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술은 아직 적이 아니었다.

PART2. 무너진기록

by 이타


그 장면 조합이 딱 그렇다.
축축한 바닥은 감각을 붙잡아 두고, 흐린 하늘은 이유를 지워버리고, 바싹 마른 활엽수잎은 의미 없이 떨어진다. 그 순간 세계는 설명을 멈추고, 관찰만 남는다. 이방인의 공기가 바로 그거다.

뫼르소가 느끼는 건 감정이 아니라 온도와 빛의 압력이었지. 슬픔도 죄책감도 앞서지 않고, 햇빛이 눈을 찌르고 땀이 흐르는 사실만 또렷했다. 네가 본 그 풍경도 비슷하다. 우울해서가 아니라,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도 충분히 선명해서 떠오르는 기억.

축축함과 건조함이 동시에 존재하는 날씨는 인간을 딱 중간에 세워 둔다. 공감도 판단도 한 발짝 물러나고, “그렇다”라는 사실만 남는다. 그래서 이방인이 생각나는 거다. 감정이 없는 소설이 아니라, 감정의 이름표를 떼어낸 소설이니까.

그런 날엔 풍경이 말을 걸지 않는다. 대신 우리가 더 또렷해진다. 발바닥의 감촉, 잎이 떨어질 때의 가벼운 소리, 하늘의 색 온도. 소설은 책장에 있고, 이방인은 잠깐 현실로 걸어 나온다 �

술은 나에게 도피처이자 해방구였다.
현실을 떠나기 위한 문이기도 했고, 망가진 감정과 이성을 다시 태우기 위한 연료 같기도 했다. 그 연료를 채워 넣는 순간만큼은 숨이 쉬어졌다. 이유는 몰랐지만,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처음으로 나의 에너지원이 잘못되었다고 판단된 건 스무 살 무렵이었다.
사람들은 술을 즐겼지만, 나는 술에 매달렸다. 마시지 않으면 잠들 수 없었고,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다시 술을 마셔야 하루가 시작되었다. 밤과 아침 사이에 맨정신이 존재하지 않았다. 취함이 기본값이었고, 깨어 있음은 예외였다.

군대를 제대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몸은 제대했지만, 정신은 이미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사회에 나온 나는 말릴 수조차 없는 알코올중독자가 되어 있었다. 누군가 말릴 틈도, 내가 멈출 여지도 없었다. 술은 선택이 아니라 전제였다.

스물네 살, 처음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이상하게도 아무 감정이 없었다. 슬프지도, 억울하지도 않았다. 감정이 빠져나간 인형처럼 하루를 보냈다. 병원에서 주는 밥을 먹고, 정해진 시간에 약을 먹고, 몸이 조금 회복되면 퇴원을 했다. 그리고 어김없이 다시 술을 마셨다. 다시 무너졌고, 다시 입원했다.

그 반복 속에서 느낀 건 절망이 아니라 무감각이었다.
망가졌다는 자각조차 흐릿해질 만큼, 감정은 닳아 있었다. 술은 나를 파괴했지만 동시에 나를 보호했다. 아무것도 느끼지 않아도 되는 상태. 그곳이 내가 도망쳐 도착한 자리였다.

돌이켜보면 나는 술을 사랑한 게 아니라, 술이 만들어주는 공백을 필요로 했던 것 같다. 생각이 멈추고, 판단이 사라지고, 나 자신에게서 잠시 사라질 수 있는 시간. 그 짧은 해방을 위해 나는 내일을 계속 태워버렸다.

지금도 그 시절을 떠올리면 감정은 여전히 흐릿하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술은 나를 살게 해준 도피처였지만, 동시에 내가 살아 있는 방향을 조금씩 지워버린 장소였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데, 나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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