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총사와 사차원

by 정자까야

어이 아라미스.


야 임마..

영수는 여름이 아는 척을 하자 득달같이 달려와 여름의 입을 막았다.


그놈의 삼총사 타령은 그만하라니까..

아라미스가 언제적 아라미스냐..그렇게 크게 부르면 내가 쪽팔리잖아..


아니 왜. 우리중 제일 미남이라 그리 불러주면 고맙다고 할 것이지. (웃음)


됐고. 두 놈은 늦는다냐?


아토스는 장모님 일본에서 오셨다고 오늘 못오고 부르토스는 거래처 직원 잠깐 만나고 오느라 한시간쯤 늦는다더라.


희상이는 회사 계속 다닐 모양이지? 전직한다 어쩐다 하더니..거래처 쫓아다니는 거 보면..하긴. 이즘 취업이 그리 쉽냐. 좀 알아보다보니 정신이 번쩍 났을지도.


넌 별 일 없냐? 여친은 잘 있고? 설마 그새 또 바뀐 건 아니겠지?


영수는 중학 시절까지 축구를 했다. 초등 시절 재능이 받쳐줬고 그저 멋있어 보여 시작했던 운동. 7, 8년을 잔디 위에서 보냈던 녀석은 유수의 축구 명문고 진학을 앞두고 축구를 그만뒀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당황한 부모님, 감독코치님의 만류에도 일반고 진학을 단행했던 녀석. 공부 기초가 없어 꽤나 고전했지만 졸업 즈음에는 아토스와 공부로 티키타카가 될 정도였다. 마음 먹으면 포기하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아토스, 부르토스 그리고 달타낭까지..넷이 죽이 맞는 이유기도 했다.


어..아직은. (웃음) 이렇게 계속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다가 고독사 하는건 아닌지 걱정된다. (웃음)


배부른 소리 하네. 난 니가 부럽다. 연애는 많이 해봐야 좋다며..나중에 정말 좋아하는 사람 생기면 더 잘해준다고.


다 결과론이지. 어찌아냐. 우리 각자의 결말이 어찌될지.


하긴..


여름과 영수는 폭탄주를 한번에 털어넣었다.


그니까 지금 여친은 일전에 우연히 서울역에서 뵀던 그 분이란거지?


그래. 임마. 너 때문에 강제로 이별할 뻔 했잖아.


그니까 여친 바뀐걸 왜 제때제때 업데이트를 안해주냐 이거야. 그 날 우연히 너 마주쳤을 때 바빴으면 그냥 인사만 하고 가든가 했을텐데..시간 남는다고 괜히 차 한 잔 마셨다가..


야.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니가 임마 갑자기 첼로 어쩌구 하는 바람에..


아니..난 그 생각밖에 안떠오르더라구. 네 전 여친이..그래 그 분은 내가 얼굴도 본 적이 없었네..여튼 내가 아는 네 여친은 첼리스트..였다는 게 갑자기 생각나서..그 때 내가 뭐라 했더라?


악기는 무겁지 않냐고 했던가..몰라. 나도 정확히는. 그 때 정말 머리칼이 삐쭉 솟는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알겠더라. 나도 모르게 탁자 밑으로 네 정강이를 깠잖아. (웃음)


그랬지. 집에 가서 보니 멍들었던가..그랬어. 내가 뭐라 둘러댔나 모르겠는데..대충 잘 넘어갔잖아..지금껏 만나는거 보니 눈치 못챈것 같네..


모르지. 그 날 알았는데 모르는 채 하는지.


그게 맞다면 좋은 사람이네..널 진짜 좋아하든가.


여름은 건배도 없이 혼자 술을 들었다. 영수는 잔을 채워준다.


아라. (아라미스가 너무 길어 여름은 영수를 가끔 그리 불렀다.) 넌 연극영화과를 갔어야 해. 어쩌면 그리 연기가 자연스럽냐..당황하지도 않고..몰라. 네가 신경이 곤두섰다고는 했지만 겉에서 볼 땐 전혀 아니었어. 너무 자연스럽게 다음 상황으로 넘어갔지 아마..


연기? 야..연기하면 김여름이지. 무슨 소리 하는거야. 너 그 누구냐..겨울씨였나? 너랑 반대 이름이었던.


