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롯데 씨어터 (Charlotte theater)

by 정자까야

겨울이 자꾸 뒤를 돌아봐 여름은 뛰어가 겨울을 잡고 싶은 욕망을 억눌러야만 했다. 잡고 싶었다. 5년 전 피렌체의 그 장면이 오버랩됐고 이번에는 다른 선택을 하고싶었다. 하지만 동시에 아니라했지만 숨길 수 없던 겨울의 피곤한 기색이 떠올랐다. 겨울은 쉬어야했다. 회사 일도 야근의 연속인데 주말마저 세 명의 구애자를 위해 할애하느라 이즘 통 쉬질 못한걸 안다. 돌아보는 겨울을 향해 힘껏 손을 흔들었다. 그게 여름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사랑한다는 말을 통 하지 않으셨다. 여름에게도 아내에게도. 아버지, 남편이란 자리는 으레 그렇게 되는 곳인가 했다. 여름이 고등학생 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집에 오니 아버지가 퇴근해 설거지를 하고 계셨다. 어머니는 야근이라고.


아빠. 며칠 전에 결혼기념일이셨죠?


그랬지. 왜? 뒤늦게 선물이라도 하려고?


(웃음) 엄마가 그러던데 어느 날부터 아빠한테 사랑한다는 말을 들은적이 없다고..


아빠는 말이 없었고 뽀드득 수세미 소리만 부자지간을 채웠다.


아들. 넌 이해 못하겠지만..나이가 드니 애정 표현이 힘들어. 겸연쩍고 민망하고.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더라. 그리고..때론 백마디 말보다 한 번의 소소한 행동이 중요한 걸 알겠어서. 야근으로 지친 엄마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며 가사는 나 몰라라 하는 남편과 무뚝뚝해도 가사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려는 남편..너 같으면 누가 진짜 사랑하는 거 같냐? 나한테 설거지는 사랑한다는 표현이야..


여름은 그 날 야근을 마치고 밤 늦게 돌아온 엄마에게 아빠의 말을 전했고 엄마는 피식 웃어넘겼다. 말은 잘한다고 했었나..


애정이 이기적인 것이 아니라 이타적인 것이라면..아버지의 설거지는 사랑이라는 말보다 낫다. 겨울도 헤어짐이 싫어 자꾸 뒤돌아보는 것이라도..겨울을 쉬게 해 주는 것이, 잘 가라고 손을 열심히 흔드는 것이 여름이 할 수 있는 사랑이다. 여름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게 생각해야만 했다. 아빠..이게 맞는 거겠죠? 여름은 마로니에 공원에서 같은 자리를 몇 바뀌나 돌았다..


조금 있자니 영수가 다가와 여름의 어깨를 쳤다.

야..뭘 그리 생각해? 사람 오는 것도 모르냐.(웃음)


아..미안미안. 나도 모르게..(웃음)


하여간 뭔가 생각에 잠기는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네..아..겨울씨는 끝내 간거야?


여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쉽네..하도 얘길 들어서 이젠 친구처럼 느껴지는데..(웃음)


다음에 꼭 보러 온대. 너한테 안부도 전해 달라더라. (웃음)


그래. 기다리고 있으마. 반년을 기다렸는데 한두달 못기다리겠냐..벚꽃 피기 전엔 보는거지?


글쎄..아마도.,


가을과 봄을 겨울의 친구들이 봤다는 얘긴 들었다. 곧 여름의 차례가 올 것이고..그 다음은 각자의 친구들에게 겨울을 소개하는 순서가 될 것이리라.


왜 안오지? 영수는 핸드폰을 확인하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누구 불렀어? 부르토스?


아니. 일요일 저녁에 평촌에서 어떻게 여기까지 오냐. 가까운 데 사는 사람 불렀어. 이 시간에 약속 있을리가 없으니.


누군데?


영수는 대답은 않고 계속 주변을 둘러봤다. 아토스는 아내를 두고 나올 리가 없고..대학로 근처 사는..나와 영수가 모두 아는 사람...아...


여름이 누군지 알아낸 그 사람이 멀리서 뛰어오고 있었다.


곁에 다가오더니 허리를 숙여 숨을 헐떡였다. 허리를 들어 싱긋 웃는 모습이 어여뻤다. 셋은 인근 선술집으로 향했다.


어차피 늦은거 그냥 걸어오지 뭘 그리 뛰냐. 불안하게. 막걸리를 한 사발 건네며 영수가 말했다.


나 약속 늦는거 싫어하잖아. 나오려는데 엄마가 김치 택배 보냈다고 해서..그거 기다렸다 냉장고에 넣고 오느라..미안해요. 오빠들. (웃음)


근데 너 여기 산지 얼마나 됐어?


여름은 다희가 직장 인근으로 오피스텔을 얻은 건 알고 있었다. 벌써 몇 해 전 일이다.


회사 취직하고 거의 직후에 독립했으니..8년? 그 이상일걸? 세 번 이사했는데 다 이 인근이었어.


그렇구나..여름은 지난달에도 다희를 봤지만 어디 사는지 이런걸 묻지도 못했다. 다희에 대해 아는 게 없어 미안했다.


