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나보니 아침 10시였다. 연락하기에 너무 이른 시간이 아니길 바랐던 게 민망한 시간. 겨울은 맘 먹은대로 여름에게 연락했다. 혹시 벌써 다른 일정 시작했으면 어쩌지 걱정하면서.
아..겨울씨. 괜찮아요? 어제 저녁에 피곤해 보이던데.
네. 괜찮아요. 새벽에 한 번 깼지만 비교적 푹 잤어요. 어젯밤은 미안했어요. 너무 사무적이었죠?
아뇨. 그럴리가요. 그냥 목소리 듣고싶었던 것 뿐이에요. 전화 안했을 수도 있는건데..걸어줬잖아요. 그냥 고마운거죠.
전화기 너머로 겨울의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근데 여름씨. 밖이에요? 차 소리가 나네요.
아..네. 있다 아라미스 만나기로 했거든요. 시간이 좀 있는데 날도 좋고 해서..좀 걸으려고요.
겨울은 잠시 고민했다. 여름도 집이고 하면 침대에 걸터앉아 두런두런 얘기를 하고파 전화했는데..여름을 만나러가자니 몸도 좋질 않고 더군다나 여름이 친구와 약속도 있는 상황.
겨울씨. 들려요?
네..여름씨. 잠깐 고민좀 하느라. (웃음)
고민이요? 목소리 들으니 아직 피로가 남아있는 거 같은데 전화 끊고 좀 쉬어요. 나중에 다시 연락할게요.
아뇨. 여름씨. 지금 어디세요?
.
.
.
.
마로니에 공원을 서성이고 있자니 저 멀리서 겨울이 걸어왔다. 여름은 겨울이 먼 발치에서 다가오는 걸 볼 때마다 수년전 벚꽃날리던 시절의 마지막 만남이 오버랩되곤 했다. 여름은 핸드폰을 꺼내 겨울을 찍었다. 원거리 근거리 샷을 몇 장.
사진 찍기도 소질이 있으신가요? 미스터 춤꾼님?
겨울은 다가오더니 한마디 쏘아붙였다. 지난번 만남에서의 충격이 아직 가시질 않는다는 듯.
사진은 영 소질이..그래도 모델이 워낙 훌륭해서 막 찍어도 인생샷이네요. 보실래요? (웃음)
겨울은 여름이 찍은 사진을 들여다봤다. 확대 사진에서 보이는 모델의 환한 미소. 감출래야 감출 수 없는 감정을 들킨듯해 겨울은 얼른 시선을 거뒀다.
대학로..진짜 오랜만이에요. 4호선 타고 혜화에서 내린 것 자체도. 너무 좋아서 가슴이 뛰더라니까요. 아..여름씨. 제가 얘기했었나요? 제가 태어냐 곳이 성북구라고?
여름은 금시초문이라고 대답했다.
저도 하도 어릴 때라 이곳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어요. 혜화는 종로구라 성북구도 아니지만..그래도 인근이라 고향 같은 느낌은 있거든요.
겨울은 여름과 걸으며 자신의 유년 시절에 대해 들은 얘기, 드문드문 떠오르는 어릴 적 장면 등에 대해 이야기했다.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대화하고 있었지만 사실 겨울은 몇 시간 전만 해도 몸이 안좋다고 생각했다. 마음이 몸 상태를 바꾼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마음이 몸의 신호를 잠시 무시하고 있는 것일지도.
브런치를 먹는 중에도, 커피를 마시면서도 여름은 내내 겨울의 안색을 살폈다.
왜요? 뭐 묻었어요? (웃음)
아뇨. 아무래도 좀 피곤하지 않을까 싶어서. 미안해요. 정말. 제가 극구 말렸어야 했는데..겨울씨 보고픈 욕심에..
그런 말 말아요. 저 지금 컨디션 아주 좋아요. (웃음) 그렇게 뚫어져라 보지나 마세요. 괜히 부끄럽다구요. (웃음)
아..네..저도 모르게. (웃음)
겨울은 간밤에 엄마와 나누었던 얘기, 냉정과 열정..10년의 약속 그런 얘기를 들려주었다. 여름은 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책 저도 읽었어요. 영화는 겨울씨처럼 안봤구요. 책으로 접한 작품은 영화화 돼도 잘 안보게 되더라구요. 제가 그렸던 주인공들의 모습을 지키고 싶었다랄까..영화를 보고나면 그 모습으로 박제가 되니..
이해해요. 겨울이 말했다.
