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네가 좋아하는 일이라면..

by 정자까야

네? 오늘이요? 당연히 되죠. 네..어디요? 아..명동이요? 네..네..알았어요. 있다 봐요.


언니네 가족과 모임이 있다고 했던 겨울이었다. 형부 일정상 하루 미뤄질 듯 하다고..갑자기 시간이 비어 연락했다는 말에 뛸 듯이 기뻤다. 여름이나 그걸 전하는 겨울이나.


근데 갑자기 웬 명동인가..


맛집이 있나..아님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특이한 카페? 아무렴 어떤가. 지옥이라 해도 나갔으리라.


명동역에서 만난 겨울은 신나 보였다.


여름씨. 저 지금 완전 흥분했어요.


왜요? 겨울씨 신나하는거 보니 그냥 좋긴 한데 저도 좀 알면 더 좋을 것 같은데..(웃음)


(웃음) 그렇겠죠. 일단 따라와요. 시간이 별로 여유가 없어요.


여름은 겨울을 따라 걸었다. 저녁이었고..골목 골목을 지나 나중에는 어딘지 알 수 없게 됐다. 겨울은 핸드폰으로 길을 찾아갔다. 한두번 와 보긴 한 것 같은데 정확히는 모르는 느낌. 그러다 익숙한 길에 들어섰는지 핸드폰을 접고 여름을 불렀다. 다 온 듯했다.


지하로 내려가니 바인 것 같기도 하고..보통의 선술집 같기도 한 공간이 나왔다. 한 켠에 무대가 있었고 전자 피아노와 스탠드형 마이크, 기타, 베이스, 드럼 세트, 그리고 스피커 등이 놓여 있었다. 비트박스 같은 것도 보였다. 그러니까 이곳은..언더그라운드 뮤지션들이 공연을 하고 관객들은 맥주 한 잔 하며 라이브 음악을 듣는 펍이었다.


겨울씨가 이런 취향도 있었구나..내심 놀라며 자리를 안내받은 여름. 의자에 걸터 앉으며 겨울에게 물었다.


여기 몇 번 와봤어요?


네..친구들이랑요.


친구들이면..대학 베프들요? 이름이..희 자가 들어갔는데..


경희, 미희요. (웃음)


아..그렇죠. 희 자매님들. (웃음)


이름 갖고 놀리면 그 자매님들이 여름씨를 가만히 두질 않을 겁니다. (웃음)


(웃음) 우리끼리 얘기죠..극진히 모셔야할 분들 면전에 그런 허언을 하겠습니까..


여름은 누가 듣는것마냥 겨울의 귀에 속삭였고 겨울은 소리 내 웃었다.


근데 오늘 초대 뮤지션은 누구죠? 언더그라운드는 제가 아는 분이 없어서..힌트라도 주셨음 대충 눈대중으로 공부라도 했을텐데요.


그럴 필요 없어요. 오늘 뮤지션은 여름씨니까요.

(웃음)


네? 그게 무슨?


여름은 상황이 납득이 안 가 멍하니 겨울을 쳐다봤다. 겨울은 이 상황이 너무 재미있다는 듯이 발까지 동동 구르며 여름을 쳐다봤다.


여름씨. 여기가 가끔 번개식으로 그 날 손님들 중 한 명을 무대로 모셔서 장기 자랑할 시간을 주거든요. 악기를 다루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아님 시를 읊어도 되고..입담 좋으신 분들은 꽁트하기도 하시더라구요. 친구들이랑 왔을 때 수준급 실력에 놀라기도 하고 너무 어색해서..그게 더 웃기기도 했던 적도 있어요.


여름은 거의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겨울은 이런 표정은 이미 예상했다는 듯이 아랑곳 않고 말을 이었다.


여름씨. 장기 많잖아요. 피아노도 고등학생 때까지 간간히 쳤다고 했죠?


제가 그랬나요? 과거의 모든 발언을 부정하고 싶네요..여름은 이젠 거의 울상이었다.


그리고..시도 종종 쓰시니..즉석 시나..아님 외우고 계신 시를 낭독해도 되고..혹시 드럼이나 전자기타..이런 건 대학 때 안해보셨나요? 왠지 대학 때 밴드에서 과묵한 기타리스트였을 것 같은 포스도 있는데..


겨울은 뭐가 그리 좋은지 끊임없이 말했다.


겨울씨. 제가 천재가 아닙니다. 대학도 장학금 받아야 해서 공부하느라 바빴다구요. (웃음)


그래도 동아리나 그런 건 하나 하셨을 거잖아요.


하긴 했죠..