여름과 겨울은 반대가 아니라..만날 수 없는 인연이지. 여름은 겨울이라는 계절이 있다는 걸 모르고..겨울은 봄, 가을은 알아도 여름은 모를테니.


뭔 개소리야. 그 겨울이라는 분. 여전히 답보 상탠가?


아니면 이 좋은 날에 내가 널 만나고 있겠냐..


그렇겠지. 일전에 우리 만났을 때..너 일하다가 늦게 왔었잖아. 술도 한 잔 안했는데 갑자기 그 여자랑 통화하더니 바로 뛰쳐나갔던거 기억하지?


그랬지. 그 때 미안했다. (웃음)


아니 그건 좋은데..너 통화하는거 들으니 거짓말을 너무 태연하게 하던데? 뭐? 우연히 겨울씨 회사 근처에서 친구들이랑 한잔 하고 있다고? 얌마. 그 때 우리 강남역 한복판이었고 겨울씬가 그 분 직장은 여의도였잖아. 외국계 증귄사였던 걸로 기억하는데..여튼. 넌 술 한 방울도 안마셔놓곤 어떻게 맨정신에 그런 거짓말이 술술 나오냐..그런 놈이 나한테 연기 운운할 건 아니지.


영수의 말에 한참 웃던 여름. 안주거리를 찾다가 이내 젓가락을 내려놓는다.


아라. 내 연기는 그게 끝이 아니었어. 막상 여의도까지 택시 타고 갔는데..겨울씨 기다리다보니 문득 깨달아버린거지. 내가 술 한 방울도 안마셨다는 걸..


아..그랬네..그래서? 길거리에서 병나발이라도 불었냐?


여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친 놈. 영수는 소리내 웃더니 술 한 병을 냉장고에서 손수 꺼내왔다.


둘러보니 마침 편의점이 있더라구. 들어가 소주를 사서 진짜 길거리에서 병째로 마셨어. 한 반쯤 마시니 배불러서..남은 건 근처 잔디밭에 뿌리고 몇 방울 일부러 머리나 몸에 좀 뿌리고..냄새나라고.


역시 넌 제정신이 아냐..학교 다닐 때부터 알아봤다. 사차원인거.


근데..그렇게 들이붓고 겨울씨 기다리는데 하나도 안취하더라..겨울이라 날이 춥기도 했고..정신은 말짱했어. 빨리 만나고 싶다는 간절함만 커졌지.


설마..만나긴 했지?


만나긴 했어. 근데 그 날 선약 있는데 내가 근처니까 잠깐이라도 보자고 했던 거거든. 진짜 잠깐 봤어. 길기리에서 한 십분 얘기했나..추워서 오래 있기도 힘들었고. 난 그래도 잠깐이라도 짬내준 그 사람한테 고맙더라.


그 정도면 병이야..어디 쌍팔년도 짝사랑하고 앉잖냐..혹시 모르지. 나중에 스토커로 경찰서 끌려갈지.


이 때 허겁지겁 들어오는 상희.


어이 부르토스..


달타냥!


상희는 앉으며 여름과 하이파이브를 나눈다.


으이구 미친놈들. 상희야 니가 받아주니까 저렇게 아직도 삼총사 타령 하는거라고.


왜. 잼있잖아. 뭔가 비밀조직 같기도 하고.


상희는 순수한 친구였다. 넷 중에 공부는 제일 못했지만 놀기는 제일 잘했다. 고등학교 시절 하교 후 양재천에 혼자 앉아있던 여름이를 먼 발치에선 부르곤 손을 흔들던 녀석이었다. 셋은 술잔을 돌리며 고등학교 시절 얘기를 주고 받았다. 파도파도 몰랐던 얘기들이 나오는게 신기할 정도였다. 그저 공부만 한 시절인 줄 알았는데..


여름아 난 니가 우리랑 친구가 될 줄 몰랐다..


배가 고픈지 연신 안주에 손을 뻗으며 상희는 말했다.


뭔 소리야? 영수가 묻는다.


아니..그렇잖아. 다들 친구지만..그래도 그 안에서도 친구가 좀 갈리잖아. 삼삼오오. 끼리끼리..비슷한 애들끼리 더 친한거지..


영수와 여름은 잠자코 술을 한 잔 했다.


