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여름을 만났을 때

by 정자까야

겨울은 아무 말 없이 걸었다. 흘깃 쳐다본 옆모습은 웃는 듯 밝은 표정. 여름은 내심 안도했다.


갑자기 표가 생겼다는 뻔한 거짓말을 겨울은 흔쾌히 속아주었다. 회사 일로 간혹 주말에도 잠깐씩 나가 일한 겨울이었기에 금요일 밤이라고 데이트를 보장받기는 어려웠다. 더군다나 다른 두 남자가 그냥 있을 리도 만무하다.


매주 겨울의 시간을 두고 치열한 눈치싸움같은 게 펼쳐졌다. 겨울이 누구의 청도 듣지 않고 숨어버리는 게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다른 사람 말고 절 선택한 이유가 순전히 영화 때문이었나요? 묻고 나니 좀 한심한 질문같긴 한데..여름은 멋적은 듯 웃으며 물었다.


가을씨와는 다 터놓고 지내거든요. 여름씨, 봄이 존재..다 알고 있어요. 누군가를 좋아하는 걸 막을 수는 없는 일이래요. 다만 자신이 가장 오랜 시간 곁을 지켰으니 조금더 유리하지 않겠냐며..자긴 자신 있으니 저보고 원하는만큼 시간 보내고 오라 하더군요. 가을씨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에요. 사람 사이에는 신의란게 있으니까요.


겨울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계속 말했다.


솔직히 이번 주는 여름씨의 영화 선택이 신의 한 수 였어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재개봉이라니..거부할 수 없는 제안..정말 저를 너무 잘 알고 픽하신 일정이라 그냥 제가 무너졌습니다. 겨울은 싱긋 웃었다.


필살기였..아니 우연히..어떻게 그리 우연히 그 티켓이 손에 들어왔을까요. 정말 신의 가호가 있었던 거죠..여름이 얼버무리자


아..네...겨울은 짧게 대답하곤 또 웃었다.


근데 왜 그렇게 옛날 영화를 좋아하게 됐어요? 저야 같은 취향이니 말할 상대를 찾아 좋지만..뭐 특별한 계기가 있거나 했나요? 여름이 겨울이 옆모습을 힐끗 보며 물었다.


잘 모르겠어요. 굳이 꼽자면 아빠에 대한 추억이 거의 없는데 어렴풋이 아빠와 극장에 갔던 기억 정도라고 해야 할까요..엄마는 언니가 수학, 과학 같은 과목에 재능을 보여서 다행이라고 했어요, 그 말은 저는 그렇지 않아 엄마 속을 썩였다는 거겠죠..


여름씨. 전 어려서부터 스토리를 좋아했어요.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사람과 사물의 관계보다 훨씬 흥미로웠죠. 제가 표현은 못해도 남들이 표현한 것은 잘 이해했어요. 그게 문장이든 그림이든 혹은 음악이든..엄마는 어떻게든 이과 계열 과목에 흥미를 갖도록 유도했지만..제가 오늘 여름씨 만나러 나온 거 보면 그 노력은 보상받질 못한 거겠죠.


어머님은 겨울씨가 아버지의 기질을 닮지 않기를 바랐던 게 아닐까요..여름의 물음에


맞아요. 어릴 때는 엄마가 왜 그럴까 몰랐는데 커가면서 그런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더라구요.

겨울은 엄마를 떠올리곤 가법게 고개를 저었다.


겨울씨 저는 어쩌면 어머님이 아직도 아버지를 잊지 못하신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극과 극은 닿는다는 말이 있듯이 아버님에 대한 원망, 원한은 아직 아버님에 대한 애정이 어머님의 마음 한켠에 살아있기 때문에 그토록 짙게 베어나오는게 아닐까..여름의 말에


겨울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끄덕임에는 그렇다 한들 그것이 현재의 상황, 자신과 엄마의 관계에 무슨 영향이 있겠는가..그런 답답함도 묻어났다.


여름씨는 이 영화 몇 번이나 봤어요?


