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화야.
어..여름아.
아토스. 취하면 치토스. 삼총사 중 가장 진중한 성격. 일본어 전공. 교환학생으로 일본에 갔다가 지금의 배우자 만남. 몇 개월 전 결혼. 아이 없음.
며칠 전에 못 가서 미안. 장모님이 갑자기 서울 오셔서..
그 날 너 만나 할 얘기가 많았는데..그래도 오늘이라도 시간 내줘 고맙다.
뭔데 그렇게 내가 필요하냐? 나 돈 없는 건 알테고.
(웃음)
너 빈털털인거 제수씨는 아냐? (웃음)
됐고..뭔데?
거두절미하고..나 좋아하는 사람 있는 거 알지?
그냥 좋아하는 사람은 모르고 미치게 좋아하는 사람은 한 명 알지.
그래. 네가 떠올리는 그 사람.
야..언제 한 번 소개라도 시켜줘야 떠올릴 거 아니냐..뭐 얼마나 대단한 분이시길래..
그냥 여신 강림이라 생각하면 된다. 네가 아는 여신의 모습을 떠올려봐. 막말로 누구를 상상하든 그보다 더한 사람이라 보면 되.
미쳤구만..
나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긴 해. 자기 전에 도대체 내가 왜 이러지 싶을 때가 한두번이 아냐. 에너지 소모가 너무 크고..포기하고 싶기도 하고..그럼에도 그러질 못하겠어. 내가 그만두면 그 사람 너무 슬퍼할 것 같아서..외모, 성격, 재력 모든 걸 가졌지만 실은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사람 같달까? 내가 구해줘야 할 것 같은..손을 뻗지 않으면 바스스 허물어질 것 같은..
그 반대는 아니고?
여름은 잠깐 병화의 눈을 응시했다.
네 말이 맞을지도..구원받아야 할 사람은 나일 수도 있겠다.
알았다. 어쨌든 여신님이 있고..아 근데 두 사람 어떻게 만났다고 했지? 들었던 것 같기도 한데..
아..처음 본 건 취업한지 얼마 안됐을 때 스벅에서였고..말하면 긴데..여튼 그 때 그녀는 스벅 직원이었고 내가 한동안 혼자 좋아해서 자주 그 매장 갔었고..
근데 용기내서 만나고 싶다 말했더니 남친 있다고 정중하게 거절..당해서..그 날로 스벅 매장은 쳐다도 안보고..(웃음)
킵 고잉(Keep going)
몇 년 후 퇴근 길에 지하철 탔는데 지하철이 잠시 정지했다가 급출발했거든. 오작동이었겠지. 그 때 옆에 계신 여자분이 중심을 못잡고 넘어지지 않으려고 내 팔을 잡은거야. 나도 놀라고 그 분은 더 놀랐지. 죄송하다고 하는 그 여자분 얼굴을 봤는데..
참 내..이즘 영화에서도 그런 장면은 안넣는다. 개연성이 너무 떨어져서..진짜야?
야..내가 너한테 왜 거짓말을 하냐. 둘이 너무 놀라 어버버하다가..내가 커피나 한 잔 하자고 했어. 몇 년만이라..어찌 지내나 궁금하기도 했고..더 중요한 건 얼굴 마주친 순간부터 심장의 요동이 멈추질 않더라고.
그 이후는 너도 대충 아는대로..혼자일거라고 기대한 내가 바보지. 아니 아직 미혼인게 다행인건가..한 명도 아니고 두 명이나 이미 좋아하는 이가 있고..시간이 이대로 흘러가면 결국 그녀는..아마도..
그 상대가 너는 아닐테고..
그래서 네 도움이 필요한 거야.
내가 뭘 도울 수 있을지 전혀 감이 안오는데? 그녀를 납치라도 하란 거냐?
들어봐. 그녀가 초등학생일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거든. 이후 어머니가 너무 고생하면서 어린 자녀들을 키운거지. 어머니의 존재감은 그녀에게 보통의 집 이상일 거란 건 짐작했지만..생각 이상이야. 어머니의 축하 없이는 결혼하지 않을 것 같아...
그렇구만. 이해는 된다만..