우리가 고 2때 같은 반이었지? 여름이가 그 해 1학긴가에 전교 탑 먹었잖아. 뭐 원래 잘 하던 놈이었지만 갑자기 만점인가 받아서 선생님들 다 놀래켰었지. 그 성적 그대로 갔으면 서울대든 의대든 충분히 들어갔을텐데..2학기 들어 성적이 말도 안되게 곤두박질쳤잖아. 주식으로 치면 상한가 다음날 하한가 친 셈이지. 등락폭이 무슨 코인도 아니고..뭐 그 덕에 우리가 삼총사와 달타냥으로 지금껏 동고동락하고 있지만..그 당시 너랑 친구로 지낼 거라고는..그런 미래를 알긴 어려웠지.


친구 사이에 그런게 어딨냐..공부를 잘했든 못했든 친구는 다 친구지.


영수가 핀잔주듯 상희의 옆구리를 툭 쳤다.


잠자코 듣던 여름이 무심하게 회 한 점을 씹으며 말했다.


우리 거나하게 취했을 때 몇 번 얘기했던 거 같은데 다들 취해서 기억을 못하니 또 얘기해줌세. 난 당시 오만한 놈이었어. 치기어린 녀석이었지.


학교와 집 사이를 오가며 양재천을 꼭 들렸거든. 양재천을 한 시간 가량 보다보면 어떤 생각이 들었냐면..삶이 너무 시시하다고..너무 뻔하다고..


영수와 상희는 계속 말하라는 듯 가볍게 술을 입술에 댔다 뗐다.


내가 이렇게 공부하면 한번에 붙든 재수를 하든 갈 수 있는 최고학부에 갈 테고 거기서 학점 관리 잘 해서 로스쿨 갈거고 마찬가지로 한번에 붙든 몇 해를 더 하든 결국은 법조계에 몸 담겠구나..그런 미래가 쭉 보였던거야. 누군가는 전도유망하다는 표현을 쓰겠지.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라고. 근데..난 그게 너무 싫더라. 말할 수 없이 갑갑하고. 내 삶이 큰 틀에서 결정지어졌다는 걸 받아들일 수 없었어. 삶이 주는 불확실성과 그 의외성의 즐거움은 하나도 누리지 못하고..이게 뭐냐는 느낌이었지. 당시 내가 그런 개똥철학을 읊고 다닌 이유 중 하나가 실존주의 철학 때문이었는데 난 교과서 대신 카뮈나 사르트르 같은 실존주의 철학자들 책을 보고 다녔거든. 내가 실존한다는 게 뭔지..양재천을 보면서 묻곤 했지.


여름의 얘기를 들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이던 영수는


역시 넌 사차원이었어..그리 말했고


양재천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여름을 부르곤 했던 상희는


니가 그 때 그런 생각을 했던 거구나. 왠지 네 옆으로 가서 앉고 싶진 않더라..라고 농을 쳤다.


나..그 이후 성적이 한번도 안오르더라. 그런 생각하고 지내니 공부가 됐겠냐. 교무실도 자주 불려갔고 부모님께 야단도 맞았지..근데 한번도 그 때 그 개똥철학을 후회한 적 없었어. 힌번도 생각해보지 않던 대학을 가서 멋진 학창 시절 보냈고 역시 한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곳에 취업해서 회사 잘 다니고 있다..일도 어렵고 야근도 잦긴 한데..그래도..나랑 인연이 된 곳이고..큰 불만 없었거든.


근데...살면서 처음으로 후회했어. 그 때 공부 열심히 해서 의사든 변호사든 됐어야했는데..누굴 만날지 모르니까 일단 열심히 해놓고 보는건데..그런 생각.


너..겨울씨 땜에 그런거냐? 겨울씨 가족이 다 의사고 외국계 금융사고..뮈 그래서..자격지심 느끼는거야?


자격지심..자격지심이라..그거겠지? 아무리 그럴듯한 어휘로 포장해도 결국은 그거겠지?


여름의 얘기가 끝나자 일동 침묵. 옆 테이블의 왁자지껄한 웃음소리에 침묵의 소리는 유난히 크게 들렸다. 쓴소리 잘하는 아토스가 있었다면 뭐라 했을까..아라미스와 부르토스는 연신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됐고..한잔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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