켰다. 당시 잉글랜드 왕이었던 헨리 6세(랭커스터 공 가문)가 무능함과 함께 정신 이상을 보였다고 한다.


  결국 헨리 6세는 요크 공에 의해 감금당하고 요크 가문의 에드워드 4세가 새로운 왕으로 추대되었다. 이때부터 흰 장미 가문인 요크 가문이 왕권을 잡았고, 이를 계기로 두 가문의 추종자들과 병사들 간의 처절한 싸움이 이어졌다.


  그러다 에드워드 4세는 41세란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뜨며 어린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줬지만, 자신의 동생인 리처드가 조카를 살해하며 리처드 3세로 왕위에 오르게 된다.


  마지막으로 랭커스터 가문의 리치먼드 공 튜터가 리처드 3세를 제거하며 다시 왕위를 붉은 장미 집안으로 가져온다. 그러나 리치먼드 공 튜터는 장미전쟁을 끝내기를 원했고, 요크 가문의 여인인 엘리자베스와 결혼함으로써 두 가문의 전쟁은 일단락된다.


 ‘튜터 왕조’가 탄생되면서 말이다.





  내가 이렇게 심오한 의미를 마음속에 품고 교훈적인 책을 읽어줌에도 불구하고 정작 우리 집에서는 장미전쟁보다 더 피 튀기는 '침대전쟁'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아, 그쪽으로 좀 가. 이쪽에 자리 없어.”


  “무슨 소리야! 난 침대 절반도 안 쓰고 있는데.”


  “나 지금 너한테 밀려서 침대 밑으로 떨어지기 직전이야.”


  “그건 엄마가 뚱뚱해서 그렇지. 나도 이쪽에 자리 없어.”


  “너 자꾸 이상한 말하는데 침대 중간은 여기야. 여기 봐봐, 네가 넘어왔잖아.”


  “나도 좁아. 불편하단 말이야.”


  딸애는 초등학교 4학년임에도 제 방에서 안 자고 여전히 안방에서 엄마 아빠와 같이 침대를 쓴다. 나는 일찌감치 침대 쟁탈전에서 밀려나 1인용 매트를  바닥에 깔고 평안의 세계로 넘어왔다.


  그러나 두 여인은 최후의 여왕이 되려는 듯 잊을만하면 서로 도발해서 집 안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든다. 



  좀 전까지도 서로 '사랑해', '잘 자' 하면서 평화의 제스처를 보였지만 조금이라도 상대편의 빈 틈을 포착하면 가차 없이 목덜미를 쳐서 영욕의 침대를 쟁취할 분위기이다.


  외견상으로 보기엔 어른인 엄마가 우세해 보이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다. 갱년기와 사춘기의 전투력은 막상막하이다. 누가 더 과감하게 상대방을 도발하느냐에 승패가 갈린다.


  오늘은 너무 흥분한 나머지 제 풀에 지쳐 아내가 전쟁을 포기하고 딴 방으로 가버렸다. 너무 쉽게 승리를 거머쥔 딸애조차도 이 상황이 당혹스러운지 조용히 침묵을 지킨다.


  이럴 때 나는 마치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이 가만히 있다. 어쭙잖게 어느 한 편에 동정을 보냈다간 호응은커녕 괜히 모든 짜증을 뒤집어쓰기 때문이다.


  각자 아주 넓게 잠자리를 쓰는 것으로 잠정 결론이 났지만 대신 가족 간 행복의 공간은 아주 좁아져 버렸다. 아무도 이런 모습을 원하지 않았지만 가끔은 이렇게 엉뚱한 파국으로 치닫는다.


  그러나 경험상 이렇게 끝나지는 않을 것임을 나는 안다. 딸애는 혼자 씩씩거리며 화를 내다가 슬그머니 내가 누워있는 곳으로 기어 들어왔다. 그리고 뭐라 뭐라 혼잣말을 하다가 잠이 들었다.


  그리고 곧 아내가 다시 방에 들어와 내 옆에 자고 있는 딸애를 안아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주며 볼에 뽀뽀를 하였다.


  결국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두 여인이 침대에서 다시 잠들었다. 누운 지 얼마 안 되었는데 벌써 두 여인들의 숨소리가 돌림노래처럼 들려온다.



  그렇게 오늘의 침대전쟁도 마무리되었다. 언제까지라도 놓치고 싶지 않은 정경이다.


그래 이게 가족이다! 

그리고 이게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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