학교 다닐 때 남친도, 모르긴 해도 아마 스벅 재직할 때 만났던 사람도..어머니가 중간에 나선 느낌이야..
너무 단정짓는거 아냐?
아니..나도 전화받았거든..
...
며칠 됐어..어머님 뵌 지.
그러니까 그 분 어머니가 너한테 직접 전화해서 보자고 하셨다고? 이건 또 무슨 막장 드라마냐..아니 연락처는 어찌 알고?
겨울씨는 아냐. 슬쩍 떠봤는데 전혀 모르는 눈치더라구. 아마 아까 말했던 연적 두 명 중 한 명이 알려준 것 같아. 그 사람은 겨울씨 대학 후배라서 어머니와도 친분이 있거든.
뭔가 복잡하면서도 묘하게 재미있군. 그래서? 내가 다 떨린다 야..취업 압박 면적도 아니고..
살면서 그렇게 긴장되는 만남이 있을까 싶다. 전날 당연히 한 숨도 못자고 나갔지. 좋은 말 못들을 거 각오하고 갔는데도 마음이 진정이 안되더라.
내 기억에 어머니가 보통 분이 아니었지 아마..자수성가한 분이라 자존심도 쎄시고..사람 상처주는 말 대수롭지 않게 하시는..너 많이 힘들었겠다..
내가 너한테 겨울씨 어머니 얘기했었나? 여름은 기억이 안나 물었다.
일전에 우리 다 같이 봤을 때 지나가는 말로 잠깐..그 때만해도 말 그대로 지나가는 말이었지..이렇게 진지해질 줄은..
아마 병화의 기억이 맞을 것이라 여름은 생각했다. 답답한 마음에 친구들에게 겨울에 관한 이런저런 얘기를 했었다..
의외로 어머님은 차분하게 말씀하셨어. 솔직하게 지금 만나는 변호사도 성에 안차지만 겨울씨 나이도 있고..사람 착하고 속썩일 것 같지 않아 결혼 얘기하면 못이기는 척 넘어가려했는데..요 몇 달 갑자기 딸이 이상하게 행동한다는거야. 안하던 멋도 부리고..통화하면 하세월이고..왠지 자기가 하는 말에 딴지도 자주 걸고 그래서..좀 알아봤다는거야.
알아봐? 아..아까 그 후배라는..
아마도? 뭐 그치밖에 없겠지..
드라마도 이런 드라마가 없구만..이거 아침 드라마로 딱이네..대막장..환장극..
병화는 소주를 안주도 없이 털어넣었다. 술이 땡기는 얘기긴 했다.
어머님 말씀의 요는 자기 딸 만나지 말아달라..뭐 이거 아니겠어? 넌 쫄아서 아무말도 못했을거고..뻔하네.
아니..나도 놀랬는데 그 날 그리 쫄진 않았어. 내가 어머님 말씀 듣다가..그래도 중요한 건 딸의 선택이 아니겠냐고 되물었거든.
오..정말?
응..말해놓고 나도 놀랬어. 나 이러다가 어머님한테 싸대기 맞는거 아닌가..아니면 앞에 있는 커피로 샤워하거나..순간 불안했는데 (웃음) 어머님은 한동안 내 얼굴을 쳐다보시더니 철없는 선택은 자기만으로도 족하다고 하시더라구. 그리곤 일어나셨어. 꼭 부탁한다고 하시면서.
뭔가 서글프면서도 2% 부족한 느낌이군. 그 분한테는 어머님 만난거 얘기했어?
여름은 고개를 저었다.
난 오히려 흥미로운 얘기를 들었어. 어머님에 대한 얘기를 하다가 겨울씨가 그런 얘길 하는거야. 자기 아빠가 시인 같다고.
시인?
어머님은 두 자매에게 아버지 얘기를 거의 하지 않으셨대. 물어보면 화를 내거나 묵묵부답인 식이었나봐. 언니와 가끔 아버지에 대해 얘기했지만 언니도 잘 기억하지 못하는 모양이야. 하긴 초등학생 저학년이었다면..그러다가 겨울씨가 뭔가 찾을게 있어 어머님 방 서랍을 열었다가 시집 두어권을 봤다는거야. 시인은 아버지였고..아니 아버지겠지. 동명이인의 책을 어머니가 보관할 필요는 없을테니.