뭔데요? 설마 학술 동아리?


(웃음) 안가르쳐 줄겁니다. 이렇게 일방적으로 쇼를 준비하셨으니..저는 묵비권으로 대응할랍니다.


겨울은 팔짱을 끼고 여름을 응시했다. 흡사 홈즈처럼 뭔가를 알아맞춰 보겠다는 듯. 여름은 허공을 보며 겨울의 시선을 애써 외면했고 마침 다행히도 주문한 맥주가 나왔다.


이런 번개 데이는 말 그대로 번개인가 보죠? 여름은 애써 화제를 돌렸다.


네..홈피 가면 한 달 정도 일정이 미리 공지돼 있는데 뮤지션 사정에 따라 일정이 취소되는 경우가 있거든요. 그럼 오늘처럼 관객과 함께하는 번개 모임으로 바뀌는거죠. 사실 경희, 미희랑은 뮤지션 공연보다도 번개날 부러 더 찾아왔어요. 예기치 못한 장면들이 많아 너무 잼있었거든요..

가족 모임 취소된 직후 여기 일정 혹시나 하고 봤는데 마침 여기도 번개 일정이지 뭐에요. 너무 좋아서 여름씨한테 바로 연락한거고..


음..이제 알겠어요. 그게 그렇게 된 거군요..여름은 뭔가 대단한 걸 알기나 한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오늘의 주인공은 어떻게 결정되나요? 미리 예약을 받나요?


에이..그럼 재미가 반감되잖아요. 현장에서 즉석으로..신청자가 많으면 운영자님이 지목하죠. 근데 보시다시피..그리 넓은 곳은 아니라서..많아도 다들 기회를 받아요. 그렇게 해도 두시간도 안걸려요. 신청자 없음..음악 틀어놓고 맥주나 와인 마시는거고..그래도 오늘은 최소 한 명은 있겠죠..왜냐면 제가 추천할거니까..(웃음)


여름은 고개를 푹 숙였다.


여름씨. 부담 되면 안하셔도 되요. 겨울은 그제서야 여름이 걱정됐는지 마음에도 없는 얘길 했다. 겨울은 보고 싶었다. 무대에 있는 여름을. 이 남자는 자신의 막무가내 부탁도, 철없는 응석도 어떻게든 받아줄 것 같았다. 무리한 부탁이었을까. 낯선 사람들 앞에서..너무 부담스러울까..왜 아니겠나. 보여줄 장기가 없다면..이만큼 힘든 시간이 없을 것이다. 그것도 깜짝 쇼로..갑자기라니. 하지만 여름이고 싶었다. 친구들이 아닌 데이트 상대로 누굴 데려오고 싶다 느꼈을 때 떠오른 사람. 여름이면 했고 여름이어야 했다. 충분한 설명 없이 이끈 것은 나중에 원망을 달게 들으리라. 하지만 이것저것 양해를 구한다면 쌓을 수 있는 추억이 얼마나 될까. 여름이 반려자가 된다면 오늘의 일정은 옳았을 것이고 그렇지 못한다면 오늘의 일정은 더 옳았을 것이다. 만약 후자라면 오늘의 여름은 일평생 남을 연인의 모습일 것이라고 겨울은 직감했다.


부담이요? 부담이야 되죠. 그래도 기꺼이 할거에요. 겨울씨가 기대하니까..(웃음)


누가 그러더라구요. 용감하게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은 겁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겁나지만 용기를 내서 하는 거라고. 그리고 남자는 사랑하는 연인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는 것이구요. 겨울씨. 일전에 우리 만화 얘기하다가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야구 만화 얘기했던거 기억나요?


아..네..그 때 여름씨가 열심히 얘기해줬죠. 까치..엄지..


맞아요. 까치는..하..지금 보면 진짜 유치한데..엄지가 좋아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했어요. 가보자구요. 오늘 제 무대명은 설까치입니다. (웃음)


겨울은 너무 웃겨서 테이블에 엎드려 웃었다. 그리고 고마웠다. 엄지에 대한 까치의 마음씀이.


시간이 됐고 테이블은 만석이 됐다. 어림잡아 열 댓 개. 스물에서 서른 명 정도의 인원이었다.


손을 들어달라는 운영자의 요청에 대여섯명이 손을 들었다. 겨울은 여름을 슬쩍 보더니 다소 얌전하게 손을 들었다.


광적으로 손을 흔든 분이 우선 지명됐다. 간략한 자기 소개. 나오는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태연의 만약에.


노래를 들으며 여름은 겨울과 맥주를 두세번 부딪혔다. 속초에 갔을 때 들었던 도깨비 OST 중 첫눈처럼 너에게 가겠다는 노래..겨울이 불러주는 그 노래가 문득 듣고팠다.