10년이 지난 후 피렌체 두오모에서의 재회라..진짜 영화 같죠? (웃음) 비슷한 장면이 오버랩되는데..혹시 알아요? 러브 어패어라고..원작이 몇 번 리메이크됐고 가장 최신작에서 아네트베닝이 주연으로 나왔죠. 그것도 90년대 중반이니..벌써 30년 전..(웃음)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이었죠?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 기다리던 곳..겨울이 미소를 띄며 대답했다.
와..역시. 겨울씨 결혼하면 이런 얘긴 누구랑 나눠야 하나요. (웃음)
겨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좋은 농담이 아니었다. 여름은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겨울은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자리를 비웠다. 여름은 겨울이 울었을거라 느꼈다. 자책감으로 가슴 한켠이 시렸다.
겨울이 돌아왔고 둘은 자리를 정리했다. 카페를 나가자 겨울은 기지개를 켜더니 여름을 보며 말했다.
여기 낙산공원 있는거 아시죠? 이즘 케데헌? 넷플릭스 애니메이션으로 핫한 관광지 됐다는데 한번 가볼까요?
괜찮겠어요? 사실 겨울씨 온다는 얘기 듣고 제일 먼저 떠올린게 그곳이긴 했어요. 근데 계단이 좀 있어서..힘들지 않을까 했거든요.
상관없어요. 가요. 우리. 겨울은 앞장서 걸었다.
횡단보도를 건너고 주택가 쪽으로 들어가니 실외야구연습장이 나왔다. 여긴 아직도 영업하는구나..여름은 익숙한 장면들에 놀라며 얕은 경사를 걸어올라갔다.
저 피렌체 두오모에 올라간 적 있었어요. 여름은 겨울에게 말했다.
입사 전에 시간이 좀 있어서..프랑스, 이탈리아 두 곳을 여행한 적이 있었어요. 이탈리아는 로마, 피렌체, 베니스 이렇게 돌아봤는데 피렌체는 책 영향도 있었죠. 두오모에서의 재회를 상상해봤으니까요. 근데 저한테 기억에 남는 건 두오모가 아니었어요. 저녁에 일행들과 만나기로 하고 혼자 돌아다녔는데 두오모를 다녀오고도 시간이 남더라구요. 인근 관광지를 검색해보니 미켈란젤로 언덕이 있었어요. 다리 하나를 건너고..제 기억에 좀 특이한 다리였는데..그리고 평지를 걷다가 어느 순간 계단이 시작되거든요.
여름은 낙산공원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오르며 당시를 회상했다. 겨울은 때로 가쁜 숨을 내쉬며 여름의 얘기를 들었다.
속으로..아..뭐지? 생각보다 계단이 꽤 높네..이렇게 생각할 무렵 정상에 도착했어요. 하..우리도 거의 도착했네요. 맞아요. 이 정도 고도에 이 정도 계단이었죠. 체감하기론.
낙산공원의 정상에 다다랐을 때 여름도 겨울도 모두 입을 다물었다. 360도 펼쳐지는 서울 도심의 광경을 눈으로 쫓기 바빴다. 성북구 곳곳과 평창동, 종로와 멀리 남산까지..모든 곳이 한 눈에 들어왔다.
와..겨울은 감탄했다. 오길 잘했어요. 정말 와..소리밖에 안나와요. 제 표현력이 이 정도인게 한스럽네요. 관광지로 뒤늦게 알려진게 이상할 정도에요.
여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케데헌으로 뜬 게 아쉬워요. 솔직히 말하면..여긴 제 아지트 같은 곳이었거든요. 그냥 걷고 싶은 날은 성곽 순성길을 따라 걸었어요. 다 걷고 나면 후련해져서 다시 힘내서 일상을 살곤 했죠. 이즘은 좀 뜸하긴 했지만 한동안 상당히 자주 찾았었어요. 이젠 너무 유명해져서..관광객도 많고..예전 홀로 이곳을 찾았을 때의 고즈넉함은 기대하기 어려워졌네요.
혼자만의 보물 같은 장소였군요. 겨울이 이해한다는 듯 말했다.
사귀던 여자친구가 오디션 합격해서 스타가 된 느낌이에요. 여자친구는 자긴 그대로라고 하는데 아무래도 저로선 거리감이 느껴지는..
그래도 여자친구를 응원해주실 거죠? (웃음)
물론이죠. 자기의 꿈을 찾아 간건데..(웃음)
만나고 헤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있는 것 같아요. 누군가는 스타가 돼서 헤어져야 하고..누군가는 스타가 됐기에 만나는..