이거..드라마 시청률 오르는 소리가 들린다..
겨울씨한테 전에 들은 얘기로는 아버지가 IMF 시절에 뭔가 안좋은 일이 있었는지 집을 나가셨고..이후 한번도 못뵀다고 했거든? 그리고 몇 년 뒤 사망 통지서를 받았는데 시신이 발견된 곳은 일본이었다는거야.
이건 또 뭔 소리냐..병화의 얼굴은 어느새 여름의 얼굴에 바짝 붙어있었다.
지금까지 말한건 팩트야. 시인이었던 아버님 실종. 일본에서 시신 발견. 어머님은 아버님에 대해 함구.
그리고 이제부터는 내 뇌피셜인데..
아버님이 일본 가셔서..그냥 살지는 않으셨을 것 같아. 먹고살려면 일이야 하셨겠지만..글쟁이는 글을 쓰지 않고는 삶이 의미가 없거든. 틀림없이 아버님이 남기신 작품이 있을것 같아. 일본어든 한국어든간에. 책으로 발간이 안됐을 가능성이 더 크지만 혹시나..혹시나 출간하셨다면..나..그 책을 꼭 찾아야할 것 같다.
여름과 병화는 동시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 숨을 내쉬며 병화가 말했다.
내가 해야 할 일이란게 그 책을 찾아오란 거냐? 일본 곳곳을 다 뒤져서, 출간됐는지 여부도 모르는..응? 그런 전설같은 책을?
무리란거 알아.
무리지 임마. 그게 말이 되냐고?
친구 살린다고 생각하고 한번 알아만 줘 봐라. 네 장인장모한테 한번 물어보라고. 좋은 분들이시잖아. 혹시 알아. 사위 친구를 위해 발벗고 알아보실지.
병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당장 어떻게 접근해야할지 그려보는 모습이었다. 여름은 도움을 줄 수 있는 친구가 병화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삼총사 중 나머지 두 녀석은 병화보다는 믿음이 덜갔다.
병화야. 너도 알겠지만 내가 이 불리한 애정 전선을 뒤집는 건 어머님 마음을 돌리는 것밖에 없다. 재력 안돼. 학벌, 직업도 경쟁력 없어. 심지어 나이도 그닥 젊지도 않아...내가 뭘로 어머님께 어필하겠냐..
허우대는 멀쩡하잖냐..나름 학교다닐 때 러브레터도 받아보고. (웃음)
여름은 잠시 웃더니 이내 진지하게 말했다.
뭔가 이게 끈일 것 같아. 생명줄..생명의 동아줄 있잖아..
썩은 끈일 수 있어. 네 희망 시나리오는 너무 비약이 심해. 타고 올라가다 뚝 끊어지면 회복 불능일거야..
그래도 해보자. 어차피 이거 말고 대안도 없어.
알겠다고. 네 얘기 들으면서 이미 난 이 동화같은 스토리에 홀려버렸어. 엮여 버렸다고..나도 일본어 전공해서 일본에 아는 분 좀 있고..네 말대로 현지인이 젤 잘 알테니 장인장모님 뵙고 함 말씀드려볼게. 아 그 분 아버님 존함이 어떻게 되냐?
병화는 핸드폰에 이름을 적고는 고개를 연신 갸웃거린다. 왠지..낯설지 않다는 듯.
여름아. 차라리 그 분이랑 도망쳐버려. 아님 막말로 애나 한 명 낳아오든가. 어머님이 어쩌시겠냐..
그건..어머님을 떠나 겨울씨가 원하지 않을거야. 그렇게 결혼한들 겨울씨가 행복하겠냐..할아버지 할머니를 등지고 결혼한 어머님..그 어머님을 등지고 결혼하는 딸..뭔가 비극적이잖아. 난 다른 길이 있을 것 같다. 쉽지 않겠지만..사랑한다고 매일 말하고 싶은 그 사람을 위해..그 쉽지 않을 길을 걷고 싶어..
병화는 말이 없었다.
진짜로..
알았다고..
병화는 주섬주섬 가방을 챙기면서 말했다.
가자. 지금 한가하게 술이나 마실 때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