근데 두 분이 여긴 어인 일로?


그냥. 여자 친구도 오늘 일 있다고 해서.. 심심한데 누구 불러낼까 하다 여름이는 한가할 거 같더라구. (웃음) 보자고 하니 이 녀석이 여기로 오라고 해서.


아..여름 오빤 여기 자주 와?


아니. 자주는 아니고..난 대학로 오면 마음이 편안해져서..(웃음)


근데 원래 점심 먹기로 했다가 갑자기 저녁으로 바꾼 거 있지? 겨울씨 만나야 한다고..


겨울씨? 겨울씨가 여길 왔었다고? 아니 무조건 데려왔어야지. 다희는 꽤나 흥분했다.


아니..잠깐 시간내서 온거야. 몸이 안좋아서..너희 만나기는 힘들었어. 다희 네가 오는지도 몰랐고..


아..아쉬워 아쉬워..연예인 같은 그 분을 꼭 보고 싶었는데..


다희는 비꼬는 건지 진심인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연신 아쉽다고 말했다. 여름은 속으로 다행이라 여기며 파전을 한웅큼 베어먹었다.


아라 오빠는 결혼 생각 없어? 지금 만나는 분이랑?

다희는 다짜고짜 물었다.


안그래도 고민이야. 그 친구는 아직 이십대라 급하진 않은데..내가 나이가 있고..부모님도 은근 눈치 주셔서..이 사람 놓치면 또 언제 다시 시작하나 아득하기도 하고..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그건 걱정 안해도 되잖아. 오빤 금사빠라..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을걸?


다희는 대놓고 웃었고 여름은 애써 웃음을 참았다.


내가 금사빠는 맞지. 그래도 너처럼 동시에 사람 만나고 다니진 않는다고.


이번에 아라가 대놓고 웃었고 여름은 다희의 눈치를 피해 웃었다.


영수와 다희는 만나면 늘 이런 식이었다. 개와 고양이. 톰과 제리. 친오누이 느낌이랄까.


영수가 중간에 여자 친구에게 전화가 와 자리를 비운 사이 다희는 여름에게 막걸리로 러브샷을 하자 했다.


후배님..벌써 취한거야? 뭔 러브샷?


선배 남의 남자 되면 그런 것도 못할테니 그 전에 한번 해 보자는 거에요. 그런 것도 못해줘요?


다희의 성화에 여름은 얼결에 막걸리로 러브샷을 했다. 그것도 두번세번 연거푸. 다희에게 해줄 수 있는게 이런것밖에 없다면 백번이고 해주겠다는 생각이 들무렵 영수가 돌아왔다.


이것들이 잠시 자리 비운 사이 뭔짓이여? 내가 이래서 자리를 못뜬다니까..


영수는 뜬금없이 껌을 다희와 여름에게 하나씩 나눠줬다. 들어오는데 카운트에 있더라. 하나씩 씹고 정신 차려. 다희야. 여름이 내 절친이긴 한데 내가 진짜 궁금한게 있거든. 여름아 미안하다. 너 비하하는거 아니다. (웃음)


여름은 영수가 뭘 얘기하려는지 뻔히 짐작이 가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희야. 봐라. 얼굴도 내가 더 낫지, 체격이며 운동으로 다져진 근육..유머 감각도 내가 쫌 낫고..말도 내가 더 잘하고..도대체 여자들이 여름이를 더 좋아하는 이유가 뭐냐?


오빠. 그걸 오빠가 모르니까 여름 오빠랑 미팅 나가면 항상 여름 오빠한테 연락이 오는 거에요. 사실 아라 오빠 말이 맞긴 해. 분위기도 아라 오빠가 다 띄우고..잘 생긴 것도 사실이지..근데..


아라 오빠가 그냥 잘생겼다면..여름 오빠는 뭔가 연민이 느껴지는 잘생김이랄까..생각에 잠겨있는 듯한..우수에 찬 눈빛이나..가끔 보여주는 환한 미소는 정말..가슴이 미어지는 느낌..뭐 본인은 모를테지만. 다소 낮은 톤의 목소리도 매력적이고. 그러다 혹 오빠가 쓴 편지라도 읽게 되면 그걸로 게임 끝. 카사노바의 자질을 타고 났지 암..


여름은 다희의 말에 만족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고 영수는 욕을 하며 여름의 목덜미를 잡고 흔들었다. 셋은 웃다가 울다가 항아리를 십수 병이나 비웠다.


셋 다 취기가 오른 상황에서 여름은 영수가 가져온 껌을 집어들더니


롯데네..읊조렸다.


얘가 취했나. 왜? 롯데껌 말고 다른 거 줘?


아니..알아? 롯데 그룹명이 괴테와 관련된거?


응? 영수는 금시초문이란 표정이다. 다희는 어디서 들어본거 같다고..


롯데 선대 회장이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고 베르테르가 사모한 롯데..정확히는 샤롯데지..응..그래 샤롯데에서 롯데를 가져와 그룹명을 지은거라더라. 롯데에서 운영하는 뮤지컬 전용극장이 샤롯데잖아..