금요일 저녁은 늘 아쉽다. 퇴근하고 무엇인가를 하기엔 시간이 너무 짧다. 서로 말도 않고 햄버거를 입안에 우겨넣었지만 영화가 끝나고 나니 벌써 9시. 좋아하는 사람과 좋아하는 것에 대해 얘기나눌 시간은 고작 두어시간 남짓. 겨울은 엄마에 대한 얘기로 그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저요? 세보진 않았지만 한 열 번은 봤을걸요? 중요한 대사는 외우는 수준이죠. 여름은 대수롭지 않은 듯 대답했다.


그래도 또 보신 거에요?


놀랍다는 겨울의 표정. 여름은 외려 겨울의 모든 표정이 놀랍고 즐거웠다.


그래서 다행이었죠. 스크린 안보고 겨울씨 얼굴 봐도 영화 내용을 쫓아가는데 전혀 문제가 없었으니까.


참..사람 무안하게 하시네요. 겨울이 웃으며 말했다.


에휴..저도 능글맞은 거 싫어하는 사람인데 겨울씨만 만나면 백년 묶은 뱀장어가 되니..죄송합니다. 여름은 멋적은지 머리를 자꾸 쓸어넘겼다.


됐어요. 이미 뱉은 말..잘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겨울은 환히 웃고는 말을 이었다. 그러면 영화를 그리 보셨으니 영화 속 대사에는 어떤 입장이세요? 여자와 남자는 친구가 될 수 있나요?


아..그거요? 여름은 몇 번 생각해봤던 주제인 양 바로 의견을 얘기했다.


전...어렵다고 봐요. 머리로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이해되는데 마음으론 그렇지가 않더라구요. 경험상.


겨울은 잠시 생각하더니


남주가 그랬지 않아요? 외모나 타입이 자신의 이상형이 아니면 가능할거라고. 그건 어떻게 생각해요?


그건..글쎄요. 친구라기보단 그냥 사무적인 관계, 이를테면 동료나 동급생..뭐 그 정도 관계로 끝나지 않을까요? 친구라면 좀 더 친밀한 느낌이 있어야하는데 그 친밀함이 이성간에는 이상한 방향으로 스파크가 튈 것 같은거죠..


일리가 있네요..겨울이 말했다.


표정보니 겨울씨는 저랑 다른 생각이신 것 같은데요? 여름은 겨울의 생각에 잠긴 얼굴을 보며 말했다.


네..전 친구가 가능하다고..아직은..나중엔 어찌 변할지 모르지만..아직은 그리 생각해요.


저희 둘이 오늘은 각자 해리와 샐리로 빙의했네요. 여름이 말하며 웃었다. 그 말에 겨울은


네..여름씨도 마지막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저한테 달려와주시길 바래요.


여부가 있겠습니까..여름은 시원하게 대답했다.


카페를 나와 12월의 종로를 걸었다. 이 순간이 영원히 계속된다면..마치 영화 '사랑의 블랙홀'처럼..그런 생각을 하다 겨울을 보내줘야 하는 지하철 입구에서 여름은 겨울의 소매를 잡아세웠다.


겨울씨. 엔딩 장면 기억하죠? 빌리가 맥 라이언을 붙잡고 그녀가 자신에게 어떤 존재인지 얘기하는거. 저한테 겨울씨는 빌리 크리스탈의 맥 라이언이에요. 리처드기어의 데보라 윙거고 잭 니콜슨의 헬렌 헌트에요. 휴 그랜트의 앤디 맥도웰이고 니콜라스케이지의 티아 레오니구요..


잠시 숨을 고른 여름.


로버트드니로의 메릴스트립..그리고..그리고..워렌 비티의 아네트베닝..입니다.


놀란 겨울은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여름을 쳐다봤다.


여름씨..


솔직히 연상되는 영화가 몇 개 없었지만..고마워요..로맨틱했어요..겨울은 오늘 그 어느 때보다도 환하게 웃었다.


겨울은 손을 흔들고 내려갔다. 아..이건 앤디 맥도웰이 휴 그랜트와 작별하는 장면을 닮았다..그럼 그 다음 장면은..아..이건 아닌데..


여름은 고개를 떨구고 버스 정류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세상 일 복선 따윈 없다고 중얼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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