두번째도 다른 손님 차지였다. 웬일인지 겨울은 힘차게 손을 들지 못했다. 두번째 손님은 피아노를 연주했다. 베토벤 바이러스. 여름도 학원에서 숱하게 쳤던 노래. 여름의 어머니는 초등 1학년의 연주를 듣고 펄쩍펄쩍 뛰셨었다. 자기 아들이 피아노 영재라고. 여름은 그런 어머니를 떠올리며 웃었다.


운영자가 마이크를 손님으로부터 건네받았을 때 여름은 벌떡 일어나 외쳤다.


다음은 제가 한 번 해보겠습니다.


사람들은 웃었고 겨울은 놀라서 여름을 쳐다봤다. 운영자는 웃으며 콜 사인을 보냈다.


무대에 오른 여름은 마이크를 건네받고


아아..30대 중반 회사원 김여름입니다. 대학에서 댄스 동아리를 했었습니다. 졸업한지 좀 돼서..기억나는대로 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댄스라는 말에 객석은 난리가 났다. 휘파람을 불고 소리를 지르고..겨울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저 무대 위의 여름만을 쳐다볼 뿐.


여름은 운영자와 궛속말로 뭔가를 주고받더니 무대 모퉁이에 걸려있는 모자를 썼다. 모자를 한바퀴 돌려쓰는 폼이 제법이었다. 객석은 아수라장 직전이었다. 그리고 나오는 빌리진..여름은 골반을 앞뒤로 흔들더니 발로 가볍게 허공을 찼다. 모자를 이용한 현란한 손동작 후 이어지는 문워크라니. 끝이 아니었다. 운영자는 서태지부터 초기 아이돌 그룹의 대표 곡 몇 개, 가장 최근으로는 BTS까지의 하이라이트를 리믹스해서 음악을 틀었고 여름은 노래에 맞는 율동을 제대로 보여주었다.


쇼가 끝나자 여름은 흠뻑 젖어 있었다. 관객들은 다소 어설프지만 동작은 정확했던 이 아마추어 춤꾼에게 반해서 앵콜을 연호했다. 여름은 다시 운영자와 몇 마디를 나누었고..흘러나오는 음악은 한 때 유행했던 코카인..이었다. 여름은 양복 웃도리는 벗어던지고 셔츠도 반쯤 풀어제친 후 코카인 춤을 정말..맛깔나게 췄다. 짧고 강렬하게.


쇼가 끝나고 운영자는 여름과 하이파이브를 나눴다. 운영자도 너무도 흡족한 무대였는지 테이블당 맥주 한 병을 돌리겠다고 골든벨을 울리면서.


다음 참가자는 없었다. 그만큼 여름의 무대는 인상깊었다. 배경 음악이 나오고 여름과 겨울은 맥주로 목을 축였다. 겨울은 웬일인지 조용했다. 여름은 그런 겨울이 계속 신경이 쓰였다.


펍의 문을 열고 나와 밤거리를 걸었다.


여름씨. 보면 볼수록 대단한 사람이네요. 제가 여름씨를 너무 모르고 있었다는 생각에 슬프기까지 했어요.


아..겨울씨. 놀랐나요?


겨울은 갑자기 길에서 멈췄다.


네..정말 많이. 제가 여름씨를 놀래킬려 했는데 그 반대에요. 완전히. 너무 놀라서 아직도 심장이 멈추질 않는다구요. 얼굴 빨개진 거 보여요? 여름씨가 너무 멋있어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요. 아..나 너무 바보같아요..

겨울은 손으로 얼굴을 깜쌌다. 더 이상 얼굴 보이고 싶지 않다는 듯이.


여름은 겨울을 잘 다독여 보냈다. 그리고 다시 혼자 걷는 밤거리. 퇴근 후 할 일이 없을 때 댄스 학원에 가서 가끔 춤을 추곤 했다. 언젠가 겨울에게 보여줬음 하는 마음..왜 없었겠는가. 웃음이 많은 그녀를 웃게 할 수 있다면..그래. 1년 내내 설까치가 되지 못할 이유도 없다.. 다만..굳이 이현세 작가에게 아쉬운 것이 있다면..마지막을 꼭 그렇게 맺었어야 했을까. 엄지는 잘 살면 되는 것이다. 비록 다른 남자의 반려자가 됐다 해도. 까치도..까치도 그걸 바라지 않았을까..여름은 떠올리기 싫은 엔딩 장면을 떠올리곤 고개를 가로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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