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세요? 겨울씨. 네 접니다. 여름.
통화 가능해요?
여름은 겨울에게 전화를 할 때마다 긴장했다. 통화를 확신할 수 없었다. 주중에는 겨울이 회사 일로 바쁜 날이 잦았다. 물론 후에 전화하거나 카톡을 보내주긴 했지만. 주말에도 겨울은 다른 이유로 바빴다. 가족 일이나 다른 사람을 만나거나. 아니면 사람 때문에 지친 심신을 달래려 아무 연락도 받지 않고 숨는 경우도 있었다. 겨울은 그런 일을 솔직하게 말했고 여름도 이해못할 건 아니었다. 우리 모두는 어느 날은 누구든 만나 술을 한 잔 하고플 때도 있고 또 어느 날은 모두로부터도 도망쳐 자신만의 동굴에서 지내고 싶은..이중성을 갖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그 사이클이 엇박자가 나지 않기만을 바랄 뿐.
다행히 오늘은 통화가 됐다. 일상적인 얘기를 주고 받다가 문득.
겨울씨. 좀 민감한 얘기일 수 있는데..얘기하기 싫음 안해도 되요.
아..네..여름씨. 무슨 일 있어요?
아뇨. 문득 겨울씨를 설득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될 지 궁금해서요. 중장기 전략을 짜야할지 단기속성으로 실행해야할지..(웃음)
아..참..어려운 문제죠? 시험일정처럼 정해진 게 있으면 그에 맞춰 공부라도 할텐데..이런 거 생각하면 여름씨한테 항상 미안해요. 제가 아주 이기적인 거에요..
아니..뭐 그런 얘길 하려는 건 아니고..부담도 주고싶지 않아요. 전 그저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궁금해서..경기에 참여는 했는데 상대와 몇 바퀴나 뒤처져 달리고 있는지..그런 것들. 겨울씨가 심판이니..힌트 정도라도 주시면..(웃음)
음..여름씨도 알겠지만 가을씨와는 한 일년 정도 만났어요. 가을씨도 나이가 있어서 결혼했음 하는 마음 에둘러 표현하곤 해요. 드라마 보면 주인공인 여름씨의 연적은 나쁜 사람으로 나올텐데..아쉽게도 현실은 그렇지가 않아서 가을씨는 너무 좋은 사람이에요. (웃음) 조용조용하고 제 말을 잘 경청해줘요. 영업 때문에 술은 좀 마시는데 술을 좋아하는 건 아니라서 저랑은 맛집 데이트 많이 하고..남편으로는 더할 나위 없어요..
연애중인데 연인으로 더할 나위가 없는게 아니라 남편으로 더할 나위가 없나요?
여름의 갑작스런 질문에 겨울은 잠시 아무 말도 없었다..
여보세요? 겨울씨..공격적으로 들렸나요? 그런 뜻은 아니였어요. 그저 궁금해서..미안해요.
아뇨. 여름씨. 여름씨가 갑자기 정곡을 찔러서 저도 당황했어요. 맞아요. 가을씨는 이상적인 배우자감이에요. 자상하고 배려심 깊은. 근데..제가 이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느낌을..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부부가 되면 현실적인 문제로 감정 상하고..애정이 식을 수도 있겠죠..하지만 적어도 식장에서..결혼하는 그 순간만큼은 너무도 열렬히 그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비록 그것이, 우리 엄마 표현을 빌리면 철부지 불장난일지 몰라도요..
무조건 저는 동의요..
여름은 심장의 두근거리는 소리가 너무 커서 겨울이 듣는 것은 아닐까 걱정될 정도였다. 겨울의 말이 잘 들리지 않는것 같아 이어폰을 빼 버리고 핸드폰을 귀에 갖다댄다.
여름씨. 전 가을씨에게도 그런 얘길 했어요. 우린 적어도 서로에게 솔직해지려고 노력해요. 가을씨도 자기한테 그런 부분, 좀 더 남자답고 사람을 감동시키는 매력이 부족한 거 안다고..제가 자기를 사랑한다고 느낄 수 있게 더 노력하겠다고..
그런 얘기 있잖아요. 어느 여주인공이 한 대사같은데..사랑이 풍덩 빠져버리는 건지 알았는데 이렇게 서서히 물드는 건지 몰랐다고..어쩌면 저도 어느 날 문득 깨달을지도 모르죠. 가을씨와 저의 관계도 사랑의 또다른 이름인 걸요.
가을씨는 겨울씨에게 뭐 바라는게 없다나요? 아쉬운 점이나 이렇게 해주면 좋겠다는..
그런 건 없다는데요? (웃음)
그렇군요. 가을씨는 겨울씨에게 점수 따는 확실한 선택을 했군요. (웃음)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는 모르겠어요. 누가 그런 걸 알겠어요..다만 가을씨가 더는 기다릴 수 없다고 할 때 제 마음이..이 사람을 상처주기 싫다면..그 땐..그 때가 마지막이 아닐까요..여름씨가 참가한 이 시합의..
잠시의 침묵.
한 명 더 있죠. 김봄이라고..
아..봄이요. (웃음) 봄이는..모르겠어요. 전 아직은 봄이가 남자같진 않아요. 봄이 딴에는 나이 차를 안느끼려고 부러 분위기 잡고 그러는데..전...
