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은 가을을 만나러 백화점으로 갔다. 가을의 회사에서 백화점 상품권을 인센티브로 지급한 모양인지 가을은 겨울에게 선물을 사주고 싶다고 했다.
그냥 가을씨 옷 사시지 그랬어요..
겨울은 가을의 권유에 못이겨 옷을 사들고 나오면서도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거절하는 것은 가을에게 미안한 일이었다. 언제쯤 이런 마음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그런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차 한 잔 해요.
가을은 백화점 내 카페로 겨울을 안내했다.
여기 회사에서 그리 안 멀어서..몇 번 와봤는데 커피 괜찮거든요.
네..사실 겨울도 이 곳이 낯설지 않다. 엄마와 몇 번 와 본 곳. 언니는 엄마와 외출하는 일이 극히 적었다. 엄마의 잔소리를 언니는 견디지 못했다. 겨울의 엄마는 할 수 없이 겨울만을 데리고 다녔는데..그래서인지 겨울은 이 곳에 대한 기억이 좋지 않다. 언니가 없어 심심했고 그렇다고 엄마가 겨울의 말벗이 될만큼 살가운 사람이 아니었다.
가을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중 겨울은 이상한 기운을 느껴 돌아보니 엄마가 저만치서 겨울과 가을을 보고 있었다. 겨울은 너무 놀라 소리를 지를 뻔했다.
엄마는 함께 온 것으로 보이는 일행에게 무어라 말하더니 겨울에게 다가왔다. 가을은 겨울의 어머니임을 직감하고 자리에서 황급히 일어나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겨울이 엄마입니다. 초면에 죄송한데 잠깐 합석해도 될까요?
엄마..그냥 가. 나중에 인사드리러 갈게. 겨울은 거의 울상이었다.
불편하시면 가겠습니다. 겨울의 엄마는 가을을 응시하며 말했다.
아뇨. 괜찮습니다. 편히 앉으시죠. 가을은 이런 만남을 상상해본적이 없었다. 겨울도, 겨울의 엄마도 마찬가지였겠지만.
겨울이한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가을씨 맞죠?
네 어머님. 현가을입니다. 미리 찾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니요. 괜찮아요. 제가 멀찍이 보고 그냥 갈 길 갔어야하는데 제가 죄송하네요. 성격이 그러질 못해서..
네..저는 괜찮습니다. 어차피 뵙고 인사드려야 하는데 이렇게 먼저 뵙는것도..저는 좋습니다.
겨울은 가을과 엄마의 대화를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뭘해야 할지 뭐라고 해야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저 이 자리가 빨리 파하기만을 빌었다.
겨울이한테 들으셨죠? 저희가 애들 아버지가 안계셔서..혹시 부모님들께서 안좋게 생각하시는건 아닌지 걱정되네요.
겨울의 엄마는 가을의 부모도 한 명뿐인 걸 알면서도 책잡힐 일은 먼저 떼어내고 싶은 마음이었다. 겨울에게 유일한 약점은 그것뿐이라고 생각했다.
말씀 들었습니다. 겨울씨가 아버님을 그리워해서..제게 그런 기회가 있다면.. 아버님의 빈자리를 메우는 남자이고 싶습니다. 그리고..어머님이 들으셨을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어머니가 돌아가셔서..부모 중 한 명을 잃고 자란 마음이 어떤 건지 잘 알고 있습니다.
아..네 저도 그리 들었어요. 어머님께서는 지병이 있으셨나 보네요.
겨울은 인상을 썼다. 가족력이라도 있나 보자는건가..남의 가족의 아픈 부분을..그것도 초면에..이런 엄마가 너무 싫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싶었다.
아뇨..그건 아닙니다.
그리곤 침묵하는 가을. 겨울의 어머니가 할 말 안할 말 가리지 않는 성격이란 건 알고 있었다. 어차피 넘어야 할 산이고..이것이 일종의 면접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 겨울이란 사람을 얻기 위해서..어머님께 성실한 모습을 보여야한다..가을은 자세를 고쳐앉았다.
네..어머님. 지병 같은 건 아니었습니다. 제가 중학교 무렵에 교통사고를 당하셔서..
아..
겨울도, 겨울의 엄마도 놀랐다. 겨울도 처음 듣는 얘기였다. 겨울의 엄마는 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냉정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제가 실례되는 질문을 했네요. 죄송해요. 들추고 싶지 않은 기억일텐데..
겨울이 더는 못견디겠다고 마음속으로 외치는 순간 겨울 엄마의 전화가 울렸다.
어..언니. 쇼핑 다 했어? 어..여기도 인사 잘 나눴어. 몇 층이지? 내가 그리 갈게..
