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와 친구들을 만나고 집에 오니 엄마가 TV를 보고 있었다. 며칠 전 백화점에서 가을을 보고 못본척 지나가지 않은 일로 모녀는 한바탕 언성을 높였었다. 엄마는 웬만해선 미안하다거나 잘못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 날도 그냥 그렇게 감정이 상한 채로 끝나나 싶었다. 겨울이 잠자리에 들기 전 엄마는 겨울의 방문을 열었다. 빨래한 옷가지를 겨울의 농에 정리하면서
괜찮은 사람 같던데 나중에 한번 정식으로 인사하러 와라.
문을 닫고 나가려던 엄마는 뭔가 떠올랐는지
겨울이 너 오늘 백화점에서 가을이란 사람 말고 또 누구 만났니? 물었다. 만난 사람 없다는 겨울의 말에 엄마는 뭔가를 말하려다 말고 방문을 닫고 나갔다.
엄마만의 사과 방식이었다. 감정의 골이 깊었다면 딸의 방 문을 여는 일도, 말을 건네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뭐 보세요? 겨울은 엄마에게 물었다.
아니..그냥. TV채널 돌리다보니 나와서..냉정과 열정이라고 아니? 일본 영화던데..
알죠. 책으로 먼저 읽었어요. 영화는 안봤던 것 같은데..잼있어요?
10년이 지나도 잊지 못하는 사랑..겨울이 넌 그걸 믿니?
그럼요. 10년 후 다시 만날지는 모르겠지만..
겨울은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시며 엄마가 화면을 응시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외로운 중년 여인의 느낌이 오늘따라 강하게 풍겼다. 엄마는 아빠를 아직 잊지 못하고 있을까..
엄마는..왜 재혼 안했어? 겨울은 나지막히 물었다.
엄마는 조금 뜸을 들였다 대답했다. 너희들 키우기 바빴잖아..거리에 나앉게 생겼는데..그런 거 생각할 여유가 있었겠니.
그게 다야? 겨울은 물었지만 엄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빠 만난거 후회해? 연이은 질문.
그만 들어가. 엄마 영화 마저 볼게. 엄마는 등도 돌리지 않고 대답했다.
겨울은 방에 들어와 여름에게 전화를 했다.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여름씨. 네..죄송해요. 전화 온지 몰랐어요. 네..네..친구들 만났어요. 봄이랑 대학 친구들. 네 별 일 없어요. 네..여름씨도요.
간단한 안부를 묻고 전화를 끊었다. 오늘 봄이와 친구들의 대화를 긴장하고 들어서인지 집에 오니 채 열시가 안된 시간이었음에도 피곤함이 밀려왔다. 여름은 그런 겨울의 상태가 느껴졌는지 이내 통화를 마무리했다. 겨울은 여름에게 미안했지만 조금 쉬고 싶었다. 겉옷만 벗고 침대에 누웠다. 잠깐만 누워있을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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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에 잠을 깨니 새벽 세시경. 황급히 옷을 갈아입고 양치를 했다. 엄마의 방문을 열고 자고 있는 엄마를 확인했다. 이불을 가지런히 덮어드리려 들어가니 침대 한켠에 아빠의 시집 두권이 놓여있었다. 엄마는..아빠를 그리워하고 있구나..10년이 지나도, 20년이 지나도 잊지 못하는 사랑이 있다. 죽음이 갈라놓아 다시는 만날 수 없는..자고 있는 엄마가 한없이 애처로워 보였다. 엄마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엄마가 반대하는 사람을 만날 자신이 없었다. 며칠 전 왜 연인과 헤어졌냐는 질문에 여배우는 '엄마가 반대했다'고 말해 좌중을 웃게 했다. TV를 보며 겨울도 웃었지만 오늘은 그 인터뷰가 꼭 농담만은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스쳤다.
방으로 돌아와 어떻게든 다시 잠을 자보려 눈을 감았다. 몇 번이나 뒤척인 끝에..시간을 확인하진 않았지만 적어도 한 시간은 흐른 뒤에야..겨우 눈을 부쳤다. 잠을 뒤척이면서..내일 일어나면, 너무 이른 시간만 아니라면, 일어나는대로 여름에게 전화를 하리라..그래서 10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는 사랑을 믿는지 물어보리라..생각했다. 아마도 여름은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만나러 갈 것이냐 물어도..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여름과는 혹여라도 그런 약속을 하면 안된다..그는 잊지 않을 사람이기에. 그는 약속을 지킬 것이기에. 10년간 나만 생각할 것이기에..나는 나가지 않을 것이고..그럼 그는..어떻게 살라는 것인가..어떻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