겨울과 여름은 좀 전에 있었던 대학로를 내려다보며 대화를 이어갔다. 빈 벤치가 보이자 여름은 달려가 손으로 먼지를 닦았다.
겨울씨. 앉아봐요. 재미있는 얘기가 있어요. (웃음)
겨울이 옆에 앉자 여름은 몸을 돌려 겨울을 쳐다봤다.
두오모는 봤다고 했죠? 피렌체에 다시 가게 되면 미켈란젤로 언덕을 꼭 가보세요. 이곳 낙산공원의 기억이 자연스럽게 소환될거에요. 거기 정상에 가면 계단이 앉기좋게 만들어져 있어요. 사람들이 거기 편안하게 앉아 대화도 하고 목도 축이고 사진도 찍고..이탈리아 스페인광장 계단 알죠? 로마의 휴일에서 햅번이 아이스크림 먹던..네 거기요..그런 구도에요. 앞으로는 두오모를 비롯한 피렌체 전경이 한눈에 내다보이고..그래요. 여기 낙산공원처럼요.
아..그런 곳이 있었나요? 왜 전 거길 가보지 않았을까요..겨울은 진심으로 아쉬운 표정이었다.
근데..더 재미있는 얘긴 이제부터에요.
여름은 그 때를 떠올리면서 웃었다.
어차피 저녁 식사 때까지 서너시간 남았고 거기서 어디 다시 가는 것도 시간이 애매했어요. 무엇보다 해질녘 시시각각 바뀌는 피렌체의 전경이 황홀해서 계단에 죽치고 앉아 하늘만 봤더랬죠.
여름씨답네요. 겨울이 웃으며 말했다.
그 때가 이 맘때였거든요. 1월 답지 않게 포근한 날이었어요. 그래선가..사람들도 꽤 있더라구요. 다들 일몰을 기다리는건지..근데 그 때..
혹시 한국인이세요?
그렇게 누가 묻는거에요. 깜짝 놀라 옆을 보니 어떤 여학생이 와 있더라구요.
잠깐만요. 겨울은 무척 흥미롭다는 표정이었다. 지금 꾸며낸 얘기 아니죠? (웃음)
겨울씨. 제가 작가를 존경하지만 작가 될 재능은 없습니다. (웃음)
겨울은 여전히 못믿겠다는 표정이었지만 여름은 얘기를 계속했다.
전 다른 사람한테 한 말인가 주변을 둘러봤지만 제 옆엔 그 여자분 말곤 아무도 없더라구요. 제가 두리번거리는 게 웃겼는지 그 분은 웃으며 말했어요.
저..실례되는 거 아니면 말벗이나 하고 싶어서요.
아..네..
전 그런 경험이 처음이라 머릿속이 약간 공황 상태였는데 이내 진정했어요. 뭐..강도 만난 것도 아니고..(웃음)
강도라는 말에 겨울도 따라 웃었다.
제가 한국인인거 어떻게 아셨어요?
아..저 지금 여행 중인데..거의 막바지긴 해요. 여행하다보니..대충 알겠더라구요. 한중일..분들 비슷하지만 확실히 달라요.
아..전 전형적인 한국인이었군요. (웃음)
네..기분 나쁘세요? (웃음)
아뇨. 한국인이 한국인인게..그럴리가요. (웃음)
그 분과 해몰이를 다 같이 봤죠. 한국에서 어떤 생활을 했는지, 왜 지금 여기 있는지..그런 것들에 대해 얘기하면서요. 두오모 얘기. 냉정과 열정 사이. 다 화두였죠. 자기도 그런 약속을 꿈꾼다는 말도 했어요..
겨울은 중간에 끼어들지 않았다. 조용히 그 상황을 그려보는 듯 했다.
일행과의 저녁 시간이 돼서 자리에서 일어났어요. 그 분도 같이 길을 걸었죠. 계단을 내려와 아까 그 다리까지 왔을 때 분기점이 있었어요. 서로 방향이 달랐죠.
오늘 즐거웠어요. 덕분에.
아뇨. 오히려 제가..여행 중 경험한 얘기..도움이 많이 될 것 같아요. 저는 어떻게 마무리를 해야 할 지 몰라 우물쭈물 하고 있었거든요. 그러다가 불쑥
혹시..사귀는 사람 없으시면 번호..알려주실 수 없을까요. 물어봤어요.