겨울의 엄마는 초면에 실례했다고, 언제 한번 정식으로 인사하러 오라는 말을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엄마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눈을 떼지 못한 겨울. 돌아서서 가을에게 깊은 미안함을 전했다.
걱정말아요 겨울씨. 어머님을 뵈서 오히려 기쁩니다.
아예 빈 말은 아니었다. 가을은 진작부터 어머님께 인사를 드리고 싶었다. 그걸 막는 겨울에게 서운함까진 아니어도..다른 사람을 돕는 듯한 느낌에 조바심이 일었던 건 사실이었으니.
어머님. 역시 생각대로 시원시원하시네요..저는 개인적으로 어머님같은 성격 나쁘지 않습니다.
....
겨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희 고객 중에도 저런 성격 있으시거든요. 시원시원해요. 돌려 말하지 않으니 일하는 우리로서도 편합니다. 의중 파악하느라 신경쓰지 않아도 되고..
어머니와 사위는...
겨울이 조용히 입을 뗐다.
의뢰인과 변호인 사이는 아니니까요..
가을은 아차 싶었다.
네..물론이죠. 전 그런 사무적인 관계라는 의미는 아니었어요. 전 그저..겨울씨가 절 너무 걱정하지 않으시면 좋겠다는 의미에서..
네..알아요. 감사하게 생각해요.
둘은 차갑게 식어버린 커피를 목으로 넘겼다.
가을은 겨울을 쳐다보며 말했다.
겨울씨. 우리 어머니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거..처음 들었죠? 미안해요. 진작에 말하지 못해서..제겐 너무 고통스러운 기억이라..
이해해요. 당연히..말씀 안하셔도 되요. 고통스러운데 굳이 그 기억을 꺼내실 필요는..
아뇨..어차피 오늘 얘기 나온김에 하고 싶어요. 언젠가 말하려했어요. 스쳐 지난 여자들에게 이런 얘길 할 필욘 없겠죠. 하지만 겨울씨는..제게 이젠 큰 의미에요. 그냥 여지껏 만났던 사람 중에 한 명이 아니란거..겨울씨도 알잖아요..
가을은 잠시 눈을 감았다 뜨며 말했다.
중학교 3학년 때..전 공부와 담쌓고 살던 애였어요. 허구헌날 아버지와 감정 싸움을 했고 엄마는 중간에서 중재하느라 고생이었죠.
그날은 겨울방학이었어요. 아빠랑 있고 싶지 않아서 학교 도서관에 있었어요. 저녁에 학원 수업이 있었는데 학원을 빼먹고..친구들과 영화를 보러 갔어요. 핸드폰 전원은 꺼놓고요..
학원에서 부모님께 전화를 해서 제가 안왔다고..부모님은 저랑은 연락이 안되고..아빠는 성질이 나서 욕하고 있는 사이 엄마는 걱정이 돼서 가만히 있질 못하시고 학교 도서관으로 차를 몰고 가셨어요.
그리고..신호를 기다리다.. 반대편에서 차선을 혼동해 오는 차와 정면으로 충돌했죠...즉사하셨어요. 어떻게 해 볼 방법도 없이.
가을은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부르르 떨었다.
저 때문이었어요..저 때문에..엄마를..사랑하는 엄마를..가을은 울고 있었다.
겨울은 놀라서 가을의 곁에 다가가 가을을 안아주었다. 가을은 한동안 흐느끼다 몸을 일으켰다.
그 뒤로 여동생과 아버지를 모시고 살았어요. 아버지는 저를, 저는 아버지를..서로가 서로를 원망하고 미워했던 시기도 있었어요. 하지만 그 때조차 아버지의 얘길 어겼던 적은 없어요. 그 날 이후 전..어른의 말을 흘려듣는 일이 없었어요. 또다시..제 잘못으로 무엇인가 잘못되는 비극이 없어야한다고..그 트라우마를 내내 안고 살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겨울씨를 이해해요. 겨울씨가, 어떤 이유가 됐든, 어머님 말씀을 결국은 거역하지 못하는 걸..전 비난하지 못하고..비난할 생각도 없어요. 누구보다..겨울씨를 이해하니까요.
겨울은 눈에 눈물을 가득 담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을이 얼마나 힘든 학창 시절을 보냈을지..왜 유달리 사람들의 예의 없는 언행을 참지 못하는지..왜 항상 바른 길을 가기 위해 노력하는건지..이해할 수 있었기에.
그리고..자신의 부족한 부분..그리고 가을의 부족한 부분이..어떻게 서로를 끌어당겼는지에 대해서도..비로소.. 조금 더 깊게..이해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