아..그러네..다희와 영수는 동시에 말했다.


나..중학교 때인가..집에 있는 세계문학전집을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다 읽어버렸거든..그 중에 베르테르의 슬픔에 꽂혀서..몇 날 며칠을 읽고 또 읽고..샤롯데를 잊지 못해 삶을 마감한 베르테르를 멍청한 놈이라고 욕했다가 누구보다 그 마음이 이해가 가서 베르테르를 위해 울기도 했었지.


영수는 역시 넌 사차원이라는 표정이었지만 다희는 술이 깬듯 여름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당시 독일에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베르테르처럼 자살하여 사회적 문제가 됐었대.. 철없는 나이였지만..내 인생에서 롯데같은 뮤즈를 만난다면..그리고 베르테르처럼 좌절감을 느낀다면..나도 그런 선택을 할 수도 있겠구나 싶었어..한동안 잊고 살았는데..


겨울씨 보고 확 그 때의 느낌이 살아난거군. 영수는 건배도 없이 혼자 잔을 비우며 말했다.


그래..그런 거지. 아버지는 TV에서 자살 뉴스가 나오면 화를 내셨어. 자살할 용기가 있음 뭘 못하겠냐고..나도 그런 줄 알았지. 근데 어느 순간 의문이 드는거야. 그래. 죽을 용기가 있으면 뭐라도 할 것 같은데 왜 죽는거지? 역으로 생각해보니 그렇더라구. 뭔가를 해봐야 그게 의미가 없다고 느낀거야. 스스로 삶을 마감한 사람들은. 베르테르는 살 수도 있었지. 다른 무엇인가를 성취하면서..재산이 됐든 명예가 됐든. 혹은 다른 이성과 함께 하는.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선 느낀 거야. 설령 그런 것들, 남들이 이른바 성공이라고 일컫는, 그런 것들을 이룬다해도 자신의 삶에서 아무 의미도 없다는 걸 말야. 사람은 현재의 어려움엔 좌절하지 않지만 앞으로도 나아질 수 없다는 걸 깨닫는 순간 비로소 좌절한다고 하잖아..자살한 사람들을 비난할 건 아닌거 같아. 그 사람들로선 어쩔 수가 없었던 거야..


그래서..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픈 거야? 다희의 화가 난 표정을 느낄 수 있었다. 눈을 바라볼 수 없어 여름은 허공을 보며 말했다.


그냥..그렇다는 거야. 언젠가 모든 것이 무너져버리면..난 다 정리하고 여행을 떠날까해. 마지막 여행지는 괴테의 생가로 해야 하나..


참..못났다. 김여름. 못났어. 아버님의 반도 못따라가는 철부지 자식 같으니라고. 다희는 화가 잔뜩 나서 말했다.


영수는 여름과 다희의 분위기가 이상해지자 여자 친구에게 전화를 건다며 자리를 피했다.


김여름 잘 들어. 뮤즈를 만나건 말건 김여름의 삶은 있는거야. 본인이 말한것처럼 만난 것 자체가 축복이지..대다수의 사람들은 이상형을 만나지도 못하고 살다죽는데..그럼 그 축복을 추억으로 가슴에 새기고..또 꿋꿋하게 현실을 사는거야. 그게 남자고 그게 멋이고..그게 삶이지. 정작 괴테는 왜 안죽고 잘 살았냐고. 베르테르의 슬픔을 누구보다 잘 알았을 괴테가..


혹여 감정의 늪에 빠져..나오려고 발버둥칠수록 더 침체된다면..그래서 만에 하나 이상한 생각이라도 들거들랑 나한테 와. 내가..마음에 딴 여자를 품고사는 남자일지언정..이 세상에 없는 것은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아서..받아줄테니까..그러니까 제발..그런 생각 말고..오빠..


다희는 엎드려 펑펑 울었다. 취했다는 걸 핑계로 그간 쌓였던 감정을 내려놓은 느낌이었다. 여름도 코 끝이 찡해지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뭐라 말해야할지..영수라도 와줬음 하는 순간 영수는 돌아왔다.


아니..이것들이 뭐하는거야? 자리만 비우면 이러네? 아까는 러브샷..지금은 울음바다..여름아 너 여자를 이렇게 웃다울다 하게 하면 벌받는다..


셋은 또 잔을 돌리고 마시고 잔을 돌렸다. 여름도, 다희도 이젠 될대로 되라는 느낌이었다.


화장실에 다녀온 다희는 얼굴이 발그스레해져선 여기 새벽까지 영업한다며 좋아라했다.


오빠들. 나 내일 반차 쓴다. 다들 갈 생각 말아..


나도 반차다..말했었나? 내 호가 반차인거? 반차 김여름..


다희는 웃겨 죽겠다며 여름과 하이파이브를 나눴다.


에휴..이 미친 놈들. 내가 너희들 때문에 인사고과가 엉망이다. 이모님..여기 막걸리 한 병 더요. 영수는 카운터에 큰 소리로 주문을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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