봄이가 왜 절 좋아하는지 모르겠어요. 저야 감사한데..봄이는 학교 다닐 때부터 인기 짱이었어요. 미남에 뇌섹남..집안 재력도 좋아서 돈도 잘 썼죠. 주변에 선후배가 많았어요. 저한테도 봄이 소개해달라는 친구도 있었고..심지어 우리 엄마도 좋아해요. 결혼 상대로 봄이를 소개하면 어떤 반응이실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군요. 제반 상황으로 보면 제가 확실한 3등이군요. 언더독 맞네요.
경기를 포기하고 싶나요?
천만에요. 겨울씨. 제가 제일 좋아하는 단어가 뭔지 알아요?
....
폐허..폐허에요. 모든 것이 무너지고 타 버려서 전소된 상태의.
당연히 이유가 있겠죠. 말씀해보세요. 기꺼이 듣겠습니다. (웃음)
네 (웃음) 제게 폐허는 파멸과는 다른 느낌이에요. 파멸은 무너지고 있거나 이제 막 무너짐이 끝난 느낌이라면 폐허는 아무것도 남은게 없는, 완결된 좌절의 느낌이랄까..그래서 역설적이게도 이제 비로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그런 상황..전소된 잿더미 공터에 비가 내리고..바람이 불고 햇살이 비치고..그런 무심하고 자연스러운 나날이 계속되고..어느 날 그 공터에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꽃 한 송이가 가느다란 줄기를 타고 피어나는 그런 그림..그려지나요?
멋진 장면..
겨울은 알았다. 그녀가 이기적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여름을 놓아주어야 함에도 차마 놓아주지 못하는 이유를. 겨울은 그런 여름이 좋았다. 결과를 떠나 물러나지 않았다. 분명 언더독인데 뭔가를 기대하게 만들었다. 이 사람이라면 어쩌면 엄마를 설득할 수도 있겠다는 밑도끝도 없는 기대..여름은 그런 사람이었다.
겨울씨. 전 그런 기분이에요. 오히려 3등이라 홀가분합니다. 다만 상황상 중장기 전략까진 어렵겠고 최대한 속력을 내야할 것 같아요. 아..이번 속초 여행..이런 거 같이 하면 친밀함이 확 오를텐데..아쉬워요..
여름씨. 제가 조금 더 생각하고 말씀드리려 했는데 통화된 김에 얘기할게요. 제가 같이 못가는 대신 부담을 좀 드리고 싶어요.
부담이요? 부담스럽다고 할 때 그 부담?
그럼 다른 부담도 있나요? (웃음) 제가 미션을 드릴게요. 여름씨가 속초 가서 해주세요. 미션 하시려 다니다보면 저랑 같이 걷는 느낌..쪼금은 나지 않을까요? (웃음)
오..생각도 못했어요.
우선 차는 두고 가세요. 대학생처럼 뚜벅이 여행 부탁드려요. 천천히 걸어야 속초 곳곳이 보일거고..나태주 시인이었나요? 자세히 봐야 예쁘다면서요..곳곳을 자세히 보다보면 그곳의 매력을 알게 되지 않을까..
뚜벅이 여행이라..벌써 머릿 속이 복잡하네요. 제 머리는 벌써 빠르게 고터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웃음)
그리고..
그리고?
속초에서 이발 어때요? 여름씨 장발에 대한 로망 있는거 아는데 회사원 치고 머리 약간 길어 보여요. 회사에서 괜찮으신가요? (웃음)
아..저도 아침마다 살짝 긴데..그런 느낌이긴 했어요. 회사 선배들이 얘기할까 말까 몇 번 침 삼키지 않았을까..이즘 사생활은 놔두는 문화기도 하지만..제 머리가 단정하진 않아도 보기 싫을 정도까진 아닌..그 경계여서 말하기 애매했을 수도 있어요..
여름씨. 여름씬 긴 머리도 잘 어울려요. 다만 낯선 곳에서의 낯선 일정..그 자체로 재미있을 것 같아서 미션으로 넣었어요. 누가 속초 같은 관광지에서 머리할 생각을 하겠어요? (웃음)
좋네요. 강남스타일 말고 속초스타일. 또 있나요? (웃음)
물회 맛집 가셔서 물회 드시고 인증샷 하나 부탁드리고요, 설악산이 보이는 카페에서 커피 한 잔 부탁해요. 아..로컬 카페로요. (웃음)
네네..적고 있습니다. 손님 또 주문하실게 있나요? (웃음)
마지막으로..겨울 바다를 보신 소감을 시로 표현해주신다면 큰 영광이겠습니다. 자작도 좋고 인용도 좋고..그저 여름씨의 마음에 딱 그 표현이면 되겠다는 문장이 보고 싶어요. 미안해요. 아주 어려운 미션 같아요. 저라면 못할 거에요. (웃음)
마지막은 미션 난이도가..극악이네요..(웃음)
여름씨..엄마가 찾으세요. 저 가볼게요.
네..미션 너무 감사해요. 진짜..고마워요. 부담이 아니라 선물..이네요.
아니에요. 같이 못가 미안하고..여름씨한테 해줄 수 있는게 뭘까 생각한게 그 정도라 외려 죄송한데요. 그리고 여름씨..
네..
여름씨가 뛰고 있는 그 트랙..선두권에 몇 바퀴 뒤져있는지..
....
세다가 잊어버렸어요. 지금은..모르겠어요. 이 트랙을 가장 많이 돈 사람이 누군지..
좋은 밤 보내세요..
겨울이 전화를 끊었다. 여름은 한동안 전화를 끊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