여름씨가요? 겨울은 놀란 표정이었다. 그러더니 이내, 하여간..남자들이란.
아니..겨울씨..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상황이 그랬어요. 물어보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공감을 바라는 건 무리겠지만..여하튼 그런 느낌이었어요. 겨울씨 만나기 한참 전 얘기니까 이해해줘요. (웃음)
알겠다구요. 그래서요? 그 분이 흔쾌히 연락처를 주던가요? (웃음)
아뇨..망설이더니..그런 말을 하더군요. 자기 로망이 있는데..들어줄 수 있겠냐면서..10년 뒤 같은 시간에 다시 미켈란젤로 언덕에서 뵙고 싶다고..
아..겨울은 허탈한 듯 탄식했다. 여름씨 진짜 꾸며낸 얘기 아니죠? 그렇다면 용서 못할 거에요.
정말이에요. 믿기 힘들죠? 저도 처음엔 제 귀를 의심했다구요. 타지에서 처음 만난 사람과 서너시간 얘기하고 다음 만남은 10년 뒤로 하자는게..말도 안되는 얘기잖아요. 이 분 너무 소설에 과몰입한게 아닐까 그런 생각까지..별 별 생각이 다 들더라구요.
그래서 뭐라 했어요? 겨울이 물었다.
선택지가 많지 않았어요. 그 제안을 받거나 거절하거나 둘 중 하나였죠. 전 웃으며 말했어요. 10년이면 얼굴도 기억안날 거라고. 그 분도 웃더니 그건 그렇겠다고 하며 그럼 조금 당겨서 7년으로 하자고 하더군요. 전 7년이나 10년이나 별 차이를 못느꼈지만 알겠다고 했어요. 거절하기엔 상대방의 로망을 바로 깨버리는 것 같아서..못할 짓 같았어요. 그 분은 활짝 웃더니 손을 흔들며 떠났죠. 뒤를 몇 번이나 돌아보면서..저도 웃기는 말이지만..달려가서 붙잡고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눌렀어요. 일행의 약속이고 뭐고..
왜 안그랬어요?
그러게요. 평소 낭만 낭만하던 제 성향상 붙잡아도 하등 이상할게 없는데..헤어지고 약속 장소로 가면서 그 여자 생각뿐이었어요. 역시나..연락처를 받았어야했다는 후회도..
지금 몇 년 지난거죠? 겨울은 셈을 하듯 손가락을 펴 보았다.
5년이요..벌써 그 분 얼굴도 기억 안나요. (웃음)
얼마 안남았네요. 내후년에 정말 피렌체 갈 건가요? 겨울은 물었다.
안갈 것 같아요. 여름은 다소 확고한 어조였다.
왜요? 만나고 싶지 않아요? 왠지 그 여자분 올 것 같은데..
여름은 옅은 웃음을 머금었다. 여름과 겨울은 천천히 성곽을 따라 공원을 내려왔다. 마로니에 공원에 다다르자 겨울은 걸음을 멈췄다.
아라미스씨..이렇게 불러도 되나요? (웃음) 오늘 재미있게 보내세요. 제 안부도 전해주시구요.
정말 안보고 가실래요? 영수도 겨울씨 보고 싶어했는데..
제가 오늘 상태가 엉망이에요. 여름씨 보고싶어 대충 하고 나오느라..다음에.. 꼭 볼 수 있을거에요.
여름씨. 오늘 영화같은 얘기 잼있었어요. (웃음)
네..저한테는 낙산공원에 겨울씨랑 같이 있었던게 더 영화같았어요..그리고..아까 카페에서 울게 해서 미안해요. 그냥..겨울씨를 웃게 하고 싶었는데 되려 울려버렸네요..
아..여름씨. 그걸 아직도 생각하고 있었어요? 저 괜찮아요. 아까 순간 울컥해서..제가 미안해요. 여름씨 잘못 아니에요. 겨울은 당황한 듯 말했다.
겨울씨. 한가지만 더요. 2년이 지나도 전 피렌체에 가지 않을거에요. 전 당신과 여기서 행복하게 잘 살고 있을거니까요. 농담으로라도 약한 소린 안할거에요. 겨울씨가 날 믿어주면..저도 포기하는 일..없어요.
겨울은 여름의 눈을 한동안 바라봤다. 추워서인지 눈망울에 눈물이 맺혔다. 손을 흔들고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자꾸만 고개를 돌려 여름을 쳐다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